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
감옥에 갇힌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들의 조문을 위한 임시석방 여부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친구인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측근이었던 이광재 의원,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 그리고 후원자였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바로 그 대상입니다.
이들은 현재 임시석방 신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강금원 회장의 조문은 꼭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 회장은 박연차와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후원을 하면서도 자신의 사업을 키우거나 청탁을 하거나 하는 짓을 절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가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후원한 것은 로비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로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로 살 길이 막힌 측근들을 지원하면서 그는 “너희는 내 돈만 받아라. 다른데서 돈 받고 사고치지 마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의 죄가 있다면 ‘무능한 진보’를 위한 산소호흡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전북 부안’ 출신인 그는 부산에서 사업을 하며 늘 ‘전라도 사람은 배신을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며 억눌려왔습니다.
‘배신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그가 평생 충성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찾아가 후원을 약속 했고 마지막까지 노무현을 끌어안았습니다.
그의 구속 사유는 회사 공금 유용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회계처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지요.
그가 준 돈에 대가성이 있었다면 ‘뇌물죄’였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횡령죄’로 붙잡혀 들어갔습니다.
흔히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강금원 회장의 관계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관계에 비유됩니다.
5공 청문회에서 마지막까지 옥쇄해서 ‘의리맨’으로 불리는 장 전 부장도 사실은 전라도 출신입니다.
그의 고향은 ‘전남 고흥’입니다.
지역감정과 관련해서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차령이남의 사람은 배신을 잘 하니 쓰지 말라’라며 ‘훈요 10조’를 발표한 것으로 알려진 고려 태조 왕건의 최측근 충신이 바로 ‘전남 곡성’ 출신의 신숭겸 장군이라는 점입니다.
신 장군은 포위되었을 때 왕건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적의 화살을 받았습니다.
아무튼, 강금원 회장이 꼭 임시석방되어 조문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지난 4월18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람 사는 세상’에 남긴 강금원 회장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 강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강금원이라는 사람
강회장이 구속되기 전의 일이다. 내가 물어보았다.
“강 회장은 리스트 없어요?”
“내가 돈 준 사람은 다 백수들입니다. 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돈을 왜 주었어요?”
“사고치지 말라고 준 거지요. 그 사람들 대통령 주변에서 일하다가 놀고 있는데 먹고 살 것 없으면 사고치기 쉽잖아요. 사고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도와준 거지요.”
할 말이 없다.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의 수족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줄줄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와서 백수가 되었는데, 나는 아무 대책도 세워 줄 수가 없었다. 옆에서 보기가 딱했든 모양이다. 강회장이 나서서 그 사람들을 도왔다.
그 동안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한 일도 없는데 다시 조사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수가 없다.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강회장이 계속한다.
“지난 5년 동안 저는 사업을 한 치도 늘리지 않았어요. 이것저것 해보자는 사람이야 오죽 많았겠어요? 그래도 그렇게 하면 내가 대통령님 주변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에 일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강 회장이 입버릇처럼 해오던 이야기다.
“회사일은 괜찮겠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지난 번에 들어갔다 나오고 나서 직원들에게 모든 일을 법대로 하라고 지시했어요. 수시로 지시했어요.
그리고 모든 일을 변호사와 회계사의 자문을 받아서 처리했어요. 그리고 세무조사도 다 받았어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다시 덜컥 구속이 되어버렸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든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강 회장이 나를 찾아 온 것은 내가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였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은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 전화로 물었다. “1년에 5천만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 회장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한테 눈꼽만큼도 신세질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첫 마디를 이렇게 사람 기죽이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눈치 안보고 생각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장수천 사업에 발이 빠져서 돈을 둘러대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자연 강 회장에게 자주 손을 벌렸다. 당시 안희정씨가 그 심부름을 하면서 타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정치인이 정치나 하지 왜 사업을 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 구박의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직접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2000년 부산 선거에서 떨어졌고, 2002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는 장수천 빚 때문에 파산 직전에 가 있었다.
강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강 회장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단 한 건의 이권도 청탁한 일이 없다. 아예 그럴만한 사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퇴임이 다가오자 강 회장은 퇴임 후 사업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강회장의 생각에는 노무현이 중심에 있었고, 나의 생각에는 생태 마을이 중심에 있었다. 결국 생태마을 쪽을 먼저 하고 재단은 퇴임 후에 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그렇게 해서 주식회사 봉화가 생겼다. 이름이 무엇이든 우리가 생각한 것은 공익적인 사업이었다.
70억이라고 하니 참 크게 보인다. 그런데 강 회장의 구상은 그보다 더 크다. “미국의 클린턴 재단은 몇 억 달러나 모았잖아요. 우리는 그 10분의 1이라도 해야지요.” 이것이 강 회장의 배포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은 돈을 모으기가 어렵다. 꼭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강 회장 혼자서 부담을 해야 할 형편이다.
강 회장은 퇴임 후에 바로 재단을 설립하자고 주장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좀 천천히 하자고 했다. 강 회장 한사람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미안하고 모양도 좋지 않으니 출연할 사람들을 좀 더 모아서 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퇴임 후 바로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각종 조사와 수사가 시작되고, 박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도 시작되니 아무 일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모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재단은 표류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우리 집에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사업을 안 하는 사람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디 취직이라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봉하에 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런 봉하에 강 회장은 매주 하루 씩 다녀갔다.
그런 강회장이 구속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그의 건강을 걱정한다. 제발 제때에 늦지 않게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면목 없는 사람 노무현 (2009년 4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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