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상권이 부흥하면서 건물 임대료가 급등했다.
예술가들과 카페 주인들은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그러나 밀려난 그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일궈내고 있다.
'홍대앞'이 아니라 '홍대옆'에서 문화를 일구는 이들을 만나보았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에서 이름을 딴 ‘이리카페’는 오랫동안 서울 홍대 앞 독립예술가들의 아지트 구실을 해왔다. 시를 쓰는 김상우씨와 그림을 그리는 이준용씨는 청춘을 바쳐 이 카페를 가꿨다. 시인 김경주씨 등 독립예술가들이 시를 구상하고 사람을 만나며 ‘홍대 문화’를 일궈냈다.
이리카페에서는 주인과 손님이 늘 함께 일을 벌였다. 신경숙씨의 북 콘서트를 준비하기 위해 음악가들이 특별한 음악을 준비하고 인디 뮤지션들은 노래로 축복했다. 유명하지 않아도 이름값이 없어도 누구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카페의 두 주인은 물론 아르바이트생까지도 시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자기만의 예술 작업을 한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겼다.
홍대 정문과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이 이리카페가 지난겨울 서울화력발전소(당인리발전소) 인근으로 가게를 옮겼다. 홍대나 홍대전철역에서 걸어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단골손님인 입시 미술학원 수강생들도 찾아오기 힘든 곳이었다. 왜 이리카페는 홍대 앞 중심가를 떠나 외진 곳에서 참기름집과 세탁소 옆에 새 둥지를 틀었을까?
이리카페가 옮겨간 서울 마포구 상수동은 흔히 말하는 ‘상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형적인 주택가였고 발전소 근처라서 그런지 소규모 공장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계약 때마다 임대료를 20% 정도 올렸고 급기야 임대차보호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5년이 지나자 퇴출시켰다. 권리금이고 뭐고 없었다.
주택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섬처럼 존재하던 이리카페는 곧 자리를 잡았다. 군용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김경주 시인처럼 많은 독립예술가들이 망명한 이리카페를 찾아 남하했다. 손님만이 아니었다. 임대료 상승을 감당하지 못한 다른 카페들도 함께 남하했다. 이미 인근에 카페 5~6곳이 들어섰고 새로 카페 3~4곳도 인테리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새로운 카페 골목이 생긴 셈이다.
당인리발전소 주변은 원래 소규모 공장이 많은 곳이다. 이 공장들이 요즘 카페와 스튜디오로 탈바꿈하고 있다. 베이시스트 김평래씨는 신발공장을 개조해 카페 앤트라사이트를 만들었다. 외관은 공장이지만 안에는 카페(2층)와 갤러리(1층)가 들어서 있다. 몇몇 화가는 공장을 공동 작업실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하기도 했다. 함께 작업하고 함께 전시해 판매까지 도모했던 달링스튜디오가 대표적인데 최근 화가들이 철수했다.
이리카페 근처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화가 황지현씨는 얼마 전 이리카페가 옮긴 상수동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진 망원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작업실 임대료를 지원해 주던 후원자가 급상승한 임대료 탓에 후원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작업실을 구하던 황씨는 결국 망원동을 망명지로 정했다.
황씨가 쓰는 건물은 평범한 오피스 빌딩이었다. 그런데 최근 앞서거니 뒤서거니 독립예술가들이 들어섰다. 건물 지하에는 퍼커션 연주팀이, 1층에는 조소 작가들이, 3층에는 회화 작가들이 들어서서 이제는 건물이 예술가 건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만 7명이 활동하는데 황씨는 퍼커션 연주도 함께 하고 조소 작업도 구경하면서 이웃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제 황씨의 작업실도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예쁜 카페와 분위기 있는 술집이 있어서 굳이 홍대 앞까지 안 나가도 된다. 망원동에서 홍대로 이어지는 긴 길을 따라 이런 집이 많고 계속 들어서고 있어서 아쉬울 것이 없다. 오히려 번잡한 홍대 앞보다 더 홍대스러운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샌드위치 전문점 ‘샌드박’을 운영하는 박혜정씨도 남쪽으로 간 이리카페와 서쪽으로 간 화가 황지현씨처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녀는 북쪽을 택했다. 올해로 9년차인데, 원래 마포도서관 자리에 있던 가게가 산울림소극장을 거쳐 지금의 동교동 자리까지 이사에 이사를 거듭했다. 역시 임대료 때문이었다. 메뚜기처럼 자리를 옮기는 것이 장사에 치명적이었지만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홍대 앞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 중
‘샌드박’이 지금 있는 곳은 지하철화로 인해 지상 구간의 공원화 작업이 진행되는 경의선 북쪽이다. 공사장이 가게 앞에 요단강처럼 흘러서 손님을 가로막고 있지만 ‘제발 한곳에서 오래 장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다. 공사장 옆이라 세가 저렴했다. 그러나 공원화 뒤가 문제다. 홍대역 쪽으로 대형 쇼핑몰과 호텔까지 들어설 예정이어서 걱정이 태산이다. 그때가 되면 또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른다.
