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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시민분향소 지킨 시민상주는 어떤 사람들이었나 (최문순 의원)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7. 19.



탄압받는 촛불은 늘 새롭게 진화한다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에 설치된 서울 대한문 시민 분향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의 힘으로, 촛불의 힘으로 운영되었다.
시민 분향소를 지킨 최문순 의원이 ‘49일간의 처절한 기록’을 보내왔다.  
 



글 - 최문순 (민주당 국회의원)  / 정리 - 조한기 (최문순 의원 보좌관)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에 설치된 서울 대한문 시민 분향소는 갖가지 기록을 남겼다. 시민 분향소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의 힘으로, 촛불의 힘으로 운영되었다. 6월23일, 보수 우익 단체와 용역, 경찰의 합동작전으로 파괴된 분향소는 그 뒤에도 게릴라 분향소, 1인 분향소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 역시 새로운 기록이다. 시민 분향소에서 시민 상주의 한 명으로, 자원봉사자의 한 명으로 참여했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5월22일, 노사모 강연

5월23일 아침의 황망함을 어찌 다 말로 할까? 사실 난 그 전날, 그러니까 5월22일 금요일 밤에 고양·파주 노사모 초청으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려는 미디어 악법의 문제점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리고 그 노사모들과 새벽까지 뒤풀이를 했다. 하지만, 그날 아침의 비극을 그 자리에 있던 누가 예감했을까? 뒤풀이 생맥주의 숙취 속에 토요일 아침의 늦잠을 즐기던 나를 집사람이 깨웠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토요일이 어떻게 지났을까? 내 머리 속은 카오스, 즉 혼돈 그 자체였고 수많은 별똥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촛불은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촛불 시민은 움직이고 있었다. 촛불 시민들은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초원의 유목민처럼 신속한 그들은 홀연히 나타났다가 임무를 마치면 문득 사라진다. 지킬 것도, 따질 것도, 복잡하게 계산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디지털 노마드(유목민)’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의사결정 구조가 복잡하고 계산할 게 많은 시민단체, 특히 정당은 촛불의 신속성을 따라갈 수 없다.

그날 오후 ‘젠틀맨’ ‘다인아빠’ ‘아웅 졸려’ 등 촛불 예비군 3~4인, ‘황일권 감독’ 등은 경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덕수궁 앞에 진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대한문 시민 분향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촛불의 시작은 봉사였다

서울경찰청장이 경찰차가 분향소를 에워싸고 있어서 아늑하다는 ‘명박스러운’ 발언을 했지만, 대한문 시민 분향소에는 경찰차 말고 또 하나의 차량, ‘다인아빠’의 밥차가 영결식까지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다인아빠’는 촛불 세계에서 ‘밥퍼 목사’와 같은 존재다. 촛불이 모이는 곳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다인아빠’의 밥차가 나타난다. 커피·얼음물 같은 음료부터 김밥·컵라면·비빔밥에서 삼계탕까지. 촛불집회에 나와서 그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는 촛불의 시작이 봉사, 사회적 봉사라는 것을 몸으로 웅변해주는 존재다. 분향을 하기 위해 서너 시간씩 줄을 섰던 사람들에게 생명수 같은 시원한 냉수를 건네주고, 날밤을 새운 자원봉사자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말아주는 ‘다인아빠’의 밥차는 일주일 동안 대한문 시민 분향소의 부엌이었다.


두 눈 부릅뜬 백만의 부엉이

노숙자 소리를 들으며 촛불 시민들과 함께 대한문 시민 분향소에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약간 꿈인 듯싶은 것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느냐 하는 점이다. 한 번에 스무 명씩 두 곳에서 분향을 해도 저녁 시간은 서너 시간을 예사로 기다려야 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까지, 시청역을 지나 조선일보 앞까지 분향을 기다리는 줄은 이중 삼중으로 끝이 없었다. 한홍구 교수가 말했다. “이제 용의 시대는 가고, 부엉이의 시대가 왔다”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구세주처럼 불현듯 나타나는 촛불 시민이 있으니 나약한 지식인들이여, 정치인들이여 쉽게 절망하지 말라는 소리 같았다.


