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를 파괴하라
자연 앞에서 인간은 고민한다. 보존이냐 향유냐. 그 둘의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파괴자들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파괴자로부터 자연을 지켜야 하는 사람, 지키려는 제도가 오히려 파괴를 부추기는 역설이 존재한다.
# 산림 훼손청
산림청 산하 국립자연휴양림사무소에서 관리하는 휴양림 시설에서 하는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과잉시설’의 극치였다는 것은 ‘자동문’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실을 일본의 산림 활동가에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잘 보존해야 할 산에 만든 시설에서 전기와 따뜻한 물 심지어 세제와 목욕 용품의 사용도 제한하는 것이 없다.
그 과잉시설을 보고든 것은 ‘산림청장은 공무원계의 별장지기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분들이 이용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시설이 튜닝되어 있었다. 휴양림이 들어서면 아랫마을에서 계곡 오염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기도 한다는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국가가 독점 리조트 사업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립공원관리공단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캠핑장 등급 규정으로도 알 수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만들고 관리하는 캠핑장은 전기와 와이파이 등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 더 좋은 등급을 받는다. 그런 캠핑장이 있는 곳이 국립공원 내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기준인지 알 수 있다.
# 산에도 유행이 있다
묻고 싶다. 콘크리트는 자연 훼손이고 나무 데크는 자연 보전일까? 등산로가 정비된 곳을 가보면 콘크리트가 하던 일을 단지 나무 데크가 하고 있을 뿐이다. 나무 데크의 계승자는 누구일까? 관리가 안 되어 흉물이 된 나무데크는 자연의 일부일까. 산에도 유행이 있다. ‘시간의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방식만 바뀔 뿐이다.
요즘은 안내판이 없어서 문제인 산은 별로 없다. 그런데 있어도 문제다. 안내판에 일관된 기준이 없어서 보아도 헷갈린다. 이런 안내판에 대한 표준을 만들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가장 표준화가 잘 되어 있다는 스위스 트레일 표지판 체계와 비교해서 우리의 체계는 무엇이 부족한지 고민해 보았을까.
리본을 든 숲의 파괴자들은 또 어떤가. 자연보호를 외치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연 깊숙이 들어가서 자연을 파괴할 수 있을까. 리본을 든 숲의 파괴자를 믿지 않는 정부는 취사와 야영을 금지한다. 그런데 취사와 야영을 금지하는 등산로의 거의 정상 부근에 산장이 있고 거기서는 취사와 숙박이 가능하다. 그 산장을 이용하는 산악인들이 케이블카에는 반대한다. 논리의 일관성은 어디에 있을까.
케이블카 반대의 연장선상에서 산장을 없애고 당일 종주가 가능한 사람만 정상에 오르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중청산장 등 정상 부근에 산장을 만든 것은 일출 산행에 유리하게 하기 위한 것 아닌가? 그것은 사치가 아닌가?
이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는 뭔가 낯부끄럽다. 설거지가 되어 있지 않은 부엌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방책의 유효기간을 살피라
이런 얽히고설킨 문제에 누가 답을 찾게 할 것인가.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산악인들에게 케이블카를 놓아도 될 곳을 찾게 한다면 어떨까. 유아를 동반한 가족, 노약자, 그리고 장애인을 위해 그들이 산을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케이블카를 놓는데 적합한 위치를 찾게 해주면 어떨까.
산의 주인은 누구일까? 산에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농촌과 어촌보다 파괴된 곳이 산촌이다. 단언하건데, 산촌은 없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가장 살기 어려운 곳부터 고향을 등졌는데 산촌이 가장 먼저였다. 21세기형 산촌은 어떤 모형일까. 가든과 모텔을 넘어서는 산촌은 어떤 곳일까, 고민이 필요하다.
산촌에 드라마세트장이 들어서곤 한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유효기간’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관광 자원화 하려는 욕심이 앞섰다. 그 드라마가 흥행이 안 되는 경우도 문제지만 흥행이 되어도 드라마의 유효기간은 매우 짧다. 불과 몇 년 만 지나도 ‘그런 드라마가 있었지’ 하는 정도로 대중에게서 잊혀진다. 그때 쯤 되면 드라마세트장이 알아서 녹아내리는 것도 아닌데 그런 시설을 만들어도 될까? 모티브가 문학이나 설화였다면 유효기간이 어떻게 차이가 날까.
