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KBS를 지키겠다고 KBS 앞으로 간다. 그런데 KBS 노조는 시민들을 반기는 눈치가 아니다. 오히려 배후를 따져 묻는다. 시민들은 자신들과 달리 ‘정연주 퇴진’을 외치는 노조를 이해할 수 없어 ‘어용노조 물러가라’라며 노조가 설치한 만장을 넘어뜨린다.
도대체 왜 KBS 노조는 ‘낙하산 인사 배제를 통한 KBS 독립’을 이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자기들을 돕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일까? 이 기본 의문을 풀기 위해 KBS 노조 내부와 노조를 둘러싼 KBS 안팎의 역학관계를 들여다보았다.
직접 들여다 본 KBS 내부의 모습은 당나라에 멸망되기 직전의 고구려와 비슷했다. KBS 노조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5부족 연합체다. 기자협회 PD협회 경영협회 기술협회 지역총국, 이 다섯부족이 KBS 노조를 바치고 있다. 그런데 이 다섯부족이 힘을 합치지 않고 친노조 대 반노조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계속 고구려에 비유하면 친노조 세력은 ‘평양성 장수’들에, 반노조 세력은 ‘요동성 장수’에 비유할 수 있다. 둘이 힘을 합치면 최시중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들을 막아내고 언론자유를 지킬 수 있지만 둘이 분열되면 막을 수가 없다. 지금 정연주 사장을 내쫓자고 말하는 것은 평양성 문을 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친노조 세력과 반노조 세력의 갈등만이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도 당나라에 들러붙었던 세력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KBS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곧 부임할 것으로 알려진 ‘김인규 도독’에게 달라붙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누가 ‘연남생’ 역을 맡을지...정말 걱정된다.
<시사IN> 41호에 게재
"내부의 적이 적보다 더 무섭다"
촛불이 켜진 6월13일자 ‘KBS 독립을 위해 정연주 사장을 지켜야 한다’는 성명에서도 여전히 노조는 “방송 독립을 위해서 정연주가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정 사장 퇴진은 현 노조 출범 당시(2007년초)부터 주장해왔던 것으로 낙하산 인사 임명을 위해 정 사장 퇴진을 주장하는 외부 세력과는 절대 연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렇다. KBS 노조의 ‘퇴진 타령’은 신곡이 아니다. ‘정연주 퇴진’ 요구는 현 11대 노조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10대 노조를 계승한 현 노조는 노조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표를 결집하기 위한 ‘깃발’로 ‘정연주 퇴진’을 들었다. 정 사장이 추진한 ‘대팀제’와 ‘지역국 기능 조정’에 반발했던 직원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당선될 수 있었다.
여기서 일반 회사 노조와 다른 KBS 노조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KBS 노조 선거가 과열 양상을 띠는 것은 노조 출신이 회사에서 ‘메인스트림’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정권에 따라 바뀌는 경영진이 ‘한시적 권력’을 행사하는 반면 노동조합 출신은 ‘상시적 권력’을 형성한다.
이는 MBC 노조도 마찬가지다. 최문순 전 사장(현 민주당 국회의원)은 노조위원장 출신이었다. 그런데 MBC 노조와 KBS 노조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MBC 노조는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있어서 노조위원장 선출 때면 교황 선출 방식인 ‘콘클라베’ 방식과 비슷한, 일종의 합의 추대된 단일 후보가 나와 당선되곤 한다.
그러나 KBS 노조 선거는 구도가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KBS 내에는 5개 세력군이 있다. 기자협회·PD협회·경영협회·기술협회·각 지역총국이 그것이다. 이 5개 세력군이 합종연횡을 통해 노조위원장 선거를 치르는데, 대부분 과열 양상을 띠곤 한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면 일종의 ‘정치 보복’이 뒤따른다. 전임 노조 집행부의 회계장부를 뒤지는 것은 이제 KBS 노조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자·PD 연합으로 구성된 9대 집행부(2003~2004년)는 ‘친정연주 노선’이었다. 반면 지역·기술·경영 연합체인 10대 집행부(2005~2006년)는 ‘반정연주 노선’을 채택했고 기술·경영 연합체인 11대 집행부(2007~2008년)는 이 노선을 계승했다. 현재는 기술·경영·지역 일부가 노조를 중심으로 ‘정연주 퇴진’을 주장하는 ‘여당’이, 기자·PD·지역 일부(부산·대전·창원·청주)가 ‘정연주 퇴진 반대’를 외치는 ‘야당’이 되었다.
친정연주 대 반정연주 구도로 나뉘었던 세력 판도는 KBS 앞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 ‘친노조’냐 ‘반노조’냐로 재편되었다. 그동안은 ‘정연주 퇴진’이라는 이슈를 구심으로 한 친노조 세력이 우위를 점했지만, 촛불집회 이후 ‘정연주 보호’ 논리가 먹히면서 반노조 세력이 급속도로 결집하는 양상이다. 보도국의 한 기자는 “촛불집회 배후 세력 운운하면서부터 노조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때부터 반노조 흐름이 선명해졌다”라고 말했다.
