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방송을 보면
광주 목포 등에서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가슴 깊이 애도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김 전 대통령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진 곳이니 더 슬퍼하겠구나' 생각할 것 같은데,
광주전남의 실제 추모 분위기는 절대 서울에 비해 더 뜨겁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국장이 치러지는 기간 동안 인턴기자 2명과 함께 하의도 목포 광주 여수 등을 돌아보았습니다.
하의도와 목포는 인턴기자가 가보았고 저는 광주와 여수를 가보았습니다.
하의도는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이니만큼 각별한 추모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포와 광주와 여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 도시 중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목포의 추모분위기가 뜨거웠고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지만 광주는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습니다.
여수의 분향소는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산했습니다.
(여수공항 대합실을 보니 사람들이 영결식을 보지 않고 골프 중계를 보고 있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호남인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도 컸던 것 같습니다.
지역차별 논란을 의식해 확실하게 '호남 퍼주기'를 해주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점에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진정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호남인들의 마음에도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운구 행렬에 광주 옛 전남도청이든, 5-18 묘역이든, 목포역이든 한 번 들러주십사 했지만,
'호남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남기 위해
운구 행렬은 호남으로 방향을 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호남인들은 진심으로 그를 배웅했습니다.
여수시청 분향소. 한가했다.
해준 것은 없었지만,
늘 고맙고 든든했던 '김대중 선생님'
‘애증’.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호남 정서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실망도 컸다. 특히 ‘호남을 위해서 해준 것이 없다’는 정서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서 호남에 특별대우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역차별’로 인식하고 있었다.
호남선 목포행 KTX 열차 안에서 만난 전남일(68)씨는 “이 쪽(전라도)에는 표시나게 집권 때 뭘 해준 건 없다. 푸대접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기대했었는데 좀 서운했다. 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가신 것도 아쉽다”라고 말했다. 섭섭한 것은 있었지만 그것이 분노나 증오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경기도 출신으로 해남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는 정명옥(56)씨는 “(전라도에) 살면서 괜찮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향소에 갈 예정이다. 처음 서거 소식 들었을 땐 뭣이 하나 무너지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호남선 종착역인 목포역, 역사 앞에 만들어진 분향소 옆에서 조시현(11) 주승주(11) 어린이가 전지에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귀를 적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졸업한 목포북교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둘은 “김대중 대선배님 편안하게 쉬세요. 사랑해요”라며 75년 선배인 김 전 대통령의 영면을 기원했다. 전남제일고(옛 목포상고) 도서관 3층에 마련된 분향소에서는 목포상고총동문회 회장이 상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충수업 쉬는 시간에 반 단위로 줄을 서서 분향했다.
“국민의 아버님 너무 죄송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잃은 것 같습니다” “민주화의 어버이 명복을 빕니다” “아버지, 편히 쉬세요”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할아버지 잘가세요. 하늘에서 아프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등 목포역 분향소 주변에 매달린 녹색리본에서는 김 전 대통령을 아버지라 칭한 문구가 눈에 많이 띄었다.
30년 넘게 목포 중앙시장에서 김치장사를 해오고 있는 최은숙(70) 할머니는 “김대중 대통령 있을 때는 든든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까 살기가 팍팍하네. 살아계신 것만 해도 목포서는 큰 힘이 되는 분이었는데... 목포 사람이 개인적으로 그 분한테 덕 본거는 없지만은 호남, 목포에서 그런 대통령이 나신 거에 자부심이 크지”라고 말했다.
옛 전남도청 앞 분향소에서 살풀이 추모공연을 하는 모습.
