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노조, 창립 선언문을 다시 보니...
어용노조 시비를 벗어날 수 있는 답이 보였다.
KBS 노조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 목소리가 높다. 본관 앞에는 “어용노조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노조 홈페이지에는 노조에 대한 비난글이 쇄도하고 있다.
밖에서는 수천여명의 국민들이 ‘KBS를 지켜주겠다’며 촛불을 키는데 안에서는 ‘정연주를 퇴진시켜야 한다’며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KBS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촛불을 맞은 것은 환영 현수막이 아니라 ‘정연주 퇴진’을 주장하는 검은 만장이었다.
국민들은 KBS 독립을 위해서는 정연주 사장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노조는 오히려 퇴진시켜야 한다고 한다. 노조도 노조 나름의 명분이 있겠지만, 광화문에서부터 한 시간 넘게 달려온 국민들은 노조의 주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연주 사장을 퇴진시키면 친정부적인 인물이 KBS 사장으로 임명될 것이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궁금하다. 노조는 왜 다수의 국민들과 다른 이야기를, 다른 주장을, 다른 해석을, 다른 결론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하다.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KBS 노조와 노조를 둘러싼 KBS 내부의 역학구조를 살펴보기로 했다(<시사IN> 41호에 관련 기사 게재 예정).
KBS 노조가 ‘퇴진타령’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정연주 퇴진’이 노조의 정치적 존립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는 ‘낙하산 인사’라는 미래의 문제보다, ‘정연주 퇴진’이라는 과거의 문제에 집착한다. 그러나 이 설득력 없는 구호에 KBS 내부만 사분오열 되었다.
따지고 보면 KBS는 원래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기자/PD/경영/기술/지역 ‘5부족’이 서로 합종연횡을 이뤄 노동조합을 장악하기 위한 피 튕기는 혈투를 벌여왔다. 노조 집행부가 갈리면 전임 집행부의 비리를 적발해 ‘정치보복’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정권이 바뀌고 ‘낙하산 투입’이 임박하자 다시 한 번 ‘완장’을 차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까지 얽혀서 ‘개판 5분전’이다. ‘공정방송노조’ ‘수요회’ ‘여맥회’ ‘KBS의 미래를 걱정하는 중견기자 모임’ 이 많은 족보를 들여다보느라 머리가 깨진다.
음모와 배신과 욕망이 뒤범벅된 KBS를 들여다보다, 그러다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KBS 노조, 그 '영광의 역사'가 ‘오욕의 역사’로 변질되는 과정을 취재하던 중 노조 창립선언문을 보게 되었다. 20년이 지났지만 KBS 노조는 내부 모순에 빠져 한 치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20년 전에 노조가 문제제기를 했던 그 문제의 중심에 지금은 노조가 있다는 점이다.
20년 전에 어렵게 노조를 설립하며 KBS의 선배들은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 왔는가?’ ‘무엇 때문에 질타 당하고 거부되어 왔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KBS 노조는 다시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 같다.
다음은 한국방송공사노동조합 창립선언문 전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된 목소리로 엄숙하게 한국방송공사노동조합의 창립을 선언한다.
돌이켜 보면 방송공사 창립 15년이 되고, 지난 80년 암울한 시대 언론통폐합이라는 미증유의 비극 속에서 이른바 공영방송으로 옷을 갈아입고도 8년이 흐르도록 우리는 줄곧 심한 몸살을 앓아 왔다.
그 몸살은 공사로서 또는 공영매체로서의 KBS가 과연 그 이름에 합당하게 국민에 대한 봉사를 하여 왔으며 나아가 한 언론매체로서 정당한 길을 걸어왔느냐에 대한 외부의 질책과 내부로부터의 자책에 기인한다.
취재원에게 취재를 거부당한 적도 있었고, KBS는 출입을 삼가라는 수모를 겪었으며, 급기야는 시청료 거부운동과 KBS TV안보기 운동까지 열병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
그 동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 왔는가?
무엇 때문에 질타 당하고 거부되어 왔는가?
내부적으로는 국내 최대의 언론기관인 우리 KBS는 기획, 경영, 인사 등의 불합리로 인하여
모든 직종과 직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안고 지내온 것을 우리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방송 60년사의 뒤안길에서 묵묵히 각자의 업무에 사명을 다하여 온 우리들은 노력에 대해 충분한 보답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권익도 신장되지 못하였으며, 또 업무, 인사제도, 근로복지의 개선 등에서 소외된 계층들은 체념과 번민 속에서 KBS가 우리의 즐거운 직장이 될 것이라는 바램을 포기해온 것도 사실이다.
시대는 더 이상 KBS가 한낱 정부의 방송이기를 거부하고 진정한 국민의 방송, 민족의 방송이기를 엄숙히 요청하고 있다. 과거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옛 모습에서 탈피하여 인간 중심적이고 대중 지향적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기를 열렬히 요구하고 있어, 우리는 한국방송공사노동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KBS의 가족으로서 뼈아픈 반성을 바탕으로 구태의연한 타성과 관행, 그리고 무사안일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방송문화의 창조에 주역을 자임한다. 우리는 오늘 공영방송 KBS, 가장 보람 있는 사내근무 분위기 속의 KBS를 만들기 위해 한국방송공사노동조합을 설립한다.
198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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