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5일 진보진영의 유력 서울시장 후보로 꼽히는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행사에서 노 대표가 '조선일보를 위하여' 건배하는 모습이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한 트위터러(트위터 이용자)들의 생각을 물어보았습니다.
한글 트위터(twtkr.com)의 투표 기능을 활용해 물었는데, 12시간 만에 543명(3월8일 09시 현재)이나 참여했습니다. 주말 저녁에 이뤄진 것을 감안했을 때 투표율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노 대표의 행보에 트위터러들의 관심이 많은 것이겠지요.
노 대표의 조선일보 창간 행사 참석에 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은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일보를 위하여' 건배하는 모습도 통상적인 행사 프로토콜을 따른 것으로 크게 어긋난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를 '진보활동가'로 본다면 문제삼을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는 정치인이며 비록 1석 뿐이지만 정당의 리더입니다. 정당의 리더로서 합당한 행위를 했다고 봅니다.
정치인의 행위는 '옳고 그름'과 함께 '잘했다 못했다'로도 평가 받습니다. 동기와 함께 결과 또한 평가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행위에 대한 의견을 트위터러들에게 물었습니다. 노회찬 대표는 트위터에 3만명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즉 트위터는 그에게 가장 우호적인 곳 중 한 곳입니다(트위터 이용자 중 한글트위터 계정이 있는 사람만 투표가 가능합니다).
이 조사는 보통의 정치여론조사가 갖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조사입니다. 즉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가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참고 조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결과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낳습니다. 저는 이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1) 일단 부정적인 의견은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한 것은 잘못이다(41%)'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한 것은 괜찮지만 조선일보를 위해서 건배한 것은 잘못이다(11%)'로 52%입니다.
2) 다음 긍정적인 의견은 '행사 참석이나 건배하는 것 외에도 필요하다면 조선일보를 이용할 수 있다(25%)'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하거나 조선일보를 위해서 건배한 것 모두 잘못 아니다(15%)'로 40%입니다.
3) 이렇게 본다면 부정적인 의견이 더 많다고도 볼 수 있지만,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한 것은 괜찮지만 조선일보를 위해서 건배한 것은 잘못이다'는 유보적인 의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를 긍정의견에 포함시키면 51% vs 41%가 됩니다. 즉 '행사 자체에는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 노회찬 대표가 행사에 참석해서 소극적으로 참여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4) 강한 부정인 41%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문제가 남습니다. 노회찬 대표에게 우호적인 공간에서 강한 부정이 이만큼 나온다는 것은 이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렇지만 이 행위를 하면서 노회찬 대표가 각오했던 반향과 비교하면 어떨까요?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정당의 대표가 공격적 보도를 일삼는 조선일보 창간 기념식에 참석한다는 것은 사실 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고도 한 행위로서 보자면 나쁜 수치는 아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으로 첨언을 하겠습니다. 양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역할이 다르다고 봅니다. 종가인 민주노동당은 '집토끼'를 잘 지켜야 할 것이고 분가한 진보신당은 '산토끼'를 잡아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노회찬 대표의 이번 행위는 후자를 잘 수행한 일이라고 봅니다(민주노동당이 조선일보 창간행사에 가지 않은 것은 전자를 잘 수행하는 일이겠지요).
진보의 '산토끼'는 '취향좌파' 내지는 '생활진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 원리주의에 빠지지 않는 유연한 진보를 원하는 층과 노동자 농민을 위한 진보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가치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성향의 유권자와 만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진보신당의 자애로운 아버지 노회찬과 엄한 어머니 심상정, 그리고 깐깐한 외삼촌 정태인과 자유로운 삼촌 진중권이 이를 잘 구축하고 있다고 봅니다(민주노동당 역시 종가집 종손 강기갑 대표와 소녀가장 이정희 의원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진보의 색깔도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진보가 성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자유로운 것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이 신나는 것이 될 때 진보의 파이도 늘어날 것입니다. 왜 진보주의자는 자신의 행위 하나하나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나요? 상식에 기반하는 한 자유로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와 함께 사과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위로하고 격려해준 덕분에 아버님 장례를 무사히 치뤘습니다. 유족을 대표해서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특히 진보신당 당원들, 정몽준, 정세균, 이회창, 강기갑, 송영오, 이재정대표 등 여야 정당 대표들과 국회의장, 국무총리, 대통령실장께서 직접 빈소를 찾아주신데 대해서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평소 저와 가까운 분들 외에도 장례를 치르는 동안 많은 분들이 직접 빈소를 찾아와 조문을 해주셨습니다. 최근 판결내용으로 검찰과 공방이 뜨겁게 오갔던 판사들도 찾아왔고 X파일사건 당시 저를 유죄로 판단한 검찰고위간부도 왔습니다. 삼성을 고발한 변호사도 왔고 삼성고위임원도 왔습니다. 촛불단체 대표자들도 왔고 촛불 당시 진보신당 당사를 난입했던 극우단체 대표자도 왔습니다. 죄없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며칠 전 풀려난 분도 오셨고 경찰청 서울 책임자도 왔습니다. 정치노선과 입장을 넘어서서 찾아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버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조선일보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창간 90돌 기념식에 참석해주십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 장례를 치른 직후라서 바깥행사 나들이를 자제하고 있다고 정중히 사양했습니다만 다른 간부들이 몇차례 더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행사만큼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분들도 가급적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마은혁판사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마은혁판사는 20년전 저와 함께 활동했던 사이였습니다. 그후 법관의 길을 걸었고 자연스레 왕래가 뜸했습니다. 작년 가을 마판사는 열흘 간격으로 부친과 부인을 잃었고 소식을 들은 저는 두차례 조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달쯤 후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연구소의 출판기념회가 후원의 밤을 겸해 열렸습니다. 평소 저의 정치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마판사가 그날 참석해서 조문에 대한 답례인사를 하고 약간의 후원금도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노동당 보좌관들의 국회농성 기소사건과 관련하여 마은혁판사의 공소기각 판결이 있었습니다.