종이학 나무와 노무현 걸개그림

하루 이틀이 지나며 분향소의 틀이 잡혀나가자 자원봉사자들은 서너 시간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종이학 접기’ ‘걸개그림 그리기’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영결식날 대한문과 성공회대 ‘다시 바람이 분다’ 공연장에 걸렸던 밀짚모자를 쓴 노무현 대통령 그림은 덕수궁 돌담 한편에서 자원봉사자와 분향 시민이 함께 만든 작품이고, 분향소의 종이학 수만 마리도 다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청소, 분향물품(꽃·향·초) 나르기, 음료 제공과 질서유지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한 자원봉사자들을 ‘젠틀맨’과 ‘이스크라’ 같은 촛불이 이끌었다. ‘젠틀맨’은 지난해 조계사 앞 식칼 테러로 큰 봉변을 당한 바 있지만, 늘 변함없이 거리를 지켰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분향소를 찾은 신문사 사진기자에게 분향소 풍경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꼭 이산가족 찾기 하는 거 같아요”라고 했다. 그랬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시청역, 대한문 주변, 덕수궁 돌담길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노트처럼 ‘잃어버린 우리 대통령’을 찾는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이 사람, 대통령 노무현을 모르시나요? 회한, 자책, 그리움의 메시지가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촛불은 기록한다

대한문 시민 분향소 주변을 에워쌌던 이 소중한 메모들, 편지들, 모든 기록은 지금 차곡차곡 정리되어 ‘봉하마을’에 내려가 있다. 영결식이 끝나는 날 새벽, ‘젠틀맨’과 ‘다인아빠’ 등은 대한문 분향소 주변의 모든 기록을 수거했다. 그리고 나흘 밤을 새워서 분류하고 정리해 정중히 봉하마을에 그 기록물을 전달했다. 촛불은 청소만 잘하는 게 아니라 기록도 하고 정리도 한다.


시민 상주 어르신들의 고난

대한문 시민 분향소의 시민 상주는 아무래도 연배가 좀 있으신 촛불들이 주로 맡았다. ‘용’님, ‘초심’님, 영화하시는 ‘황일권 감독님’이 그 주인공이다. ‘초심’님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분신’을 시도했던 분이다. 얼굴과 몸 곳곳에 당시의 화상이 남아 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닉네임 그대로 늘 ‘초심’이다. ‘용’님은 연세가 가장 많은 상주이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장 기간 노숙을 했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KBS 장악에 나섰을 때 KBS 앞에 가장 먼저 천막을 쳤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전까지는 용산 참사 현장을 내내 지켰으며, 대한문 시민 분향소에서 첫날부터 상주를 한 후 지금까지도 상주를 하고 있다. 아마 이명박 정부가 끝나야 이분의 노숙도 끝날 것이다.


게릴라 분향소와 1인 분향소

대한문 시민 분향소를 설치하고 딱 한 달이 지난 6월23일 새벽, 마침내 올 것이 왔다. 경찰의 호위 아래 군복을 입은 보수 단체 노인들이 대한문 시민 분향소를 부수고, 노무현 대통령 영정을 탈취해 갔다. 몇 시간 후 또다시 경찰의 호위 아래 중구청에서 동원한 용역들이 흩어지고 부서진 분향소 물품을 치웠고, 그날 저녁에는 촛불문화제와 거리토론회를 하는 시민 상주들을 경찰이 일제히 연행했다. 잘 짜인 한 판 연극처럼 대한문 시민 분향소가 초토화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1인 분향소와 게릴라 분향소를 갖게 되었다. 탄압이 오면 촛불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며 그 불길을 이어갔다. 그 불길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주> 누군가는 이들의 수고를 기록해 주어야 할 것 같아서
최문순 의원실에 부탁해 <시사IN>에 기고문 형식으로 게재했습니다.
독설닷컴에도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