목포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으로 한 시간을 타고 들어가 하의도에서 만난 조카 김홍선(48)씨의 기억 속 김 전 대통령은 ‘어려운 작은 아버지’였다. 김씨는 “남들에게는 자상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엄한 작은 아버지셨다. 우리 생각으로는 국가와 국민에는 최선 다하셨지만 가족에겐 최선 다 못하신 것 같다. 서운한 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원래 큰나무 밑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빈소 앞에서 하의도 주민들은 안타까운 심정을 담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인자 기자들이 하의도 올 일은 완전 끝났부렀구만” “그란께 십 년만 더 사셨으문 좋았을 거인디” “그건 당신 개인 욕심이고” “그라제. 고통 받으신 거 생각하면 오래 사신 거이지” “그때(4월)도 겁나 힘들어 하시더만” “날이 추워서 발발 떠시더라고. 짠하더만”
인터뷰를 끝낸 심진용 인턴기자를 붙들고 점심을 대접한 웅곡마을 김용화(53)씨는 “뉴스를 보는데 우리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눈물이 나오데요. 밤에도 잠이 안 오고.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저승에서 노 대통령이 잡아 땡긴게 아닌가 하고.. 한꺼번에 이렇게 대통령 두 분이 돌아간께 진짜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더라고...”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옛 전남도청 앞에 차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 광주전남 시도민 합동분향소.
김 전 대통령이 1971년 자동차 사고를 당했던 목포 광주간 도로는 이제 자동차 전용도로로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광주에서 만난 택시기사 서영모씨는 광주전남 지역의 간선도로망이 좋아진 것이 김 전 대통령의 유일한 치적이라고 지적했다. 서씨는 “김대중 노무현 다 밀어줘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별 것 없었다. 이제 광주시민들은 정치 관심 없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은 전라남도 도민보다 광주광역시 시민들이 더했다. 5-18 기념공원에서 만난 이근군(61) 할아버지는 “광주 시민 희생으로 김대중 개인은 대통령 됐는데, 정작 광주시민이 얻은 게 뭐가 있나. 그 희생 치룬 광주 사람들은 아무 보답 받은 것도 없지 않나? 많이 서운하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노인은 “광주 사람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별로 감정 안 좋아요. 자기 아들 국회의원 시키려고 도청 무안으로 옮기고. 그렇게 한다고 찍어 주나...결국 떨어졌잖아"라고 더욱 박한 평가를 내렸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의 근저에는 전남도청 이전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현하 조계종 광주전남포교사는 “훌륭하신 분이었지만 무안으로 도청 이전한 문제는 옥에 흠이라는 게 광주시민들의 생각이다. 나주로 옮겼으면 했던 게 광주 시민들의 바람이었다. 광주 존폐의 문제였다. 이후 도시공동화가 진행됐다”라고 말했다.
5-18 관련 단체 관계자들도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이 많았다. 정수만 5-18유족회장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김 전 대통령 집권 후) 오히려 역차별 받았다. 김대중 정권 때 5.18 관련 사업을 많이 요구했지만, 마지막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노무현 때 해줬다. 보상금은 김영삼 때 받았다”라고 말했다.
5-18 관련 단체에 대한 지원은 박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배후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5-18 광주민중항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어떤 다른 지도자들보다 잘 알고 있었다.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는 그가 1983년 미국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희생자 3주년 추도식에서 “광주의거는 권력에 미친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한 주권자에 대한 반역행위다”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대선 후보시절 5-18 묘역을 찾았던 이명박 대통령은 5-18을 ‘광주사태’라고 칭했다가 사과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시장 전남도지사 광주전남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들이 합동 분향하고 있다.