세력 판도가 바뀌는 와중에 양 세력 간 균열이 더 심해지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각 협회 안에서도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PD협회 내부에서는 ‘PD협회 정상화 추진 협의회(6월18일 발족)’가 만들어져 친정연주 성향의 기존 PD협회 집행부에 반기를 들었고, 기자협회 내부에서는 ‘KBS 미래를 걱정하는 중견기자 모임’이 구성되어 역시 기존 기자협회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부가 분열되면서 내부 여론조사마저 외부 기관에 맡겨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기자협회는 최근 보도본부 기자 478명을 대상으로 ‘지금 정 사장 퇴진 요구가 적절한가’라는 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공정성 시비 때문에 사내 조사를 외부에 맡겼다(적절하지 않다 53%, 적절하다 38.8%). 이전에도 이런 조사를 시도했다가 방식이나 문항 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해 조사를 포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조와 직능협회 같은 공식 조직만 분열한 것이 아니다. 각종 사조직이 활동을 재개하거나 새로 결성되면서 또 다른 변수로 떠오른다. ‘수요회’ ‘여맥회’ ‘김홍 전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고려대 인맥’ ‘강동순 전 감사 측근 그룹’ 등이 요즘 주목받는 소그룹이다.
이 중 가장 관심을 모으는 사조직은 최근 두 차례 정도 공식 모임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수요회’다. 이명박 대통령 대선 선대위의 방송전략실장을 역임한 김인규 전 KBS 이사와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KBS판 하나회’가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전직 보도국 간부 출신 모임인 ‘여맥회(여의도의 맥박)’도 관심을 모은다. 여맥회는 6월17일 “정연주 사장은 더 이상 KBS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KBS를 위해 현명한 처신을 결행하기를 기대해 본다”라고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KBS 직원들은 ‘수요회’나 ‘여맥회’가 김대중 정부 시절 박권상 사장 체제의 ‘전주고 5인방’이나럼, 그리고 정연주 사장 체제의 ‘정연주 7인방’이라 불렸던 사람들처럼 포스트 정연주 시대의 ‘세도가 그룹’을 형성하려는 것은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사회와 경영진, 간부직도 정연주 사장에 대한 태도에 따라 정확히 나뉜다. 한나라당 추천 이사가 6명인 이사회는 ‘반정연주’로 분류된다. 김홍 전 부사장이 사퇴한 경영진은 ‘친정연주’다. 반면 정 사장이 실시한 팀장제로 인해 직책을 잃은 간부 중에는 ‘반정연주’ 세력이 많다. 부장 이상 1직급 관리직급으로 구성된 ‘공정방송노조’는 ‘정연주 사장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KBS의 내부 분열과 함께 주목해야 할 다른 변수는 KBS와 관계있는 외부 세력의 분열이다. 촛불을 든 시민을 비롯해 민주당·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야당, 그리고 각종 언론 관련 시민단체가 ‘KBS 독립’을 주장하고 있지만, 반대 주장을 하는 세력의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감사원에 KBS에 대한 감사를 청구한 ‘뉴라이트 전국연합’을 비롯해 우파 단체들이 적극 개입해 KBS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6월17일에는 고엽제전우회가 KBS를 급습했다. 이들은 “천막에서 김정일 사진이 나왔다”느니 “김일성 동상이 나왔다”느니 하는 주장을 하며 ‘KBS 독립’을 주장하는 시민의 농성장을 침탈했다.
분열은 언론학자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6월16일, 강준만(전북대)·김창룡(인제대) 교수 등 언론학자 124명은 ‘언론공공성 수호 선언’을 발표하며 “정부는 공영방송 장악 음모를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반면 전임 유재천(한림대 특임교수) 대표가 최근 KBS 이사장으로 선임된 ‘공영방송 발전을 위한 시민연대’의 이민웅(한양대) 대표는 ‘정연주 사장 퇴진’을 공식 촉구했다. 방송위원을 지낸 김우룡(한국외국어대) 교수 등도 역시 정 사장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내부와 외부의 분열은 KBS 직원들 사이에 엄청난 불신을 야기했다. 요즘 KBS 인트라넷에는 ‘KBS 독립’에 관한 글이 자주 올라온다. 그런데 이런 글이 올라오면 순수성을 의심하는 글과 그 뒷배경을 추궁하는 글이 순식간에 따라 올라와 게시판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다.
이처럼 친노조 세력과 반노조 세력, 친정연주 세력과 반정연주 세력이 극심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정연주 사장은 침묵과 칩거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정 사장의 태도에는 양쪽 모두 비판적이다. 반노조 진영의 한 기자는 “KBS 독립을 위해서 정연주 퇴진을 반대하는 것이지, 정연주가 좋아서 지키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 사장을 보호하는 측에서 겪는 ‘정연주 딜레마’는 적자 경영에서 기인한다. 보도국의 한 기자는 “월급쟁이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월급과 승진이다. 월급은 그대로고 승진은 멈췄다. 직원들의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사장실에만 버티고 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미 욕은 다 먹었는데 직접 행동을 취해서 평가받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노동조합도 ‘정연주 딜레마’를 겪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왜 하필 지금 이 시기에 정 사장 퇴진을 주장하느냐와 함께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도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 PD는 “내부 구성원도 사장 퇴진 이유를 온전하게 납득하지 못하는데 시민이 납득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적자 경영의 책임은 있지만 정 사장이 KBS의 공영성을 강화하는 데에는 기여했다는 것이다. 공영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도의 신뢰성인데, <시사IN>이 이번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KBS는 신뢰도 1위(18.4%)를 기록했다. 불신도(5위, 4.0%)는 조중동과 MBC보다 낮았다. 정연주 퇴진 문제는 양측 모두에게 ‘계륵’인 셈이다.
지금 KBS 안에는 세 개의 깊은 냉소가 흐른다. 하나는 정연주 사장에 대한 노조의 냉소고, 다른 하나는 정연주 사장 퇴진 운동에만 올인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냉소다. 그리고 이런 내부 갈등에 질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대다수 직원의 냉소다. 이 냉소의 벽을 넘어 KBS가 공영방송 본연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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