# 파괴자를 파괴하자
영광 불갑사는 원자력발전소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곳이다. 그 이유는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이후 예산 지원을 많이 받아서다. 일주문 전후로 온갖 시설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시설과잉의 끝판왕이다. 외국 종교 유적 시설의 미니어처까지 있다. 돈만 없었다면 불갑사는 그런 참화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곳곳이 마찬가지다. 문경새재 길을 걸어보았는가, 다시 왜적의 침입이라도 막으려는 것인지 많은 시설물들을 만들고 있다. 불갑사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돈을 잘못 썼는지 사람들이 잘 알아차릴 수 있을까’ 하는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언제 한 번 청년을 대상으로 이런 곳에서 공모사업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1등부터 10등까지 없어졌으면 좋겠다 싶은 곳을 꼽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모에서 1등을 한 시설은 제발 없앴으면 좋겠다. 모두가 미래 세대의 적이다.
# 진흥 사업 금지법을 만들자
활성화, 이것은 ‘가능한, 불가능한 일’이다. 국회의원과 술자리를 한다면 알코올의 기운일 빌려 설득해 보고 싶은 법이 있다. 바로 ‘활성화 금지법’이다. 말 그대로 정부가 어떤 활성화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정부는 어떤 활성화 정책도 수립할 수 없고 활성화 사업에 예산을 쓰면 안 된다는 법이다.
정부가 활성화를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아마 아무것도 안 활성화 되지 않을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정부의 활성화 정책 따위가 없어도 아무런 지장도 없고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정부 관계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활성화를 둘러싼 오래된 진실이다.
세상에서 ‘활성화’를 가장 못할 집단을 꼽아보자. 누구일까. 공무원이다. 생각해보라. 다른 집단과 달리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하는 집단이다. 성과를 내는 것보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집단이다. 그런데 가장 창의적이지 못한 집단이 가장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을 주도하고 있다. 가장 부가가치와 거리가 먼 집단이 부가가치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공무원이 주동하는 ‘가능한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활성화 사업을 없애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수 조원 혹은 수십 조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부작용 없이 예산을 줄여서 다른 긴요한 곳에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정부의 활성화 사업을 없애는 것이다. ‘진흥’이라는 이름이 붙는 재단과 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진흥할 수 있도록 각장 재단과 위원회를 진흥시킬 재단이나 위원회가 필요한 지경이다.
그런데 활성화가 필요한 일도 있을텐데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하다. 실제 활성화 성과를 낸 곳이 그 성과급을 받아가게 하면 된다. 그럼 1/10의 예산으로도 10배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불교 시민단체 블로그를 운영하다 홀연히 군대로 떠난 그 대학생처럼 진짜 활성화 할 수 있는 사람이 실력을 발휘하고 성과만큼 보상을 챙기는 것이다. 요즘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중간지원기관을 많이 두는데, 이런 기관을 활성화 심사기관으로 바꾸면 된다. 플랫폼을 만드는 사람이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프레임이다. 프레임을 진화 시켜야 한다.
# 시간의 놀이를 즐기자
자연을 대상으로 한 축제는 ‘시간의 놀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축제는 대부분 ‘시간과의 싸움’을 통해 실현된다.
한일 관계가 경색되지 않았다면 올 가을에 일본 홋카이도의 조그마한 산촌마을에서 열리는 토비우아트페스티벌네 가려고 했다. 꼭 가려고 했던 이유는 이곳이 ‘시간의 놀이’를 즐기는 축제였기 때문이다. 작가들도 최소 10년을 보고 이 예술축제에 결합하고 작업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될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을 오가며 숲과 나무에 관한 축제와 놀이를 기획하시는 안애경 쌤을 만나서 주로 얘기했던 것도 바로 이 ‘시간의 놀이’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의 축제가 축제답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시간의 놀이’를 할 줄 몰라서라고. 축제를 앞두고 다급하게 ‘시간과의 싸움’을 통해 구현된 축제가 여유를 줄 수는 없다고.
또 다른 이야기 주제는 ‘도시 빼기 게임’에 관한 것이었다. 현대인은 자연에 가도 옮길 수 있는 최대한의 도시를 옮기려고 한다. 그들에게 도시는 이미 DNA와 같은 것이다. 자연에 들어가면서도 자연을 막는 장비를 고민한다. 자연으로 들어가서도 도시만큼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도시만큼 풍족한 먹거리를 도모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때론 드립커피가 포기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도시’일 때도 있다. 그렇게 도시는 이미 우리에게 전제 조건이 되어 있다. 이걸 극복하는 ‘도시 빼기 게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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