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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보러 가는 섬이 있다고? 응, 있지. 풍도라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21. 8. 25.

 

 

풍도는 거대한 온실 밖 식물원 


소설가 김훈 선생님을 모시고 풍도에 다녀왔습니다. 가을에 경기아트센터에서 김훈 선생님을 모시고 토크콘서트를 가질 예정인데 사진/동영상 촬영차 다녀왔습니다. 일전에 뵈었을 때 최근에 다녀온 풍도 이야기를 했더니 궁금해하시더군요. 특히 풍도 앞바다가 청일전쟁의 주된 전장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여행가로서의 김훈'을 재발견하기 위해 풍도 답사를 기획했습니다. 

답사 내내 김훈 선생님의 화두는 청나라 병사, 청일전쟁, 청나라 병사의 무덤 등등 오직 풍도의 역사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을 잇는 풍도 역사소설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풍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셔서 저도 자료조사를 조금 해보았는데 무엇보다 청일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이 제국으로 가는 기점으로 보고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라는데... 

 


단풍섬 풍도는 올 가을에 정규 답사 여행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경기도에는 4개의 유인도가 있습니다. 풍도 육도 입파도 국화도. 이중 여행감독 원픽은 단연 풍도입니다. 풍도를 간단히 묘사한다면 '거대한 온실 밖 식물원'입니다. 풍도는 야생화의 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풍도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등이 지천이라고 하더군요. 풍도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단풍나무도 많습니다. 봄과 가을에 압도적인 풍광을 선사합니다. 


늦여름에 풍도에 가야하는 이유는 '석양 맛집'이기 때문입니다. 덕적군도 너머로 압도적인 석양을 볼 수 있습니다. 인근의 당진 왜목마을이 '석양 맛집'으로 꼽히는데, 지도를 들여다보면 아시겠지만 댈 것이 아닙니다. 눈에 걸리는 것 없이 시원한 하늘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이 끝나기 전 꼭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가을이 되면 풍도는 단풍섬으로 변합니다. 봄에 갔을 때 수령이 500년 이상 된 은행나무를 두 그루 보았는데 가을에 어떻게 물들지 궁금하더군요. 풍도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니 단풍나무가 제법 많았는데 이 단풍나무들이 가을에 어떤 화폭을 펼칠지 기대가 됩니다. 

 


풍도에서 석양을 감상하기 좋은 곳은 붉배입니다. 큰 바위틈으로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캠퍼들의 성지로 꼽히는데 여기서 등대를 끼고 석양을 보면 잊을 수 없는 풍광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기는 캠핑을 하면서 소수가 독점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풍광을 나누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붉배에서 언덕을 넘어 마을에 가는 길은 야생화 명소입니다. 야생화 마니아들이 풍도에 야생화를 보러 가는 때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2~3월이라 하더군요. 눈을 뚫고 나오는 야생화를 볼 수 있다고 하네요. 아직 북서풍의 바람 끝이 차가울 때인데 내년에는 저도 그때 한번 가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볼 것 많은 풍도가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던 이유는 배편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 출발한 배가 안산 대부도 방아머리에 들러 풍도에 들어가는데 하루에 한 편 밖에 없습니다(주말에는 두편). 풍도는 이런 불편을 감당하고라도 꼭 한 번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섬입니다. 

 

 

잊혀진 역사의 섬 풍도

아래 글은 니시무라 도시스케라는 일본 종군기자가 남긴 <풍도해전>의 기록을 후대에 복원한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잊힌 전쟁이지만 일본에서는 풍도해전을 비중 있게 가르친다고 한다. 일본이 해양대국으로 성장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의 영웅 도고 제독도 이 풍도해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선의 서해 바다에서 일어난 풍도해전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1894년 봄에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였다. 동학군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3,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일본은 이에 항의하여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군대를 보냄으로써 갑신정변 이래 10년 만에 청일 양국의 대규모 군대가 한반도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재연된 것이다. 

청의 함대가 아산만 일대로 진출하자, 일본대본영은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伊東]에게 비밀 작전을 하달하였다. 기습공격을 통해 청의 함대를 격파하여 청의 기세를 꺾으라는 것이었다. 이토는 아산에서 중국 여순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안산 앞바다의 풍도 인근에 전함 15척, 수뢰정 6청을 숨겨놓았다. 그리고 추가로 쾌속 순양함 3척을 조선 해안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풍도 앞바다로 함께 보냈다. 

풍도의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힐 무렵인 오전 7시 52분경, 풍도 해안에는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 3천 톤급 황룡(黃龍) 1, 2호 군함이 100여 미터 사이를 두고 정박 중이었다. 200㎜ 함포가 좌현 우현 각 2문씩 장착된 이 군함들은 구미 열강들의 군함에 비해 볼품없었지만 청의 해군력을 지탱하고 있는 주력함으로서, 수일 전 본국 대련항(大連港)에서 보병 2천여 명을 싣고 조선의 내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아산만에 들어와 있었다. 

일본 해군 제1유격대 소속 ‘요시노[吉野]’, ‘아키츠시마[秋津州]’, ‘나나이[浪速]’ 호 등 3척의 쾌속 순양함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청나라의 황룡 1, 2호는 7월 25일 새벽 병력 수송선의 호위 임무를 마치고 아산에서 기지인 중국의 여순항으로 귀환하기 위해 풍도 서북해상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본 전함 1진은 4천 톤급 규모로 300㎜ 함포 8문을 장착한 전함들로, 우수한 독일 조선기술의 도움으로 막대한 군비를 들여 진수시킨 일본 해군의 정예 전함들이었다. 

본국의 지령에 따라 청의 함대를 섬멸시키고 조선 인천항에 상륙, 싣고 온 3,000여 명의 보병으로 하여금 한성을 공략할 목적으로 경기만에 포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먼저 청 함대 제원호(濟遠號)에 포격을 시작, 곧이어 공격을 계속하였다. 약 한 시간 반 정도의 전투 끝에 광을호(廣乙號)는 포격으로 화약고가 폭발한 채 암초에 좌초되면서 심각한 손상을 받았다. 제원호의 함장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하려 하였으나 청병 수병들이 이에 반발, 일본 군함에 포격을 가하는 등 저항을 하면서 부서진 채로 탈출하여 여순항으로 돌아갔다. 이 공격으로 일본 군함 요시노호가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한편, 호위함 조강호(操江號)와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를 싣고 아산으로 들어가던 고승호(高升號)는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았으며, 조강호는 나포되었다. 원래 고승호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으로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이었다. 이 배에는 골즈워시(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Hanneken) 소령도 승선하고 있었고, 7월 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두 배를 가로막은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순양함 나니와호였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고승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호로 옮겨 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결국 4시간의 협상 끝에 도고 함장은 사격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유럽 승무원들을 구한 건 일본군이었다. 

고승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군 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다. 이것이 풍도해전이며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결국 풍도해전은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고, 일본은 이후 한반도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같은 날 일본군 4,000명은 아산과 성환에 주둔해 있던 청군을 공격했다. 청나라 총병 섭사성(聶士成)이 끌던 부대가 패전하자 해군 제독 엽지초(葉志超)는 탈주했고, 아산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래 동영상은 지난봄에 풍도에 다녀왔을 때 간단히 만들어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