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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에 다녀왔습니다/'바보 노무현' 추모콘서트

1996년, 나는 노무현을 처음 만났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2. 5. 23.



얼마 전 일이다. 덕성여자대학교에 특강을 갔는데, 황송하게도 지은희 총장이 객석에 앉아서 내 강의를 학생들과 함께 들어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대기실에 지 총장이 찾아와서 인사를 건넸다. 수인사를 나누며 나 또한 지 총장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얘기했더니 무척 반가워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 되새겨 보았다. 지 총장의 강의를 들었던 것이 언제였지? 일단 여성학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강의였다는 기억이 났다. 여성학을 여성과 남성의 대결로 보지 않고 남성을 아우르는, 모성적 학문으로 소개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여성부장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보고 납득했고, 이후 여대 총장으로 초빙되는 것을 보고 수긍했었다. 그런 그녀가 내 강의의 청중으로 앉아있었다.


돌이켜보니 15년 전 일이었다. 내가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것이. 15년이 지났는데도 그날 그 강의의 기억이 또렷하다. 여성학을 전투적인 학문으로만 바라보다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는 학문이고 서로의 짐을 덜어주는 학문이다’라고 설명한 지 총장의 너무나 신선했기 때문이다.


지 총장의 강의를 들었던 것은 민주언론시민연합(당시 민주언론시민운동연합)이 주최하던 ‘언론학교’ 강좌였다. 군대 가기 전 휴학하고 좀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때 들었던 강좌였다. <월간 말>과 민언련이 연남동에 있었던 시절인데, 수강생들끼리 조를 짜서 강의 이후에도 강의 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곤 했었다.


지은희 총장보다 더 기억이 뚜렷한 강사가 있다. 바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다. 당시 그는 지역주의 청산을 내걸고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다가 패배한 후 ‘실패한 성공인’ 자격으로 강사로 섭외된 상황이었다. 그날 그는 양복이 아니라 지퍼가 달린 체크무늬 점퍼를 입고 왔는데, 좀 촌스러워보였다. 양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승자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낙선 정치인 노무현은 너무나 당당했다. 그는 지역주의와 싸우면서 자신이 왜 ‘낙선의 달인’이 되어야 했는지, 그 의미를 담담하게 전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아름다운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강연과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표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그에게서 때로 인생의 패배가 승리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배웠다.


기자로서 그가 현직일 때는 때론 모질게 때론 애정을 담아 줄기차게 비판하고 가끔은 조롱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그에 대한 원초적인 믿음은 있었다. 그는 염치를 알고 지킨 드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했던 판단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판단이 사심이나 당파적 이익, 혹은 아집이나 고집의 산물이 아닌 나름 일리가 있는 합리적 판단과 고뇌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믿는다.


보수는 그를 '무능한 좌파'라 비난하고 진보는 그를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얼치기 신자유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는 ‘무능한 좌파’였을까? 아니면 ‘얼치기 신자유주의자’였을까? 나는 그가 우리 시대 상식의 보루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상식이었고 그 상식이 깨질 때 그는 스스로 몸을 던졌다.


보수가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은 부끄러움을 알고 삼갈 줄 아는 염치고, 진보가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보수 이상의 원칙을 진보 이상의 도전정신으로 구현하려 했다. 1996년 민언련 언론학교에서 만났던 노무현과, 2002년 대선캠프에서 만난 노무현과, 2008년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만난 노무현은 한결같았다.


안타까운 것은, 시대는 노무현을 호출했지만 온전히 그를 담아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구현하려는 상식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측근들은 그것을 구현해줄 요령이 없었다. 그는 당선된 그 순간부터 쭈욱 부엉이바위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단점이 많은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단점을 사소하게 느끼게 만들만큼 매력적인 정치인이었다.


1996년 노무현을 만났을 때, 나는 감히 그를 내 인생의 멘토로 여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걸어갈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일 것 같아서였다.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은 따로 태어난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그 길을 가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그 길이 내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사람은 나와 DNA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일이 참 묘한 것이, 잘 나가던 세무 변호사 노무현이 1981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재야 운동가로 입문했듯, 나도 얼떨결에 파업 기자가 되어 있었다. 2006년 시사저널 근무 당시 ‘삼성기사 삭제 사건’에 항의해 6개월간 파업하고 나서 끝내 회사와 결별하고 선후배들과 함께 시사IN을 창간했었다. 노무현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의 ‘상식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버린 모양이다.


외부 강의를 할 때, 특히 대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1996년을 노무현을 떠올린다. 나도 노무현처럼 상식의 길을 계속 뚜벅뚜벅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면 내일 그들 역시 그 길을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지는 줄 알면서도, 질 것을 각오하면서도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가 그 길을 자신있게 걸을 수 있는 것은 그 길에 노무현의 발자국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