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을 보니 '독설닷컴(고재열)과 허지웅 사이에 트위터 논쟁이 벌어졌다고 하네요. 근데 황당한 것은 주제가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수사.... 그게 논쟁할 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게 무슨 학문적 명제도 아니고
논쟁이 되려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로써 피차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논쟁의 기본이겠지요. 그게 확인이 안 되면 결국 각자 다른 얘기를 하게 되는 거죠.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책 제목으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그 기사에 따르면 논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말하자면 미디어에 대한 관점의 차이랄까?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허지웅은 트위터란 그저 전달수단에 불과하고,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기는 내용이라는 것이고...
고재열은 트위터라는 수단 자체가 이미 (뭔가를 전달하기 전에)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고... 한 마디로 고재열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언의 테제를 주장하고, 허지웅은 미디어에 대한 근대적 관념( '도구주의')을 견지하는 거죠....
즉 미디어에 대한 20세기적 관념과 19세기적 관념의 대립이랄까. 일단 이론적으로는 고재열이 유리합니다. 발터 베냐민은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through)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미디어 안(in)에서 구현되는 메시지라 했지요.
비슷한 시기에 하이데거는 기술(=미디어)을 그저 수단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관념을 '도구주의', 즉 존재망각 상태라 비판했고... 그 뒤를 이어 맥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라 주장했고, 아도르노는 예술에서 내용은 형식 안에(in) 침전된다거 했지요.
쉽게 말하면, 허지웅측은 내용은 그대로이고, 그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이 좀 바뀌는 것에 불과한데 뭐 이리 호들갑이냐, 이 얘기고... 고재열은 형식이 달라지면 당연히 거기에 흐르는 메시지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는 얘기죠. ,
사실 이건 이미 이론적으로는 정리가 다 끝난 얘기라... 마팍에 '지식인' 딱지 붙이고 하기에는 좀 남세스러운 뒷북 논쟁입니다.
겨우 겨우 찾아들어갔더니 논쟁이란 게... 막걸리가 웬 말이냐, 트윗으로 해명하라.... 1인시위로 끝나버렸군요. 거기에 이상한 사람까지 끼어들어 연대 성명을 발표하고... ㅜㅜ 무슨 부조리극 보는 거 같아요.
애초에 논점이랄 게 없었어요. 트위터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정재승 선생이 어제 보여준 것처럼 사람들의 재능을 모아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 기부하는 것부터 누구처럼 아예 사회주의 변혁을 하는 것까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오직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거창한 실천에만 한정해서 써야 한다고 우기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한 마디로 코미디...제 정신 갖고 할 소리는 아니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조그만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자유도 있고, 민중의 집단적인 변혁적 실천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자유도 있고... 자기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것 없이 각자 저 좋을 대로 세상을 바꾸면 그만입니다.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내용을 요구합니다. 가령 진중권이 졸지에 뜬 것은 활자문화에서 자란 먹물 중에서 인터넷 글쓰기에 대한 편견이 없었고, 나아가 인터넷의 언어(문법, 어휘)를 구사할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게시판과 사이트에 강합니다.
하지만 저는 트위터는 제게 잘 안 맞는다고 느낍니다. 트위터라는 미디어에 내재된 메시지를 읽는 능력은 떨어진단 얘기죠. 실제로 고재열 기자가 제게 트위터를 권한 게 이미 1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제가 거절을 했지요. 성향에 잘 안 맞는다는 이유로.
결국 출판사에서 만들어줘서 엉겹결에 하게 됐는데.... 사실 팔로워 수로 보면, 고재열님이 저보다 조금더 많은 정도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른바 '파워 트위터러'가 될 수 없지요.
그 이유는 고재열과 진중권이 팔로잉하는 수를 비교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수의 차이는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입니다. 즉 저와 그가 트위터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죠.
한 마디로 저는 트위터를 과거의 매체와 다르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저 실시간 답글에 신기해 할뿐이죠. (게다가 컴 환경!) 즉 저는 트위터를 통해(through) 메시지를 전달할 뿐, 그 안(in)에 구현된 메시지를 해독하고 생산하지는 못하는 셈이죠.
제가 아는 한 거기에 능숙한 분이 둘 있습니다. 외수형님과 독설닷컴이죠.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성향이 안 맞거든요. 얼굴 모르는 분들과 공적인 사안을 공유하는 것은 인터넷 시절부터 익숙하나, 사사로운 일까지 공유하는 것은 좀 힘들어하는 편이거든요.
가끔 '맞팔'을 강요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의 견해는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렸습니다. 팔로잉을 적게 하는 것은 트위터의 잠재력을 죽이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지요. 하지만 남이야 그 도구를 어떻게 쓰던 그건 강요할 게 못되죠.....
지능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회지능입니다. 즉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도 사사로운 일을 공유하는 것을 기뻐하는 재능입니다. 솔직히 전 고재열 기자 하는 거 보면, 기가 막히거든요, 전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오죽하면 그분 트윗이 하도 많이 날아와 타임라인에서 내 것이 묻혀버리는 것을 보다 못해 언팔을 해버리기도 했거든요. ㅜㅜ 즉 고정된 환경의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의 트위터는 각각 다른 언어능력(liguistic competence)을 요구합니다.
10여년 전에 문자문화 먹물들의 세계에서 나와 인터넷 게시판을 휘젓고 다니면서 마치 제 세상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재열 기자는 트위터를 만나 아마 제 세상 만난 느낌일 겁니다. 한 마디로 물 만난 고기죠.
이런 것이 바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말이 함축하는 겁니다. 사실 프라이버시가 강한 블로그가 등장하면서 인터넷 논객들의 시대는 끝났지요.공룡은 멸종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유형의 키보드 전사들, 쉽게 말하면 포유류 논객들이 등장한 거죠
어떤 사람이 뭔가를 잘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저렇게 못해"라고 말해야 할 순간에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아, 생각해 보니 사람만 그런 게 아니군요. 여우도 그렇다는 고대 생물학계의 보고가 .....
쓰고 나니 먹물의 자괴감이 느껴집니다. 먹물들은 쉬운 얘기도 이렇게 어렵게, 그것도 길게 해요. 보세요. 하이데거, 베냐민, 아도르노, 맥루언 난리가 났지요? 이 모든 얘기, 결국 고재열 기자에게 보내는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거든요. "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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