판결에 불만을 품은 조선일보등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마판사의 판결을 비난하였습니다. 나아가 마판사가 제 연구소 후원행사에 참석한 사실을 알아내고 연일 공격을 했습니다. 판결내용에 다른 견해를 갖는 입장에서의 논리적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민주노동당 출신 정치인 행사에 간 것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는 뜻이고 그런 개인적 정치성향이 민주노동당 관련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논리였습니다. 문상답례 차원의 의례적인 참석일 뿐 정치적 지지여부와 무관하다고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한발 물러선 언론조차 여하튼 현직 판사가 정치인 행사에 간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며칠 간격으로 두 차례씩 사설을 쓰며 공격했습니다. 결국 보수언론들의 여론몰이에 법원도 손을 들었습니다. 법원장은 마판사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행동을 하였다며 경고처분했고 정기 법관인사에서 시국사건을 맡지 않는 가정법원으로 전보발령조치 하였습니다.
저의 비서실장이 오해의 소지가 있고 특히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조선일보 창간기념식 행사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저는 마은혁판사 사건을 거론하며 그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행사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조선일보의 논조가 옳은 것이냐며 되물었습니다. 생각이 달라도 의례적 차원에서 참석해달라는 조선일보의 초청취지와 마은혁판사 사건 보도태도와의 모순도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마판사사건의 보도태도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라도 참석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정당과 언론의 관계는 특수한 측면이 있는지라 서로 싸우고, 규탄하고, 비판하면서도 끊임없이 만나서 설득하고 토론하고 항의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특정계기가 되면 언론사를 순회방문하고 기자들과도 끊임없이 간담회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당의 대표나 역대 정권에서처럼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이 언론사의 창간기념일에 참석하는 것은 언론의 논조나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서 이뤄지는 의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사의 창간기념식에는 다양한 분들이 많이 참석하였습니다. 조선일보와 생각이 다른 분들도 참석했고 조선일보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고 김대중대통령 영부인께서도 축하전보를 보냈고 용산사건 때 조선일보와 정반대 입장에서 유가족들을 지원한 봉은사 주지 명진스님도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오직 저 한사람입니다. 그만큼 제가 서있는 위치의 민감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중요한 시국에 불필요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진보신당 당원들과 저를 아끼는 트위터친구들께 당혹감을 안겨드린데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저의 취지가 정당했다 하더라도 저의 처신이 적절했는가의 문제에 대해선 앞으로도 많은 지적과 조언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동시에 저는 조선일보등 생각이 다른 언론들과 격의 없는 토론의 시간도 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날 면식이 있는 조선일보의 대표적인 논객 한분은 저에게 소주 한잔 하자고 청했습니다. 만일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저는 세상을 바꾸려는 정당의 대표답게 조선일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가감없이 전하고 인식과 태도의 전환을 강력하게 촉구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당부드리고자 합니다. 6년전 저는 조선일보 노동조합의 초청으로 조선일보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주변의 우려도 있었지만 저는 조선일보 안에 들어가서 저의 생각을 전하겠다며 강연을 강행하였습니다. 제 강연의 주된 기조는 조선일보도 이제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말머리에 30년전 집에서 조선일보를 보게된 내력을 말하고 덕담도 한마디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덕담 중 본 뜻과 다르게 전달될 수 있는 부적절한 표현도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저의 지적에 공감하는 기자들과 뒤풀이를 가졌고 그 중 몇사람은 직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후보를 찍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일부에서 저의 그날 강연을 놓고 ‘조선일보의 30년 애독자로서 조선일보를 최고의 신문으로 고무찬양한 강연’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평양을 방문한 한 교수가 방명록에 덕담 한마디 쓴 것에 대해 북한을 고무찬양한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조선일보가 기사를 쓰기 전의 일입니다. 강연의 주요 내용은 온데 간데 없고 덕담 중 몇마디로 저의 철학과 소신과 강연내용을 왜곡한 것입니다. 사실과 다르다고 항의하니 ‘아니면 말고’라는 답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우리 안에도 ‘조선일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옛말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조선일보와 싸우면서, 싸우는 동기가 되었던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닮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것을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2010년 3월 7일 노회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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