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 어른의 여행 큐레이션, 월간고재열
  • 어른의 허비학교, 재미로재미연구소
카테고리 없음

어른을 위한 문경 여행법, 하늘과 바람과 달과 시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21. 6. 1.

 

하늘과 바람과 달과 시조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교차하는 문경은 하늘맛 바람맛 계곡맛 들판맛을 두루 맛볼 수 있는 한반도의 단전이다. 문경에 갈 때마다 문경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던 문경의 벗들에게 도시인의 입장에서 본 문경의 매력을 들려주는 여행을 기획했다.

문경은 한반도의 단전이다. 양구가 한반도의 배꼽이라면 문경은 한반도의 단전이라 말할 수 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소백산에서 속리산으로 동북 방향에서 서남 방향으로 꺾어 내려오는데 이 산줄기가 한양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던 영남대로와 교차한다.

문경은 산이 육중하고 골이 깊다. 문경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에 문경새재가 있고 조령산과 백화산 사이를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고 지나간다. 이 중부내륙고속도로 위에 옛 신작로가 지나던 곳에 이화령 휴게소가 있다. 이곳이 문경여행이 시작점이다.

이화령에 서면 북쪽으로는 지나온 충청도 땅이, 남쪽으로는 지나갈 경상도 땅이 내려다보인다. 한몫 잡고 고향에 가는 보부상이 되어볼까, 아니면 이미 늦은 나이인데 또다시 과거에 떨어져 암담한 선비가 되어볼까 고민해 본다. 이번에는 과거에 떨어진 노선비가 되어 보기로 한다. 문경의 벗들을 만나 문경에서 힐링하고 다시 기운을 내기로 한다.

문경의 벗들과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2019년 늦가을이다. 문경시의 민관 관광 협의체인 ‘문경관광반상회’의 초청을 받고 관광 특강을 갔다. 문경의 관광자원을 두루 살피면서 문경이 내세우는 것들과 외지인이 좋아하는 것들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경새재 말고도 바쁜 현대 도시인들이 좋아할 관광자원이 많았지만 부각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경의 벗들에게 외지인이 좋아하는 문경을 알려주는 여행을 기획했다.

이화령은 문경의 벗들에게 문경 여행의 출발점으로 추천하는 곳이다. 공간감이 어느 정도 좋은 사람이 아니면 처음 여행하는 곳의 지리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보통은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서 수동적으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지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이화령에서 문경을 내려다보면 어느 정도 공간감을 갖은 채로 문경을 둘러볼 수 있다.

새재를 넘는 물떼새의 시선으로, 가파른 절벽의 오솔길을 뛰어다니는 산토끼의 시선으로, 백두대간 골짜기에서 유유히 노니는 꾸구리(둑중개)의 시선으로 문경의 산과 협곡과 들판을 돌아보길 권한다.”


문경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쉬어간다는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 새재를 넘는 물떼새의 시선으로, 가파른 절벽의 오솔길을 뛰어다니는 산토끼의 시선으로, 백두대간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하천에서 유유히 노니는 꾸구리(둑중개)의 시선으로 문경의 산과 협곡과 들판을 돌아보길 권한다. 각각 하늘맛과 숲맛과 들판맛을 느낄 수 있다.

이화령 외에 하늘맛을 볼 수 있는 곳은 단산과 고모산성이다. 단산은 백두대간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단산의 고도가 956m로 낮지 않은데 이곳을 주흘산 조령산 백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육중한 백두대간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정상 바로 아래 활공장이 있는데 조망 명소다. 전국에 시원한 조망을 보장하는 활공장이 몇 곳 있지만 단산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단산과 백두대간 사이에 제법 너른 들판이 있어서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거의 없다.

페러글라이딩을 즐길 수 있는 활공장이 있고 꼭대기 아래까지 연결하는 모노레일이 있고 정상부에 캠핑장까지 조성되어 있는 단산은 레포츠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올라가는 방법도(모노레일), 머무는 방법도(캠핑장), 내려오는 방법도(페러글라이딩) 색다르다. 문경에 가면 꼭 이곳을 들러보길 권한다.

단산은 공간과 함께 시간을 즐겨야 하는 곳이다. 보통 낮시간에 오르는데 아침과 저녁이 단산 여행을 위한 ‘프라임 타임’이다. 단산의 일출과 석양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지평선과 수평선 너머로 뜨고 지는 해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색이 강렬하지는 않지만 아련한 그리움을 준다.

자연경관이 압도적인 곳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한껏 고양된다. 이때 적절한 퍼포먼스가 있다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다. 그래서 화룡점정을 찍는 마음으로 단산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도모해 보았다. 자연이 만들어 준 무대에서 석양은 무대를 맡았고 바람은 효과를 맡았다. 문경의 지인들에게 이 공연을 보여주자 ‘선물같은 순간’을 경험했다며 고마워했다.

문경에서는 해의 시간뿐만 아니라 달의 시간을 즐길 필요가 있다. 호젓한 문경새재 달빛트레킹을 즐겨보길 권한다


고모산성 역시 시원한 하늘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모산성은 주능선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다시 새로운 산줄기를 만나는 협곡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다. 한눈에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고구려와 맞서는 최전선이었던 이 성은 축조 연대가 2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전에는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고모산성 일대는 요즘 관광의 요충지다. 강 위로 철교와 구교 신교 등 세 개의 다리가 놓인 진남교반과 와인터널 그리고 토끼비리 등이 있어서 한나절 심심하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

이제 물떼새의 시선에서 산토끼의 시선으로 시선을 낮출 때다. 토끼비리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남하할 때 협곡을 보고 멈췄다가 토끼가 한 마리 지나는 것을 보고 지나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후 문경새재를 넘는 사람들도 이 길을 이용했다. 토끼비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천년 동안 닳아서 맨질맨질해진 바닥돌이다. 과거에 떨어진 늙은 선비와 한밑천 잡아보려던 보부상의 애환이 담겼을 돌길을 보면 먹먹해진다.

