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엔 공짜도 없지만, 또 헛수고도 없다는 걸 느꼈다.
8년 전에 트위터를 통해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트위터로 헌 책을 모아 책이 필요한 곳에 작은 ‘도서방’을 만들어 주자는 프로젝트였는데, 공간 기부, 배송 비용, 인력 모두 트위터로 모았다. 그렇게 11만권을 전달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맞벌이라 주중에 처가에 맡겨 놓고 주말에만 함께 했는데 맨날 여기 나가서 책 정리 하느라 애랑 놀아줄 겨를이 없었다. 아이와 가까워질 겨를이 없었고 아이는 아빠를 슬슬 피했다. 그때 내 논리는 이 운동은 아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눈 책을 읽은 아이들과 우리 아이가 같이 살게 되지 않겠느냐는... 박원순 서울시장과 마찬가지로 ‘소셜 코디네이터’라고 자임하던 때였다.
‘기적의 책꽂이’를 마치고 몇 년 뒤 집 근처에서 암웨이 물류창고(매장 겸)로 쓰던 건물이 빈 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의 시설이었다. 마침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이 아는 분이어서 문의를 했다.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했다. 그때 서울도서관 가버넌스 위원회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이 곳에 ‘헌책 정거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때 내 구상은 이곳이 ‘헌책 정거장’을 만들면 그 책으로 조그만 도서관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을 낳는 도서관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장서가 많은 도서관이 800만권 정도인데 이곳을 거쳐 간 책을 1000만권 이상 만들어 버추얼 도서관으로 세계 최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처음 제안한 것과는 달리 ‘헌책방 연합 헌책방’이 되어서 조금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집 근처에 이런 멋진 시설이 들어서서 기쁘다. 그때 모은 책이 십만권 남짓이었는데 여기 있는 책이 딱 그만큼인 것 같다. 참 멋지게 되돌려 받았다.
아래는 5년 전 제가 '책 정거장'을 제안하며 이 블로그에 올렸던 내용입니다.
1) 공공도서관에서 매년 처분하는 수십만 권의 책을 효율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구청 소속의 도서관에서 한 해 처분되는 책이 수십만 권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책을 여기에 모아두고 작은도서관/마을도서관/공공 북카페에서 1000~2000권씩 골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새 책에 밀려 버림받는 책이지만10만권 이상이 모인 곳에서 1000~2000권 골라간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을 골라갈 수 있습니다. 공공도서관에서 폐기처분하는 책이 이런 대형 책정거장을 만드는데 '마중물' 역할을 할 것입니다.
2) 일반인들의 도서 기증을 활성화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적의 책꽂이'를 하면서 착불택배로 책을 모아보니 1인당 평균 50권~100권의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집 책장에 잉여의 책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책을 한 곳에 모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책장 다이어트도 할 겸 '책헌혈'에 동참해 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착불택배' 시스템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산과 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런 시스템만 구축하면 모을 수 있는 책이 비약적으로 늘어납니다. '기적의 책꽂이' 때 1년 동안 11만 권의 책을 모았고, '강정평화책마을'을 위해 '십만대권 프로젝트'를 할 때는 4개월여 동안 4만 권의 책을 모았습니다.
3) '책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합니다.
책의 패자부활전이란 이런 것입니다. 보통 도서관에 기증되는 책 중에서 교재는 외면 받습니다. 공부하느라 낙서도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도 환영받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병영도서관입니다. 군대에서 무엇이라도 배워가려는 사병들이 교재를 선호합니다. 이런 '책의 패자부활전'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기적의 책꽂이' 할 때 도서대여점을 그만두시면서 1만 권 이상의 만화책과 무협지를 기증해 주신 분이 계신데... 이 책을 골라가는 곳이 거의 없어 처분에 애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지방 정신요양원 원장님이 연락을 주시더군요. 요양 환자들을 위해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고요. 그래서 그곳에도 보내드리고 전국의 정신요양원에 두루 보내드렸습니다.
4) '책의 재분배'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도서관에서도 나타납니다. 도시는 공립도서관 외에 작은도서관도 많고 큰 서점도 있습니다. 책을 읽고자 하면 읽을 수 있는 방법이 많습니다. 하지만 지역은 다릅니다. 책을 보려면 10km 이상 나가야 하는 곳이 많습니다. 이런 곳에 두루 책을 갖춘 지역아동센터 등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책을 읽으려는 수요에 비해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은 많습니다. 구치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곳이 신청해서 책을 기증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환영받을 것입니다.
5) 책이 보관되는 동안에는 '또 하나의 도서관'입니다.
책이 책정거장에서 보관되는 동안에는 도서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방문자를 위해 방문 기증 시스템도 만들어 둘 수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세 권 기증하고 한 권 기증받는 모형으로 만든다면... 많이들 이용할 것 같고요. 책을 창고처럼 보관하지 않고 교환형-도서관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죠(상업적인 이용을 막기 위해 1인 1일 3권 정도로 제한하고...).
6) 책을 통한 다양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다문화도서관으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비율을 바꿔서 한국에 온 외국인이 1권을 기증하면 세 권을 골라가게 하면... 서울의 관광명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책을 모아보면 잡지는 보통 무용지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잡지도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한테는 좋은 기념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받은 책으로 다문화가정에서 볼 수 있도록 다문화도서관을 만든다면 좋은 소통 모형이 될 것입니다.
7) 사이버 도서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책정거장에서 유통되는 헌책을 데이터화 하면 오프라인으로는 10만권 정도 저장되지만 이 책정거장을 거친 수십 혹은 수백만 권의 책으로 구성된 사이버 도서관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프라인으로는 책이 흩어져있지만 온라인으로는 기증된 책 만큼의 사이버 가상도서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건 IT 기업이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기증한 책이 어디에 기증되어 있는지도 파악될 것입니다.
5년 전 암웨이 물류창고로 이용되다 방치된 모습(위)
서울책보고로 새롭게 변신한 모습(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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