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원에 대한 생각 생각 생각~~~
백종원에 대해서 나올 얘기는 다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타임라인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온다. 덕분에 음식과 요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멀리는 일본 미식의 대부, 그릇을 '음식을 위한 기모노'라 했던 기타오지 로산진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을 깠던 것과 비슷한 맥락도 읽히고... 엘리트들이 더 대중주의적인 모습은 야나기 무네요시와 백종원이 닮은 것 같고... 그렇게 기댈 배경이 없는 사람이 화려함에 집착하는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가까이는 이상적인 요리사 상도 다시 그려보게 된다. 각자 서있는 자리에서 평가하겠지만... 내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요리사는 가장 하수다(황교익 선생의 말대로 적당히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는 쉽다). 나에게 맛있는 음식에 대한 지식을 주는 요리사는 그보다 고수다(음식을 더 풍부하게 느끼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최고수는 나를 요리사로 만들어주는 요리사다(내 삶이 진일보한다). 한 번 즐겁게 해주는 요리사, 여러 번 즐겁게 해주는 요리사, 그리고 영원히 즐겁게 해주는 요리사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백종원은 세 번 째다. 나 외에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그렇다. 그의 역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라면에 김치만 넣을 줄 알았던 사람에게 그 김치로 다른 것을 만들어보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 '동기부여'라는 측면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어때요? 참 쉽쥬?'는 바로 맛의 채찍질이다. 그의 대한 평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이 측면에서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 비유하자면 '등산을 왜 하나? 내려올 걸 왜 올라가나?'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단 동네 뒷산부터 오르게 해주는 사람이다.
만인을 위한 소박한 미감을 주장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처럼 백종원이 '먹을만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자고 주장할 때 사람들은 그를 화려한 기타오지 로산진과 같은 요리사와 비교하며 그의 요리는 별 거 없다고 탁박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전국민에게 등산 붐을 일으켜 등산 인구를 두 배로 늘린 사람한테 너는 엄홍길 박영석보다 떨어지는 등산인이다 라고 타박하는 일이다. 이런 비교는 그가 정상의 요리사를 자처했을 때 해주는 것이 맞다.
백종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은 그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정면으로 해야 할 것이다. '왜 음식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하라고 하느냐'에 대해서 비판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면 되는 일이다.
나는 백종원의 간단레시피로 직격탄을 맞은 곳은 요식업계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비법'이라며 신화화 되었던 것들이 간단한 '요령'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종원의 역할은 마치 마술사들의 트릭을 얘기해주는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사람은 더 철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해도 이보다 잘 하겠다' 싶은 허술한 음식점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자극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백종원은 요식업계 종사자로서 요식업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다. 몇몇 음식들은 만들고 난 뒤에... '이렇게 해서 만들 수는 있지만 이런 건 그냥 사드세요~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음식을 만들어 보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하나는 내가 해도 이만큼 맛이 나오는구나. 이런 걸 돈 주고 사먹기 아깝네, 하는 것과 야 이런 건 그냥 사먹어야겠다, 하는 결론이다.)
자 이제 그의 역할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자. 축구를 보는 사람이 많은 나라와 축구를 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가 더 축구실력이 좋아질까? 모두가 후라이팬과 냄비를 드는 나라와 모두가 음식구라만 까는 나라 중에서 어디가 더 음식문화가 발달할까? 결과는 자명하다. 현대사회 미식의 아이러니는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음식 이야기를 하는데 쓰지만 정작 그 음식을 만드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백종원의 방식은 요식업계의 요령을 집밥으로 이식시켜 준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집밥이 아니라 집밖에서 밥을 먹는다. 어쩌면 이 밥이 표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집밖의 밥에 비해 집밥은 초라하다. 뭐랄까? 그냥 끼니를 떼우는 정도의 느낌? 그래서 집밖의 밥과 경쟁해야 하는 주부들도 백종원의 레시피를 많이 받아적는다. 아마 백종원의 영향력이 가장 큰 층을 조사해 보면 주부들일 것이다.
또 하나 살펴볼 맥락은 '엄마손맛'이라는 신화가 해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백종원과 차승원을 통해 '엄마손맛'이 해체되고 '아빠손맛'이 대체되는 지점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남자 요리사 '숙수'의 전통이 있는 나라다. 요리가 남자에게 잘 맞는다는 것을 일치감치 터득했고, 의례 음식을 남자들이 만들게 함으로써 이를 유교적 질서의 한 축으로 삼았다. 원시시대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불의 지배/음식 분배를 주관하는 가부장이 요리(구이)의 주관자였을 것이다.
