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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닷컴 이슈 백서/사형제 존폐 논쟁

삶은 고통이요 추억은 슬픔이요 희망은 공포였다 (어느 사형수의 고백)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3. 19.

김길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사형제 집행이 화두네요. 
법무부가 사형집행 재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사형제 논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1년 전 시사IN 기고문을 한 편 소개합니다.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체포돼 
사형 판결을 받고 13년 2개월 동안 사형수로 살다가 
1998년 석방된 김성만씨의 글입니다. 

사형제 논쟁은 주기적으로 벌어집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나 <집행자> 등 사형수 관련 영화가 나오면 사형제 폐지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김길태 사건이나 유영철 사건 등 끔찍한 범죄와 관련되어 논의가 시작되면 사형 집행 재개가 화두가 됩니다.
사형수였던 이 분의 글이 사형제 논쟁에 관해 균형을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아 올려놓습니다.
(앞으로 관련 글을 모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삶은 고통이요 
추억은 슬픔이요 
희망은 공포였다


김성만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 사형수)

   
1997년 12월30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족. 이날 이후 한국에서 사형 집행은 없었다. 나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미국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다가 재미동포의 소개로 유럽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해 그들과 민족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토론을 한 것이 전두환 정권에 포착되어 간첩죄로 기소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무런 간첩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은 외국과 인권운동가 사이에서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국무성·국제사면위원회 등이 긴급히 사형 집행을 보류할 것과 사건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철옹성 같은 독재 정치를 펼치는 전두환 정권은 주권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만 여기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선고는 그저 한번 해보는 협박이 아니었다. 1986년 5월 서울구치소 강당에서 재소자와 함께 예배를 보면서 다른 정치범 사형수 사이에 앉게 되었다. 나이가 젊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그분들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예배를 보았는데 그로부터 사흘 후 사형집행이 있었고, 내 양옆의 사형수는 그날 이슬처럼 사라졌다. 내가 서울구치소에 입소하고 나서 1년 사이 사형 집행이 두 번 있었는데 정치범 7명을 포함해 20여 명이 사형집행을 당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순서로 보아 두세 번째 대기 순서로 사형 집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1987년 6월 민주화의 함성이 온 거리를 뒤덮으면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고,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사형수의 삶은 우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온갖 눈에 보이는 현상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다 슬픔을 자아낸다. 가족이 면회를 와서 우는 모습을 보는 일, 같은 죄수이지만 단기형을 받고 이감하면서 희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일, 감방 안에 갇혀 있다가 짧은 운동 시간에 푸르고 싱그러운 하늘을 보는 일, 이 모든 일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슬픔을 자아낸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추억의 사람, 추억의 장소가 생각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고, 그 장소로 달려가고 싶어 몸살이 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접고 그 감정을 누르면서 교수형을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에게는 머릿속의 추억이 모두 슬픔일 뿐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한 장면.



사형수는 회개하지 않는 악인인가

사형수의 삶의 또 하나 특징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오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세계, 그 미지의 세계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사형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사형수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무섭다. 마음을 놓고 있다가 돌연 ‘죽음의 순간이구나!’ 하고 느꼈을 때 귓전을 때리는 그 심장의 고동소리와 생각이 정지하는 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형수는 교수형 집행당할 때에만 죽는 것이 아니다. 집행 날짜는 예고가 없다. 아침에 운동 시간이 지났는데 소내에서 운동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든가, 이유 없이 각 사동의 소지(청소 출역수)들이 모두 호출되어 사라진다든가, 평소와 달리 소내가 너무도 조용해 정적이 감돈다든가 하면 오늘이 그날인가 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사형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죽는다’는 말이 교도소에서 회자된다. 


사형 집행일이 되어도 집행 대상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날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한데 한쪽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숨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크게 울리는 소리가 있다. 교도관이 사형수를 끌어내기 위해 몰려다니는 발자국 소리다. 그 발자국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다가 방 앞에서 멈추면 죽음이요, 지나쳐 가면 삶인데, 한번 지나간 발자국 소리는 20분쯤 후 다시 시작된다. 한번은 집행장으로 끌려가던 사형수가 교도관들에게 소원을 이야기하기를, 절친했던 동료 사형수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해 그 사형수를 잠시 끌어내었으니 그 동료 사형수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순간이었을까.

   
13년 2개월간 사형수로 살다 나온 김성만씨. 사형수의 고통은 정신적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24시간 수갑을 차야 한다. 낮에는 앉아 있으므로 수갑이 덜 고통스럽지만, 밤에 누워 있을 때에는 팔목과 어깨가 보통 아픈 것이 아니다. 반듯이 누우면 팔에 무게가 실리므로 저절로 팔이 내려가는데, 그러면 수갑의 날카로운 금속이 팔목을 파고든다. 팔목이 아파서 모로 누우면 누운 쪽 어깨가 잠시 후 저려오고 수갑에 매인 다른 쪽 팔도 아파온다. 결국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밤을 보내야 한다. 사형수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중에서는 가장 불쌍한 존재이고, 나보다 더 불쌍한 존재는 짐승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슬픔과 고통, 죽음의 공포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형수는 누구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왜 나는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일까?’ 정치범의 경우는 확신범으로서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 사형수는 교육 수준, 지능, 인성에 관계없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고, 자기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스스로 자신의 문답 속에서 절절히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과 회한은 교수형 집행의 순간까지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사형수는 특별한 존재일까? 일반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 정신적·병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형수 수십 명과 호형호제하며 지냈고 그들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내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는 사형선고 이전까지는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존재다. 그러다 사형선고를 받고 절절한 고통 속에 들어서고 나서야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법을 어기지 않음으로써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 생기지만 이미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교수형뿐이다. 그들이 집행장에서 남긴 절절한 유언은 이러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다. 