김대중컨벤션센터에는 김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봉익 김대중컨벤션센터 기획관리팀장은 “김대중 대통령 함자를 쓰니 당연히 분향소를 차렸다. 광주시 산하기관 공무원들이 조를 편성해서 24시간 분향소를 지킨다”라고 말했다. 이 분향소에는 기아 타이거즈 시구를 위해 왔던 프로골퍼 신지애 선수가 시구를 취소하고 참배를 오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호남 역차별론’에 대해서 비호남인들은 다른 평가를 내렸다. 끝까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안으로 굽는 손을 펴고 호남을 차별하고 무시했던 타지역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전국 일주 도중 광주분향소를 찾은 대학생 김태언씨는 “택시 아저씨들이 ‘딱히 기여해준 건 없었다’라고 말하지만, 그 분은 호남의 큰 별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큰 별이고 큰 어른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광주전남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가짖고 있었지만 그것이 ‘증오’나 ‘분노’ 혹은 ‘무관심’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애증’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랬고 그만큼 큰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실망이 컸을 뿐이다.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분향소를 찾은 공무원 전아무개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나라를 넘어 전 세계적인 인물이다. 호남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민족적으로 해석해야 할 분이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자산을 계승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김 전 대통령을 옹호하는 축이었다. 옛 전남도청 앞 분향소를 찾은 정치인들은 김 전 대통령이 호남에 유형의 자산이 아니라 무형의 자산을 남겼다며 변호했다. 박준영 전남도지사는 “김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가야할 방향과 지켜야 할 가치를 제시하시고 호남인들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런 무형의 자신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국민의정부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했던 최인기 의원은 ‘호남역차별론’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호남을 위한 설계도를 그려주신 분이다. 여수엑스포 등 국민의정부 시절 기획된 것이 노무현정부로 이어져 성과를 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이를 계승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은 “좀 더 크게 볼 필요가 있다. 광주에 퍼주기를 안 한 대신에 광주를 전 세계에 알리고 민주주의의 성지로 만들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문제를 놓고 5-18관련 단체나 광주 시민사회단체가 양분되었다.
상대적으로 광주전남 지역의 젊은 세대는 ‘호남 역차별론’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전남대에서 만난 윤선후(26) 씨는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을 너무나 존경한다. MB정부 들어서 후퇴하고 있어서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전남대 졸업생인 김재충씨는 “민주화와 함께 통일에 앞장선 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진정한 우리시대의 ‘선생님’이었다”라고 말했다.
광주전남 주민들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옛 전남도청이다. 전남도청이 무안으로 옮겨진 뒤 별관 등 건물 일부를 허물고 아시아문화전당을 건축하려는 것을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시민군’처럼 점거하고 200일 넘게 막고 있었다. 원형보전이냐 철거냐를 놓고 광주의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지역 언론과 5-18 관련단체까지 분열되어 있었다.
개인 블로그를 통해서 옛 전남도청 철거과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전하고 있는 김향득(46)씨는 “옛 전남도청 별관은 시민군의 활동 본거지였다. 대책위가 회의한 장소 등 역사적 공간들이 많다. 연설문을 작성한 공간도 별관에 있다. 철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역사 유물 보전에 너무나 무심하다”라고 말했다.
전남도청 별관 철거 문제는 문화부와 이명박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는 있지만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아시아문화전당은 참여정부 시절 ‘문화중심도시’ 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되었고 별관 철거를 결정하는 과정에는 5-18 관련단체도 관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정부 시절 결정된 도청 이전 때문에 초래된 일이어서 지역 시민사회단체들 중에서도 이 문제와 거리를 두고 있는 단체들이 있었다.
박광태 광주시장(왼쪽)과 시민추모위원장인 지선스님(오른쪽)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분열된 시민사회를 화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찬반으로 나뉜 단체들이 함께 시민추모위원회를 구성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인 김재학 신부는 “지역 주민 여론도 원형보존 쪽으로 정리되었고, 시민추모위원회를 통해 화합하면 옛 전남도청 문제도 잘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추모위원회는 계속 비판하던 박광태 광주시장과도 의기투합했다.
분향소에서 박 시장의 손을 부여잡은 시민추모위원회 위원장 지선스님은 “그분을 잘못 모신 것을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그분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대통령님을 기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함께 하겠다. 대통령님 덕분에 화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화답했다.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을 통합해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일생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음뷰에서 '마이뷰(http://v.daum.net/my)' 서비스를 시작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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