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예술 게릴라 운동 - '지리산프로젝트 - 우주 예술 집'
버려진 공장을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으로 활용한다면? 달동네 담벼락에 화가들이 벽화를 그려준다면? 시 청사 이주로 상권이 죽은 원도심에 예술가들이 들어와 재생시킨다면? 멋질 것이다. 아니 충분히 멋졌다. 이런 일들은 이미 지방자치단체에서 충분히 해본 실험이다. 성과도 있었고 부작용도 있었다.
‘비생산적 생산가’인 공무원과 ‘생산적 비생산가’인 예술가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딛고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꾸준히 성장했다. 이제 웬만한 지방 도시에서는 이런 레지던스 프로그램 하나씩은 진행하고 있고 예술가들과 함께 원도심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곳도 많다. 이런 예술 활용법은 이제 지방행정의 공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주목해볼 변종이 있다. 바로 ‘지리산 프로젝트 2014:우주·예술·집’이다. 드물게 관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자발적 예술 프로젝트다. 그러면서도 규모가 만만치 않다. 전북 남원시와 경남 산청군 등 지리산 5개 시·군을 잇는 광대한 프로젝트다. 285㎞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을 낸 사단법인 숲길,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이끌며 생명평화 운동의 구심이 된 실상사, 방대한 시설을 예술가들에게 개방해 문화예술 허브가 되고 있는 성심원 등이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한다.
시작은 이랬다. 지난해 가을 ‘해인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안상수 전 서울디자인재단 이사장과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지리산 실상사에 들렀다가 충격을 받았다. 실상사에서는 정전 60주년 기념해 ‘마을로 간 전쟁’이라는 학술제가 열렸다. 김 실장은 “전혀 다른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리산 산자락에서 생명과 평화를 화두로 우주를 고민했다. 예술과 종교의 분리 과정이 예술의 발전 과정이었는데 예술과 종교의 화해 가능성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학술제가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실상사 회주인 도법 스님은 두 베테랑 문화기획자에게 호소했다. 지리산에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두 문화기획자는 “절에 예술가 한 명 키우십시오”라고 화답했다. 그렇게 해서 정재철 작가와 정만영 작가가 실상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정재철 작가는 경내에서 돌을 모아 쉬고, 놀고, 생각할 수 있는 쉼터를 만들고 있다. 정만영 작가는 실상사 입구의 해탈교 위에 뇌량(양쪽 뇌를 연결하는 부위)을 그려 깨달음에 이르는 길임을 나타낸다.
두 작가 외에도 여러 작가들이 실상사를 방문하며 작품을 구상한다. 창원조각비엔날레의 큐레이터를 맡은 김지연 큐레이터가 이 실상사 예술 프로젝트를 주관하고 있고 공공미술 프로젝트 전문가인 전동휘 협력 큐레이터가 옆에서 돕는다. 경남도립미술관의 김재환 학예사, 김해문화재단의 이영준 전시교육팀장 등도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주목할 부분은 큐레이터들이 자발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안상수 전 이사장은 그 이유로 ‘사람’을 꼽았다. “지리산도 매력 있지만 지리산의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간다. 특히 도법 스님,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실상사와 함께 지리산 프로젝트의 양대 축을 이루는 성심원은 한센인 요양시설이다. 지금은 시설도 현대식으로 개선되고 다리도 놓여 있지만 예전에는 경호강을 사이에 두고 격리되어 있어서 한센병 환자들이 나룻배로 건너다녀야 했던 곳이다. 이곳은 33년간 500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의 장례 미사를 주관한, 스페인 출신의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한국 이름 유의배) 신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12년 성심원 원장으로 부임한 오상선 바오로 신부는 육지의 섬처럼 존재하던 성심원을 외부에 개방했다. 특히 지리산 프로젝트의 무대로 쓰이면서 성심원은 지리산 예술가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지리산 프로젝트에서 성심원 예술가 레지던시를 전담한 최윤정 독립 큐레이터는 미술계의 이슈였던 대구시립미술관 큐레이터 연쇄 해임 사건의 피해자다. 새로운 관장이 부임하고 기존 학예사들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내보내 미술계의 빈축을 샀던 사건이다. 최 큐레이터는 성심원에서 입주 예술가들을 돕는 한편 스스로도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김대홍·이범용 등 국내 작가와 이집트 작가 모하메드 파우지와 프랑스 작가 이브 에티엔 소놀레 등이 성심원을 베이스캠프 삼아 작업을 진행했다. 최윤정 큐레이터는 “작가들이 정말 재미있어한다. 김대홍 작가는 주말마다 차를 끌고 지리산 구석구석을 누빈다. 모하메드 파우지는 하루에 수십 점씩 드로잉을 쏟아내고, 이브 에티엔 소놀레는 여름내 땀 흘리며 작품을 만들고 갔다. 지리산에 오면 작가들이 에너지가 넘친다”라고 말했다.
지리산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두 종교 시설만큼 지리산 구석구석의 정보를 가진 사단법인 숲길도 지리산 프로젝트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큐레이터들이 지리산 프로젝트의 핸들이라면 사단법인 숲길은 이 프로젝트의 엔진 격이다. 큐레이터들의 기획력과 숲길의 행동력이 결합해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285㎞의 둘레길을 낸 뚝심을 본 지리산 5개 시·군 주민들은 사단법인 숲길에 대한 신뢰가 상당하다. 숲길에서 하는 일은 일단 믿고 지켜보자는 식이다. 하동군 삼화실마을 주민들도 그렇다. 사단법인 숲길의 제안으로 폐교를 수리해서 삼화 에코하우스로 만들었는데 이곳을 예술가들의 실험터로 내놓았다.
삼화 에코하우스의 예술 프로젝트는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작가 중 가장 전위적으로 꼽히는 강영민 작가가 맡았다. 강 작가는 10월3~4일 삼화 에코하우스에서 ‘전국 예술가 캠핑대회’도 열 예정이다. 이곳이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지역 주민의 염원을 예술가들이 캠핑으로 구현하게 한다는 구상이다. 최근 유행이 되었지만 지나치게 과시적인 캠핑 문화도 비틀어볼 작정이다.
팝아트협동조합 대표를 맡은 강 작가는 요즘 극우 누리꾼들의 집합소인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에 꽂혀 있다. 그는 “일베 회원들과 ‘예술 새마을운동’ 퍼포먼스를 하려고 한다. ‘일청교육대’를 이곳에 만들어보겠다. 마을 창고를 스크린 삼아 ‘대한뉴스’도 틀고 보수 단체인 나라사랑무궁화회로부터 무궁화 묘목을 받아 마을에 심을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사단법인 숲길이 움직이면서 지리산 골짜기에 은둔 중이던 지역 예술가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화가라 불리는 이호신 작가가 지리산 프로젝트에 결합해 지리산의 진경산수화를 보여준다. 지리산 버들치 시인 박남준은 지리산 프로젝트 개막 행사에서 정태춘·박은옥 부부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곳 주민들에게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으로 불린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지리산처럼 지리산 프로젝트의 스펙트럼도 넓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천일기도회를 진행하는 성심원과, 삼보일배를 전국에 알린 도법 스님이 있는 실상사가 일베나 박정희 숭배자와 함께할 수 있는 행사가 바로 지리산 프로젝트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이름이 ‘우주·예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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