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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실험실

진중권, 트위터에 대해 말하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9. 6.

언론에 제가 트위터에 대해서 논쟁했다는 보도가 나왔더군요. 
그런데 저는 논쟁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몇몇 분들이 세상을 바꾸는 도구보다 세상을 바꾸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말레이시아가 한국보다 덥다'처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의지가 선행되지 않으면 도구가 있다 한들 무의미하죠. 

다만 저는 트위터라는 도구가 유의미하냐 무의미하냐에 대해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이 도구가 무의미하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저는 트위터는 세상을 바꾸는 유의미한 도구라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부분은 논점이라기 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인 것이죠. 

인터넷이 노무현을 당선시켜 준 것이 아니지만 
노무현의 의지와 노사모의 헌신이 인터넷을 통해 구현되었듯이 
트위터가 오바마를 당선시켜 준 것은 아니지만 
오바마와 오바마 지지자들을 결속시켜 계기를 마련해준 것처럼 
저는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 유의미한 도구임을 이미 증명했다고 봅니다. 

'이란 시위' 관련 사례...
'삼성을 생각한다'의 사례...
꼽을 수 없을 만큼 사례가 많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트위터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트위터를 단순히 자기독백적인 단문블로그로 사용하고 
트위터스피어에서 노는 물이 너무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래서 저는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고, 까는 소리 하지 마라'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설악산에 단풍 보러 올라 능선도 보고 계곡도 느끼고 운무도 감상하고 감동 이빠이 먹고 내려오는데, 
매표소 앞에서 알짱거리다 '설악산 별거 없네'라고 말하고 내려가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더불어 도구 보다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관점을 저는 엘리트주의적으로 해석합니다. 
트위터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입니다. 
엘리트의 의지가 일반인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수단이 아니라 
일반 의지가 다양하게 표출되고 그것을 엘리트가 수렴하는 형태입니다. 

촛불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촛불이 소수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나요? 
누가 깃발을 올리고 모두가 그를 따른 것이었나요?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진 촛불이 올라, 하나의 뜻을 세운 것 아니었나요? 

여하튼 이런 저의 생각에 대해 
진중권 교수님이 학자적 해석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어제 진 교수님이 트위터에 올리신 글을 갈무리해서 올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중간 중간 토를 달기는 했는데...
제 생각은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주> 아래글은 진중권 교수님 트위터( twitter.com/unheim )의 내용을 
제가 정리해서 갈무리한 것입니다.


한겨레신문을 보니 '독설닷컴(고재열)과 허지웅 사이에 트위터 논쟁이 벌어졌다고 하네요. 근데 황당한 것은 주제가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수사.... 그게 논쟁할 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게 무슨 학문적 명제도 아니고


논쟁이 되려면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로써 피차 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논쟁의 기본이겠지요. 그게 확인이 안 되면 결국 각자 다른 얘기를 하게 되는 거죠. '트위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책 제목으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그 기사에 따르면 논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말하자면 미디어에 대한 관점의 차이랄까?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허지웅은 트위터란 그저 전달수단에 불과하고, 더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기는 내용이라는 것이고...


고재열은 트위터라는 수단 자체가 이미 (뭔가를 전달하기 전에)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이고... 한 마디로 고재열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언의 테제를 주장하고, 허지웅은 미디어에 대한 근대적 관념( '도구주의')을 견지하는 거죠....


즉 미디어에 대한 20세기적 관념과 19세기적 관념의 대립이랄까. 일단 이론적으로는 고재열이 유리합니다. 발터 베냐민은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through)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미디어 안(in)에서 구현되는 메시지라 했지요.


비슷한 시기에 하이데거는 기술(=미디어)을 그저 수단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관념을 '도구주의', 즉 존재망각 상태라 비판했고... 그 뒤를 이어 맥루언은 "미디어는 메시지"라 주장했고, 아도르노는 예술에서 내용은 형식 안에(in) 침전된다거 했지요.


쉽게 말하면, 허지웅측은 내용은 그대로이고, 그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이 좀 바뀌는 것에 불과한데 뭐 이리 호들갑이냐, 이 얘기고... 고재열은 형식이 달라지면 당연히 거기에 흐르는 메시지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는 얘기죠. ,


사실 이건 이미 이론적으로는 정리가 다 끝난 얘기라... 마팍에 '지식인' 딱지 붙이고 하기에는 좀 남세스러운 뒷북 논쟁입니다.


