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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발견/대한민국 '놀쉬돌'

'잘 놀고 잘 쉬는 법'을 아는 달인들의 모임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1. 2. 15.

혼자 노는 ‘놀쉬돌’보다 함께 노는 ‘놀쉬당’이 더 좋다. 
혼자 하면 무모해 보여도 여럿이 하면 재미있다. 
‘걷는당’ ‘천천히당’ ‘국제 똘짓당’...
 함께 노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증명하는 모임들을 살펴보았다. 


'잘 놀고 잘 쉬는' 사람들의 모임, '놀쉬당'
 
잘 먹고 잘 살지는 못해도 잘 놀고 잘 쉴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시작한 ‘놀쉬돌(잘 놀고 잘 쉬는 법의 달인들)’ 기획에 대한 독자 반응이 뜨거웠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동안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몰랐는데 목표인 줄 알았던 삶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례로 든 ‘놀쉬돌’이 조금 멀게 느껴진다는 의견도 많았다. 장기 세계일주 여행이나 급작스러운 직업 전환 같은 것은 쉽게 도모할 수 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로망’으로나 품을 먼 이야기가 아니라 부담 없이 시도해볼 수 있는 모형을 부탁했다. 큰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주변 여건이 무르익지 않아도 가능한 모형을 요구했다. 


탤런트 김여진씨(왼쪽에서 네 번째)는 홍대 청소·미화 노동자를 돕기 위해 ‘날라리 외부세력’을 조직했다.


그때 기자가 참여했던 모임이 생각났다. 기자와 취재원들의 모임인 ‘오프더레코드’라는 모임이었다. 취재하고 ‘언제 술 한잔하자’는 빈말을  참말로 구현하기 위한 모임으로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취재 ‘뒷담화’를 나누었다. 일종의 ‘살롱’ 같은 것으로 모두가 똑같이 회비를 내고 모여 열심히 놀 궁리를 했다.

죽이 잘 맞았다. 거의 매주 정기모임이 있었고, 심지어 일주일에 7일 모이는 주도 있었다. 모이면 술을 마셨다. 술만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주말엔 운동 좀 하고 술을 마셨고, 좋은 공연 보고 술 마시고, 스노보드 조금 타고 술 마시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술 마셨다. 그렇게 술을 열심히 마셨어도 모임 회원 중 MBC <무한도전> PD도 나왔고, 탁현민과 같은 뛰어난 공연기획자도 나왔다.

이런 ‘놀쉬당’이 있으면 편리하다. 혼자서 하면 조금 무모해 보이는 도전도 여럿이서 하면 재미삼아 할 수 있었다. 보드게임 같은 가벼운 소일거리부터 스노보드나 수상스키 같은 취미생활도 함께 했다. 본격적으로 특정 동호회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할 각오는 되어 있지 않고, 맛만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제격이었다. 

가끔 해외 ‘놀쉬당’과도 교류했다. 그쪽에서 멤버가 한국에 올 때마다 성의껏 술을 대접했는데, 해외 출장 때 보답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공술은 공술을 불렀다. 특히 뉴욕에 출장 갔을 때 그 진가를 체험했다. ‘서울 촌놈’을 위해 뉴욕 ‘놀쉬돌’들이 최고의 유람 코스를 안내했다. 

   
벵자맹 주아노(오른쪽에서 두 번째)씨는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소프라노 홍혜경씨가 출연하는 오페라를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볼 수 있도록 예약해두었고, 교포 재즈 뮤지션은 그날 밤 뉴욕에서 열리는 재즈 공연 중에서 가장 좋은 공연을 예약해주고 공연이 끝난 뒤 뮤지션과 인사도 하게 해주었다. 뉴욕 화랑가를 돌 때는 유학 온 화가 한 명과 미식가 한 명을 붙여주어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삼성가 홍라희씨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파업을 하고 <시사IN> 창간을 하며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 ‘오프더레코드’는 와해되었다. 기억조차 희미해질 무렵 우연히 유사한 ‘놀쉬당’을 볼 수 있었다. 좀 연륜 있는 ‘놀쉬당’이었다. 알고 지내던 방송작가 결혼식을 갔는데 전직 국회의원 영화감독 유명 목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로 이뤄진 중창단이 ‘소외된 이웃’인 가난한 시인과 방송작가의 행복을 기원하며 어설픈 합창으로 축가를 부르고 있었다. 