이리카페와 황지현씨 작업실과 ‘샌드박’의 이주는 홍대 앞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홍대 앞 문화를 일군 주역들이 홍대 앞의 상업화로 인해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여기에 건물주의 횡포까지 더해진다. 독립예술가들이 사랑했던 ‘비하인드’ 등 많은 카페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계속 외곽으로 옮기고 있다. 홍대 앞 애호가인 대중음악 평론가 김작가씨는 “그런 카페들은 문화 창조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역할을 한다.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카페가 사라지면 단순히 가게 하나가 사라지는 것 이상의 손실이다. 메세나 구실을 해주던 카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립예술가들의 생태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카페를 빼앗은 건물주들은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김경주 시인은 “어느 날 자주 가던 카페에 갔더니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예술가들과 소통하는 주인이 사라지니 그 카페는 생기를 잃었다. 곧 예술가들의 발길도 끊겼다”라고 말했다.
문화와 예술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자본과 욕망이었다. 각종 프랜차이즈점들이 유행의 최전선인 홍대 앞에 전진 기지를 세웠다. 압구정동과 명동을 제치고 가장 뜨는 상권으로 부상한 홍대 앞으로 이대 앞과 신촌에서 옷가게와 주점을 하던 사람들이 본거지를 옮겨왔다. 이태원에서 레스토랑을 5곳이나 운영하는 홍석천씨도 최근 이곳에 ‘플레이’라는 레스토랑을 냈다. 청담동에 부티크 건물을 지었던 사모님들도 홍대 앞 건물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홍대 앞은 팽창기를 세 번 거쳤다. 처음은 1980년대 후반 카페가 생기며 오렌지족이 등장하던 때이고 두 번째는 1990년대 중·후반 클럽이 들어설 때다. 서서히 세를 더하던 홍대 앞 상권은 외환위기로 잠시 주춤하다가 2002년 월드컵과 클럽데이를 기점으로 재점화되었다. 유동인구가 3~4배 늘면서 젊음의 특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홍대 앞은 유행의 발원지가 되었다. 떡볶이 열풍이나 막걸리바, 유기농 음식점 등 온갖 유행이 홍대 앞에서 시작되거나 확장되었다. 요즘 홍대 앞의 대세는 트위터다. 트위터를 사용하는 가게 주인이 가장 많은 곳이 홍대 앞이다. 트위터 팔로어 숫자에 맞춰 할인을 해주는 곱창집 ‘라비린토스’를 비롯해 만화 카페 ‘한잔의 룰루랄라’, 막걸리바 ‘월향’ 등은 트위터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홍대 앞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상권이 커지면서 임대료가 높아지자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카페들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하나는 외곽으로 이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택가로 파고드는 것이다. 중심 상가는 자본이 점령했다. 대책이 없는 사람은 독립예술가들이다. 그 발전의 뒤안길에 아티스트들은 짐을 싸서 외곽으로 빠져나가야 했다.
홍대 문화가 실종된 홍대 앞에 자본은 욕망의 둥지를 틀었다. 홍대역을 중심으로 한 간선도로 양쪽으로 한쪽에는 스포츠마사지 업소가, 다른 쪽에는 섹시바가 줄지어 들어섰다. 요즘 홍대 앞 클럽 중에는 지방 나이트클럽 방식으로 영업하는 곳이 늘고 있다. 요즘은 남녀 손님을 연결해주는 ‘부킹’까지 한다.