겨우 겨우 찾아들어갔더니 논쟁이란 게... 막걸리가 웬 말이냐, 트윗으로 해명하라.... 1인시위로 끝나버렸군요. 거기에 이상한 사람까지 끼어들어 연대 성명을 발표하고... ㅜㅜ 무슨 부조리극 보는 거 같아요.


애초에 논점이랄 게 없었어요. 트위터로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정재승 선생이 어제 보여준 것처럼 사람들의 재능을 모아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 기부하는 것부터 누구처럼 아예 사회주의 변혁을 하는 것까지를 모두 의미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오직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거창한 실천에만 한정해서 써야 한다고 우기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건 한 마디로 코미디...제 정신 갖고 할 소리는 아니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조그만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자유도 있고, 민중의 집단적인 변혁적 실천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자유도 있고... 자기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것 없이 각자 저 좋을 대로 세상을 바꾸면 그만입니다.


새로운 미디어는 새로운 내용을 요구합니다. 가령 진중권이 졸지에 뜬 것은 활자문화에서 자란 먹물 중에서 인터넷 글쓰기에 대한 편견이 없었고, 나아가 인터넷의 언어(문법, 어휘)를 구사할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게시판과 사이트에 강합니다.


하지만 저는 트위터는 제게 잘 안 맞는다고 느낍니다. 트위터라는 미디어에 내재된 메시지를 읽는 능력은 떨어진단 얘기죠. 실제로 고재열 기자가 제게 트위터를 권한 게 이미 1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제가 거절을 했지요. 성향에 잘 안 맞는다는 이유로.


결국 출판사에서 만들어줘서 엉겹결에 하게 됐는데.... 사실 팔로워 수로 보면, 고재열님이 저보다 조금더 많은 정도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른바 '파워 트위터러'가 될 수 없지요.


그 이유는 고재열과 진중권이 팔로잉하는 수를 비교하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수의 차이는 양적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입니다. 즉 저와 그가 트위터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죠.


한 마디로 저는 트위터를 과거의 매체와 다르지 않게 사용합니다. 그저 실시간 답글에 신기해 할뿐이죠. (게다가 컴 환경!) 즉 저는 트위터를 통해(through) 메시지를 전달할 뿐, 그 안(in)에 구현된 메시지를 해독하고 생산하지는 못하는 셈이죠.


제가 아는 한 거기에 능숙한 분이 둘 있습니다. 외수형님과 독설닷컴이죠.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성향이 안 맞거든요. 얼굴 모르는 분들과 공적인 사안을 공유하는 것은 인터넷 시절부터 익숙하나, 사사로운 일까지 공유하는 것은 좀 힘들어하는 편이거든요.


가끔 '맞팔'을 강요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의 견해는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틀렸습니다. 팔로잉을 적게 하는 것은 트위터의 잠재력을 죽이는 것이라는 지적은 옳지요. 하지만 남이야 그 도구를 어떻게 쓰던 그건 강요할 게 못되죠.....


지능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트위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회지능입니다. 즉 얼굴 모르는 사람들과도 사사로운 일을 공유하는 것을 기뻐하는 재능입니다. 솔직히 전 고재열 기자 하는 거 보면, 기가 막히거든요, 전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오죽하면 그분 트윗이 하도 많이 날아와 타임라인에서 내 것이 묻혀버리는 것을 보다 못해 언팔을 해버리기도 했거든요. ㅜㅜ 즉 고정된 환경의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의 트위터는 각각 다른 언어능력(liguistic competence)을 요구합니다.


10여년 전에 문자문화 먹물들의 세계에서 나와 인터넷 게시판을 휘젓고 다니면서 마치 제 세상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재열 기자는 트위터를 만나 아마 제 세상 만난 느낌일 겁니다. 한 마디로 물 만난 고기죠.


이런 것이 바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말이 함축하는 겁니다. 사실 프라이버시가 강한 블로그가 등장하면서 인터넷 논객들의 시대는 끝났지요.공룡은 멸종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유형의 키보드 전사들, 쉽게 말하면 포유류 논객들이 등장한 거죠


어떤 사람이 뭔가를 잘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저렇게 못해"라고 말해야 할 순간에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아, 생각해 보니 사람만 그런 게 아니군요. 여우도 그렇다는 고대 생물학계의 보고가 .....


쓰고 나니 먹물의 자괴감이 느껴집니다. 먹물들은 쉬운 얘기도 이렇게 어렵게, 그것도 길게 해요. 보세요. 하이데거, 베냐민, 아도르노, 맥루언 난리가 났지요? 이 모든 얘기, 결국 고재열 기자에게 보내는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거든요. "술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