진남교반 일대는 조령천과 가은천이 만나 형성한 영강이 층암절벽을 휘돌아 나가고 반대편에는 너른 모래사장이 형성된 곳으로 경북 팔경 중 최고로 꼽혔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만큼의 감동을 느끼지는 못한다. 도로와 철길(현재는 레일 바이크길로 활용) 아래 아름다운 풍경이 감춰져 있다. 많은 선비들이 글과 그림을 남긴 아름다운 곳인데 빠르게 지나치는 자동차 안에서는 그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산토끼의 시선으로 걸어볼 또 하나의 길은 문경새재 고갯길이다. 단풍철에는 수백만 명이 몰리고 요즘도 주말이면 관광객들이 꼬리를 무는 이 길을 사람들 사이에서 행군하듯 걷지 않고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밤에 걷는 것이다. 문경새재 고갯길을 걸을 때는 보통 1관문과 2관문 사이를 걷는 해의 시간이 아닌 달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좋다.

권혁주 문경관광반상회 반장은 문경새재 달빛트레킹의 주창자 중 한 명이다. 우리를 위해 손수 제작한 등을 들고 왔다. 시판하는 등은 조악해서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문경새재를 밤에 걸었을 이의 마음은 다급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여유 있게 걸을 수 있다. 폭이 넓은 산책로고 요철도 적어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문경의 풍류는 현재진행형이다. 곳곳에 구곡가가 산재한 문경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이 정자를 새로 짓고 그 정자에서 시조를 지으며 노닌다.”


이제 꾸구리(둑중개)의 시선을 빌릴 때다. 백두대간에서 흘러 내려온 문경의 여러 계곡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선유동천이다. 설악산 백담사계곡이나 지리산 뱀사골과 비교하면 스케일은 작았지만 섬세함이 있는 계곡이다. 선유동천의 맑은 물을 보니 무이산 계곡이 떠올랐다. 무이산의 매력은 맑은 계곡인데 그 비결은 계곡 바닥이 바위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큰 비가 와도 흙탕물이 한 번 흘러내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물이 맑아졌다. 선유동천도 그랬다. 물 옆만 너럭바위인 것이 아니라 물아래도 너럭바위였다.

아니나 다를까 선유동천을 노래하는 구곡가가 있었다. 계곡을 따라 걸으면 곳곳에서 구곡의 각 수 제목을 새긴 각석을 볼 수 있었다. 조선 선비들이 지은 구곡가는 주자(주희)가 말년을 보낸 무이산 일대의 풍광을 보고 노래한 <무이구곡가>의 오마주다. 문경에는 이런 구곡가가 10곳에서 발견되었다. 조선 선비들이 증명한 풍류의 고장인 셈이다. 만약 겸재 정선이나 송강 정철이 금강산 대신 문경을 왔다 갔다면 문경이 금강산이 차지했던 영광을 누렸을 수도 있다.

계곡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자다. 빼어난 정자가 문경에 많은데 흔해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이름난 정자를 찾아가는 길에 다른 정자를 한두 곳 지나게 되는데 그 정자 또한 매력이 있다. 선유동천의 학천정, 진남교반의 봉생정 등이 문경에서 유명한 정자로 꼽힌다. 봉생정은 빼어난 전망을 학천정은 목가적인 풍경을 제공한다.

주목할 점은 문경의 정자문화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주암정은 조선시대 유학자 채익하 선생을 기려 후손들이 1944년에 지은 정자다. 주암(舟巖)은 그의 호인데 주암정은 배 모양의 암석 위에 지어졌다. 후손들은 이 배를 띄우기 위해 주암정을 둘러싼 연못을 팠다. 얼마 전 이 정자를 방문했을 때 노트북을 켜놓고 시조를 짓는 어르신들을 보았다. 시조 배틀을 하신 셈인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문경의 풍류는 과거형이 아니었다.

새재 아래 주막이 99곳이나 있었다는 문경은 경상도에서 가장 개방적인 곳으로 꼽힌다. 지금도 외지 청년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도록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경에서 감상해야 할 곳은 문경의 들판이다. 끝없이 넓은 들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문경의 들판은 나름 매력이 있다. 큰 산이 에둘러 있고 깊은 골짜기 흘러내려 수량이 풍부한 강이 있어서다. 편안한 공간감을 주는데 특히 가은읍이나 산양면은 일본 소도시가 주는 안정감을 준다.

이런 곳에는 멋진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카페 가은역이나 산양면의 화수헌은 요즘 젊은 여행자들의 명소로 꼽힌다. 이런 카페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도시를 옮기는 방식이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최소도시’를 옮기고 자신들이 재해석한 문경을 조그만 소반 위에 혹은 한 잔의 음료에 담는다. 문경 특산물인 오미자로 개발한 음료를 마시면서 문경의 시간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곳이다.

화수헌을 비롯해 문경에는 외지 청년들이 와서 구축한 공간이 많다. 천금량 문경시 관광두레PD는 그 비결이 문경새재를 중심으로 형성된 주막문화가 남겨 놓은 개방성이라고 설명했다. 주막문화가 남아있어 경상도에서 가장 개방적인 지자체라는 것이다. 문경에는 청년 협의체 ‘가치살자’가 있는데 이들은 외부 청년들에게 문호를 개방해 ‘달빛탐사대’를 구성해 문경의 재발견과 재해석을 이끌고 있다. 문경이 더욱 멋진 여행지로 바뀌리라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