나는 결혼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보통 남자에게 설거지나 청소 빨래 등을 시키고 요리는 여자가 하는데 남자에게 요리를 시켜보라고. 그럼 상당히 '가사노동 친화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라고. 현상유지 작업이 아닌 가장 창조적인 가사노동인 요리를 남자에게 맡겨보라고. 그러면 다른 가사노동은 저절로 알아서 하게 될 것이라고.
'엄마손맛'은 사실 신화다. 요리라는 것도 집중하고 투자해야 개발된다. 지금도 맞벌이 부부가 많지만 농경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일하고 더 하는 일이 요리였다. 그런 상황에서 신화를 간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복받은 사람이다. '엄마손맛이라는 말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이것은 기능적이라기보다 정한적 표현이다.
현대사회에서 '엄마손맛'은 한번 해체될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음식의 철학'까지 연결되어 해볼만한 이야기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음식대국 프랑스와 겨룬다면 이런 음식에 대한 철학 부분이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프랑스에서 미식이 자리 잡힌 것은 길게 잡아봐야 300~400년 정도다. 우리는 이보다 더 긴 미식의 역사가 있고 자리 잡힌 철학이 있다.
프랑스음식과 한국음식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음식을 누구의 것이냐고 규정하느냐의 문제다. 프랑스는 음식은 요리사의 것이다. 요리사의 권위가 절대적이다. 요리사가 자신의 음식을 가장 자랑하기 좋은 방식으로 요리가 서빙된다. 한국음식은 다르다. 왕의 수라를 보라. 어떤지. 소박하고 기능적이다. 왕이 먹기 좋고 맛 좋고 영양가 좋은 것들이 고루 놓인다. 한국음식은 먹는 사람에게 바치는 음식이다. 음식의 권위를 먹는 사람에게 준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자. 나를 위한 최고의 요리사는 누구일까? 대부분 이 경우에 엄마를 꼽는다. '엄마 손맛'이 절대진리라는 것이다.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엄마는 최초의 전속 요리사이긴 하지만 결국 내 입맛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음식을 해보는 것이 조리 과정의 정밀성, 조리 방식의 적합성, 소스의 기능성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이런 과정도 거치지 않은 미식은 단순한 귀동냥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요리는 '나 자신을 위한 최고의 요리사는 나 자신'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발달된 요리이고 그래서 세계 어느나라보다 '반조리'가 많다. 요리사와 먹는 사람이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다. 자신이 요리사가 되어 요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울 때도 그렇고, 구운 고기로 쌈을 쌀 때도 그렇고, 비빔밥을 만들 때도 그렇고, 비빔면을 만들 때도 그렇다. 우리는 먹는 사람이 요리를 완성해서 먹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이런 방식이 일반화 된 또 하나의 음식이 바로 베트남요리다. 그래서 나는 베트남요리를 좋아한다).
드라마 <대장금>에 보면 한상궁이 어린 장금이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장금이가 새벽 정한수부터 약숫물에 온갖 물을 떠와도 한상궁은 다시 떠오라고 한다. 어느날 장금이가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라고 묻자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한다. 그러자 장금이가 그 몸 상태에 적합한 물을 떠오고 한상궁은 받아 마신다. 한국음식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먹는 사람이 요리의 완성자'라는 한국음식의 철학은 '음식 한류'의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떡볶이를 음식한류의 대표주자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철학의 적립부터 먼저 해야지 앞서 있는 외국의 음식문화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먹는 사람을 위한 맞춤형 요리'에서 우리는 사상의학을 결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음양오행의 철학까지 결합할 수 있다.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선조둘을 해두었다. 우리는 이를 되살리기만 하면 된다.
백종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음식한류까지 이야기가 너무 멀리 온 것도 같지만... 백종원논쟁을 통해서 음식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에서 써 보았다.
주) 아래는 백종원에 대한 첫 번째 변명
'달콤 살벌한 독설 > 독설닷컴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재인을 까기 위해 노무현을 띄운다? (0) | 2017.07.13 |
---|---|
‘정의 실종’ 사회의 ‘정의 과잉’ 국민 (0) | 2015.01.22 |
'일베적 인식체계'에 대한 고찰 (2) | 2014.09.24 |
'일베적 인식체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0) | 2014.05.13 |
박근혜정부의 노림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1) | 2013.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