진보도 재미있어야 한다는 ‘야생화 정신’

정지영 감독, 이수호 전 민주노총위원장, 김민웅 목사, 송호창 변호사 등이 이 모임에 속해 있는데 연륜이 있는 만큼 놀고 쉬는 것이 제법 조직적이었다. 서울 홍대 앞에 ‘놀’이라는 카페 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며 아지트로 삼았다. 모임 이름은 아사마루인데 ‘아침’이라는 뜻의 일본어 ‘아사’와 ‘꼭대기’라는 뜻의 ‘마루’를 합친 것이다. 놀 때는 ‘야생화 정신’으로 노는데, ‘야비하고 야만적인 시대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화끈하게 꽃 피우자’라는 의미란다.  

이들의 어설픈 축가 속에 결혼식을 올렸던 라디오작가 허은실씨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의 미래를 고민하자며 만들어진 수다 모임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놀이 모임으로 변질되었다. 진보도 재밌어야 한다는 소신으로 문화예술을 함께 향유하되 현안이 발생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연대하고 참여한다”라고 설명했다. 

매달 한 차례씩 함께 영화나 공연을 관람하고 함께 홍대 클럽에서 살사 댄스를 배우기도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국제영화제 등에는 함께 가서 ‘레드카펫 밟기 놀이’도 하는데, 가끔 재미삼아 동영상을 찍어서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한다. 요즘은 멤버들이 더 재밌는 모임을 만들기 위해 각자 개인기를 연마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지도층’이라고 해서 꼭 고상하고 돈 많이 드는 취미생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박용만 두산중공업 회장은 지인들과 ‘걷는당’을 함께 하고 있다. 대학생들처럼 국토 종단을 하는 것이다. 국토 종단과 횡단을 마친 그는 포항에서 목포까지 남도 횡단을 준비하고 있다. 올레 길처럼 예쁘고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위험한 국도를 걷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런 길을 걸어야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국토가 어떤 상황인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소셜코디네이터 심실 유니온커뮤니케이션 회장은 재벌가에서 ‘놀쉬돌’로 소문이 나 있다. 그가 밥상을 차린 각종 기부 봉사 행사에 재벌들이 기꺼이 숟가락을 올려놓는다. 그 비결에 대해 심 회장은 “당신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시킨다. 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함께 할 이유가 없다”라며 설득이 아닌 제안으로 도움을 이끌어낸다.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놀이가 된다. ‘오요리’ ‘에이에이카페’ ‘제너럴닥터’ 등 홍대 앞 레스토랑과 카페 주인들이 최근 만든 ‘천천히당’이 대표적인 가치형 ‘놀쉬당’이다.  ‘도시에서 천천히 산다는 것’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놀이는 바로 먹을거리와 마실거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홍대 앞 레스토랑·카페 주인들이 만든 ‘천천히당’은 ‘도시에서 천천히 사는 방법’을 궁리한다.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것’ ‘본성에 가까운 대로 회복하는 것’ ‘나의 만족이 우리의 만족이 되는 것’ ‘오래 산 사람이 새로운 사람을 보호하는 것’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을 함께 고민할 주제로 삼은 이 ‘천천히당’은 조만간 시골로 ‘농활’을 갈 예정이다. 직접 농산물을 길러보며 메뉴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홍대 앞은 이런 다양한 자연산 ‘놀쉬당’을 볼 수 있는 곳인데 EBS <세계테마기행> 연출자인 탁재형 PD가 이끄는 ‘국제똘짓당’은 그 경쾌한 모형이다. 세계를 다니며 국제적으로 ‘똘아이짓’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남미똘짓당’ 성격이 강하다. 남미에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남미 옷을 입고 모여 남미 음악을 들으며 남미 음식을 먹는데, 곧 ‘아프리카똘짓당’과 ‘동남아똘짓당’을 하부조직으로 둔다고 해서 가입 신청을 해놓았다. 


초심 잃을까 취직 기회도 마다하는 ‘호모루덴스’

‘국제똘짓당’의 하부조직 중 ‘스피릿 브라더스’ 모임에 가본 적이 있다. 술을 공부한다고 해서 ‘학술회’라고 불리는데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한 술을 함께 마시며 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술을 통해 그 나라 문화와 국민의 성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는데, 몽롱한 것이 나쁘지 않았다. 

