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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정의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7. 2. 9.

두 개의 정의 
- 메갈을 옹호하느냐? 예, 아니오로 답하라는 그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평소 페미니스트들에게 '마초 아재'라고 욕을 먹곤 했는데(남성중심 한국사회의 유산이 내 안에 녹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내가 속한 집단이) 페미니스트들을 편든다고 욕을 먹을 줄은 정말 몰랐다(메갈이 맞든 그르든 나는 그들 또한 페미니즘의 일부라고 본다). 

시사IN 467호 <정의의 파수꾼들?(표지 제목은 ‘분노한 남자들’)>이라는 기사가 논란이 되었다. 나무위키의 ‘메갈리아’ 항목에 등록된(혹은 삭제된) 300여만 자의 텍스트를 분석한 기사인데, 이 기사가 메갈을 옹호하는 기사라며 대규모 구독 해지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이 기사를 메갈리아에 대한 남성의 인식을 알아보는 기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메갈 옹호 기사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메갈을 옹호하느냐? 예, 아니오로 답하라며 따져 물었다. 나는 그들의 물음이 '김일성 개새끼'를 해보라는 말처럼 들렸다. 혐오를 혐오로 맞서는 미러링이 과연 맞는 방법이냐? 라는 것은 충분히 따져볼 만한 주제다. 하지만 너는 누구편이냐? 나의 편이 아니면 적의 편이다, 라는 강압적인 질문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메갈과 혐오의 문제를 ‘두 개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본다. 세상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이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정의가 부딪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메갈처럼 혐오를 혐오로 맞서는 방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정의가 있고, 남성중심사회인 한국사회를 거울에 비춰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정의가 있다. 미러링이라는 약자의 방식을 보면서 백범 김구를 떠올렸다. 

복각본 <백범일지>를 읽고 놀랐던 적이 있다. 초판본을 그대로 재현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나 적나라해서다. 젊은 시절의 백범은 혈기방장했다. 주막에서 한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발견하고 그를 맨주먹으로 때려 넘어뜨린 후 난도질해 죽였다. 엽기적인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그 일본인의 피를 마셨다. 일본이 우리의 국모(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에 대한 일종의 ‘미러링'이었던 셈이다.

백범일지에는 비슷한 사례가 많다. 이런 책을 어린이들에게 읽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백범의 행위를 맥락과 떼어 놓고 행위만 봐서는 문제가 될 것들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백범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그의 행위만 나열한다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간사하고 잔혹한 범죄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백범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행위를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 이해해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가 이뤄낸 성숙을 존중해서일 것이다. 

속칭 메갈이라 불리는 페미니즘 그룹의 ‘미러링’도 그런 통과의례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점에서 나타난 현상만 보고 판단한다면 선악이 분명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맥락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그룹을 지지하는 티셔츠를 입었다가 불이익을 당한 성우의 일이 이슈가 되면서 논쟁이 재점화 되었다. 이 일을 두고 세상이 두 갈래로 갈렸다. 주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옹호그룹은 메갈 티셔츠를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보았다. 주로 남성을 중심으로 한 비난그룹은 미러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메갈=일베’라며 비난했다. 

(이 내용을 빠뜨렸는데 댓글에 지적이 있어서 추가한다) 메갈을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면 일베도 긍정하자는 것이냐? 라고 물을 수 있다. 분명 메갈과 일베는 공통점이 있다. 이 공통점에 주목하면 메갈도 일베처럼 원천봉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메갈은 나타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고, 합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 삼는 부분에 대한 내부 비판도 있다. 이 차이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메갈에 대해서 말할 때, 메갈이 나오게 만든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메갈이 활용한 ‘반사 혐오’를 긍정할 수 없기에 나는 진중권 교수처럼 ‘나는 메갈이다’라고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메갈=나쁜년’이라고 말하기에는 대한민국 중년 기득권 남자로서 좀 염치가 없다. 그동안 남성들이 저지른 숱한 악행에 침묵해 오다 메갈에 대해서만 입을 닫으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메갈 티셔츠가 논란이 된 이후 논쟁은 두 가지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한 축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페미니즘의 다양한 방법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며 화두로 삼았다. 그런데 다른 한 축에서는 이 일에 대해 발언하는 사람에 대해 ‘너는 메갈을 옹호하느냐? 아니냐?’라며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논쟁이 남녀의 세력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에는 선악의 문제로만 따질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선과 악으로 선명하게 나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선이 병존하는 경우다. 충효의 문제가 그렇다. 충을 먼저 택하고 효를 포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이거나 할 때 이를 선악의 문제로 따지지 않는다. 가치가 충돌할 때는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다. 선후가 아니라 조화의 문제다. 