사회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반 사람은 어떠한 생각 속에서 법을 지킬까? 무엇보다도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수들이라고 유독 별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의 인생과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사형선고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철저한 반성이 불가능했을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완화된 고통 속에서 한동안 자신의 미련함을 많든 적든 고집스럽게 붙잡고서 떨쳐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사형선고가 아니더라도 반성의 깊이와 속도가 결국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는 없다. 현재 무기수가 사실상 15~20년 복역 후 석방되고 있으므로 사형 대신 종신형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20~30년의 복역 기간이 지나야 석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월의 무게라면 개심(改心)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주> 아래 기사는 제가 10년 전에 김성만씨와 그의 동료 양동화씨를 취재해 쓴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87년 5월18일, 사형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서대문 독립공원(옛 서울구치소) 사형장 주변에는 고양이가 많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도 나오는 고양이는 고대부터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인도하는 동물로 여겨졌다. 사형장이 사용되지 않은 지 10년도 더 지났지만 고양이들은 아직도 이곳에 남아서 망자의 한을 달래고 있었다. 무악대사가 ‘명당 중의 명당이나 3천 명의 과부·홀아비가 탄식할 곳’이라고 평했던 서대문 독립공원에는 지금도 혼자 사형장을 찾아와 회한에 젖는 사람이 종종 있다. 

가다밥(주먹밥)을 먹으면서 배고픔에 시달렸던 죄수들에게 보시하려는 듯 공원관리사무소 1층에는 노숙자를 위한 무료 급식소가 들어서 있다. ‘한국의 바스티유’라고 불리던 악명 높은 이곳에서 김성만씨와 양동화씨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주동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2년 남짓 복역했다. 지난 10월30일, 한풀이라도 하듯 이들은 푸짐한 저녁 식사를 먹으며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1985년 8월5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선고가 내려진 날부터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선고 바로 다음날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4·13 호헌선언으로 구치소 바깥이 한참 소란스러울 무렵인 1987년 5월18일, 그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 날 아침은 구치소가 조용했다(사형이 있는 날은 보통 구치소가 조용하다). 구치소 사동 안에 형 집행을 당할 사람이 2명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양동화씨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5월18일에 2명이라, 나와 김성만이가 당하겠구나. 전두환이가 마지막으로 우리를 죽이고 가려나 보구나. 그래 지옥에서 만나자.’ 비장한 심정으로 그는 교도관을 기다리며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다. 잠시 후 “할렐루야, 나 먼저 갑니다.” 호기롭게 외치는 소리가 사동 안에 울려 퍼졌다. 최양호씨였다. 양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 사형수가 건방지다며 자신에게 사벌을 가한 교도관에게 복수하려고 쇠창살을 품고 다니다 걸렸던 최씨가 끌려간 것이었다. 

비슷한 시각 옆 사동의 김성만씨 방에 교도관이 찾아왔다. 부모님이 면회 왔다는 것이었다. 방을 나서는 순간 김씨는 갑자기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구치소가 숨 소리 하나 나지 않고 조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도관에게 “오늘 무슨 일 있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면 몰라요?” 교도관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발이 하늘에 떠서 걷는 듯, 그는 머리 속으로 ‘설마, 설마, 설마’를 되뇌었다. 다행히 도착한 곳은 면회소였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6월항쟁이 일어났다. 곧 노태우 전 대통령이 6·29선언을 발표했고 민주화 열기 속에 서울구치소에 있던 사형수 30여명 중에서 5명이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 때 무기로 감형된 김성만씨와 양동화씨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가석방으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들처럼 사형수였다가 자유인이 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 중에는 김대중 대통령도 포함된다. 

대통령 자신이 사형수였기 때문인지 사형에 대한 현정부의 정책은 관대한 편이다. 현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로는 단 한 번의 사형 집행도 없었다. 사형 선고도 드문 편이며, 사형수 감형 조처도 여러 번(1998년 2명, 1999년 5명, 2000년 2명) 취했다. 선고는 내리되 집행은 하지 않는 것이 김대통령의 잠정적인 사형 정책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형 정책과 관련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통령과 비교되는 정책을 폈다. 그가 집권한 기간에 세 번에 걸쳐 총 57명(1994년 15명, 1995년 19명, 1997년 23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특히 1997년 12월30일에 있었던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와 종교계의 비난이 거셌다.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무능한 김영삼 정권이 국민을 경제난으로 내몬 데 이어 최소한의 인간적 온기마저 포기했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