아티스트들이 문화를 만들고 쫓겨난 자리에서 장사치들은 돈을 벌었고, 지역주민은 불평했고, 손님들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홍대 앞 문화 지도는 급변했다. 김작가씨는 이런 부조화에 대해 “홍대 앞에 오는 사람, 노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는 사람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홍대 앞을 소비한다”라고 설명했다.
쫓겨난 예술가들 변두리에서 부활
변두리로 퇴각하는 문화 창조자들은 변두리에서 ‘문화반정’을 꾀하고 있다. ‘홍대다움’을 되찾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홍대다움’이란 무엇일까? 홍대 앞 카페 문화의 원조로 삼는 집은 1980년대 후반 홍익대 도예과 두 졸업생이 만든 ‘흙과 두 남자’라는 카페였다. 그곳에서 그네를 타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 홍대 미대생들의 통과의례였다. 안상수체를 만든 타이포그래피 전문가 안상수 교수가 만든 ‘일렉트로닉스’는 테마카페의 시조였다. 미대생들을 중심으로 카페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디자인스튜디오203’ 장성환 대표가 기억하는 이런 홍대 앞 카페의 원형은 작가들의 작업실이었다. “가난한 작가들이 차고나 지하실을 개조해 작업실로 사용했다. 버려진 가구를 주워서 고치고 덧칠해 재활용했다. 그곳에서 작업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술도 마셨다. 이런 빈티지 스타일이 카페와 주점에 그대로 이어졌다”라고 말했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를 내며 작업실을 사용하던 작가들은 홍대 앞 문화를 창조한 대가로 그곳에서 물러나야 했다.
디자인스튜디오203의 장성환 대표와 정지연 편집장은 이런 홍대 문화에 대한 ‘기록유산’을 남기자며 지인들과 함께 홍대 앞 문화생태계를 기록한 <스트리트 H>를 창간했다. 정 편집장은 “<브루클린 매거진>이나 <빌리지 보이스>와 같은 잡지가 홍대 앞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안했더니 많은 이들이 흔쾌히 동의하고 제작비와 재능 기부를 해주었다. <스트리트 H>는 단순한 위치 정보가 아니라 홍대 앞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기록이다”라고 말했다.
<스트리트 H>는 홍대 앞을 웨스트 홍대와 이스트 홍대로 나누었다. 이것은 실제 방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웨스트 홍대는 홍대 북쪽을, 이스트 홍대는 홍대 남쪽이다. 홍대 앞이 확장되면서 양쪽으로 생활권이 나뉘고 있어서 분리한 것이다. 정 편집장은 최근 홍대 앞 지도를 확장하기로 했다. 홍대 앞 영역이 남쪽 상수동·당인동 일대와 서쪽 합정동·망원동, 북쪽 연남동 일대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정 편집장은 “이제 홍대 앞이 아니라 홍대 옆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홍대 문화지역이 확장되었다. 상업화된 홍대 앞에서 밀려난 아티스트들이 홍대 옆에서 새로운 문화를 일구고 있다”라고 말했다.
홍대 앞 상권은 앞으로도 무한히 확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쪽으로 경의선이 지하노선으로 바뀌고 공원이 들어서면 철길이 담당했던 자연 경계가 사라진다. 남쪽으로는 당인리발전소가 역시 공원화되어 한강이 직접 연결된다. 서쪽으로는 상수역에서 합정역으로 이어지는 카페 골목을 거쳐 주상복합단지를 지나 도시형 공동체를 형성한 성미산 마을을 넘어 문화 콘텐츠 제작사들이 들어선 상암DMC(디지털 미디어 시티)까지 벨트가 형성되고 있다.
이 현기증 나는 발전은 홍대 앞 문화 지도를 어떻게 바꿔놓을까? 먼저 망명한 이리카페 김상우씨는 “때로 발전은 좋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일군 것을 포기하고 밀려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약이 되기도 한다. 결국 예술은 옛것을 파괴하고 새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 또한 예술의 한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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