메갈의 미러링을 비난하는 그룹은 그들의 극단적인 표현 방식을 지적한다. 성소수자들을 ‘똥꼬충'이라고 비난하고 독립운동가까지 희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것을 옹호한냐고 캐묻는다. 혐오를 혐오로 맞서는 것은 또 다른 혐오를 불러온다며, 문제제기 방식으로 유효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 물음에 누가 미러링을 옹호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성소수자 혐오가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미러링은 백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선악의 문제로만 판단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미러링은 우리가 성평등 사회로 가는 ‘통과의례'와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미러링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러링은 거울이다. 원본이 사라지면 반사경도 사라진다는 논리다. 

여성들이 겪는 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쩌면 아직 진짜 미러링은 겪어보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같은 과 여학생들을 성적대상으로 놓고 보는 남학생들의 카톡 대화가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이 입에 담는 것이 언제든 실제 상황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대 의대생들이 그랬다. 흑산도 사례처럼 학부모들이 여교사에게 달려들 수도 있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미러링에 대해서 겪는 것은 감정의 문제지 이런 공포는 아니다. 

진짜 현실 미러링이 나타날 경우를 생각해보자. 자신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의대 선배와 동기들을 마취시켜서 거세시키는 의대 여대생이 나온다면? 화장실 비데에 황산을 넣어 불특정 다수의 남자를 겨냥한 테러를 가한다면? 지금 여성들이 현실에서 겪는 일들을 남성들이 실제로 겪어본다면 어떨까? 

언어의 극단이 아니라 행위의 극단으로 갔을 때는 이미 늦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페미니즘 그룹 스스로 미러링의 위험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다. 전범국가 독일을 비롯해 선진국들이 혐오에 대해서 무관용원칙을 적용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런 비싼 수업료를 치르기 전에,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봐야할 것이다(한남패치와 강남패치 사례를 보면 이런 현실 미러링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혐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모할 필요는 있다. 

성차별의 원본이 사라질 세상을 위해서 여성들도 헤아려 줄 입장이 있다. 바로 젊은 남성들의 피해의식이다. 여성 전반이 겪는 성차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겠지만, 그들의 억울함도 살펴줄 필요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여유를 내달라는 것이 무리하다는 것은 알지만, 죄를 지은 것은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다. 젊은 남성들은 여성과 관련해서 자신들은 기득권을 누린 적도 없고 ‘연애시장의 약자' 경험밖에 없는데 가해그룹으로 보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자꾸 나를 가르치며 든다'라고 반발한다. 이들의 입장도 헤아려 설득해 간다면 논의의 진전이 더 빠를 것이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보이는 풍경이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미러링과 혐오의 문제는 다양한 언덕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정의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충효는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조화의 문제다. 메갈과 혐오의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후배기자가 쓴 <정의의 파수꾼들?(표지 제목은 ‘분노한 남자들’)>은 어느 한 쪽을 편드는 기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왜, 어떻게,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살펴서 메갈 논쟁의 전후좌우를 살피게 만들어주는 기사다. 인터넷에 떠도는 발 없는 말 중에서 그중 유의미한 묶음을 분석했다(방법론에 대한 지적이 많은데 이 부분은 후속기사를 통해 설명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거대한 유탄을 맞아 휘청거리게 되었지만, 어찌되었건 이 논쟁이 우리 사회가 한뼘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도 없으면 이 진통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올 여름은 참 길기도 길다.


주) 지난해 여름 썼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