홍대에는 카페를 중심으로 잘 놀고 잘 쉬는 것을 궁리하는 그룹이 많다. 무용심리치료사 한지영씨는 “단골 카페에서 주인과 손님이 어우러져 함께 노래하며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본다. 커피를 사고 파는 것은 부차적인 일처럼 보이고 심지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서로 까먹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독립 큐레이터 신은진씨는 “치열하게 놀고 열심히 쉬는 사람이 홍대 앞에는 너무나 많다. 초심을 잊을까봐 취직 기회가 와도 취직하지 않고 노는 것에만 열중하는 친구들도 있다”라고 말했다(<시사IN>은 이처럼 문화사랑방, 일종의 ‘살롱’ 구실을 하는 카페와 작업실 탐방 특집 기사를 기획하고 있다). 

전방위 놀이그룹 ‘아사마루’ 회원들이 결혼식 축가를 부르고 있다.

이들은 세상일에 무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홍대 청소·미화 노동자 대량 해고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만의 ‘투쟁 놀이’를 선보였다. 1월22일 오후, 홍대 앞 놀이터에 호모루덴스들의 한판 푸닥거리가 벌어졌다. 해고된 홍대 청소·경비 노동자를 위한 ‘우당탕탕 바자회’를 열고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 바자회를 개최한 ‘날라리 외부세력’은 시민단체나 노동단체도 아닌 탤런트 김여진씨를 비롯한 트위터 이용자 들이었다. 우울한 현실에 대한 발랄한 문제 제기에 노동자들도 즉석에서 트로트 곡을 부르며 화답했다. ‘날라리 외부세력’은 세상을 바꾸는 ‘놀쉬당’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홍대 앞의 ‘놀쉬당’ 문화는 사람들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도 전파되고 있다. 홍대 앞에서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긴 만화가 메가쇼킹은 감성충전소 ‘쫄깃센터(www.jjolkit.com)’를 만들고 있다. 많은 홍대 앞 ‘놀쇠돌’들이 개관과 맞춰 제주도에 놀러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메가쇼킹은 방문하면 국빈급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만 하고 아직까지 취재를 거부하고 있다(쫄깃센터를 비롯한 제주 지역의 ‘놀쉬당’ 탐방 기사 역시 기획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많은 이태원에서는 국제적인 ‘놀쉬당’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종결자’는 한국에 와 있는 프랑스인들인데, 8년 전 서울 이태원의 한 레스토랑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국에 와 있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소설가 황석영 선생을 위해 환갑잔치를 열어주고 있었다. 황석영을 너무나 좋아하기에 한국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예순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주축이 된 멤버들을 만나보았다. <한국수첩>이라는 한국에 대한 문화예술 무크지를 함께 발행하는 그들은 대부분 한국말이 익숙할 정도로 한국에 오래 살았다.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으냐고 물으니 전공이 ‘퇴계 이황’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석굴암’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에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이들에게 놀이는 바로 출판이다. 이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벵자맹 주아노 씨는 “최근에는 저술 작업에 치중하고 있다. ‘아틀리에 데 카이에(작업실의 수첩)’라는 출판사 이름으로 한국의 문화와 문학 등을 프랑스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최고의 순간은 완성된 책을 만지는 순간이다”라고 말했다.  

주아노 씨는 최근 재미있는 ‘놀쉬당’을 하나 더 조직했다. ‘미식의 철학(gastrosophist)’이라는 국제적 미식 동호회다. ‘내 입에 맞다 안 맞다’를 ‘맛이 있다 없다’로 착각하는 한국인을 위해 음식점을 국제 기준으로 평가해보겠다며 미국인·오스트레일리아인·중국인·한국인 등과 동호회를 만들었다. 

동호회 이름을 거창하게 지은 것에 대해 주아노 씨는 “나에게 미식은 취미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Just do it(그것을 해라)’에서 ‘Just for it(그것을 위해 해라)’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놀쉬당’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일을 하는 것만이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놀이도 충분히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 혼자 노는 것이 아니라 함께 놀아야 더 재밌다는 것, 그리고 오늘 놀 수 있는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은 넓고 놀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