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의 변두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회생활 하면서 출신 고등학교 얘기를 했을 때 기자가 나온 고등학교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변화가 생겼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아주 유명한 고등학교가 되어 있었다. 소녀시대의 ‘에이스’ 윤아와 ‘막내’ 서현이 졸업한 고등학교였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한방에 통하는 명문고가 되었다.
확실히 걸그룹이 대세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2NE1, 애프터스쿨, 티아라, 포미닛, 시크릿, 브라운아이드걸스, 씨야, 햄, JQT, 에프엑스(f(x)), 레인보우, 토파즈, 레이디컬렉션…. 최근 1~2년 사이에 데뷔한 걸그룹만 꼽아도 10팀이 훌쩍 넘는다. 걸그룹끼리 붙여서 ‘예능 월드컵 16강전’도 해볼 수 있을 만큼 많다. 내년 초에 더 나온다고 하니 32강도 가능할 지 모르겠다.
2009년 걸그룹은 TV 음악프로그램을 넘어 예능프로그램으로, 드라마로 세를 넓혔고 주류 광고 모델로 안착했다. 추석 특집프로그램도 걸그룹이 차지했고 대기업 공익광고 모델로도 등장했다. 소녀시대의 ‘Gee’와 원더걸스의 ‘텔미’가 국민가요처럼 불리면서 걸그룹이 쏟아져 나왔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씨는 이를 ‘걸그룹 창고대방출’이라 표현했다.
S.E.S와 천상지희를 만든 SM엔터테인먼트가 소녀시대를 만들기까지 5년이 걸렸지만 후속 그룹인 에프엑스를 만드는 데는 2년밖에 안 걸렸다. 핑클을 배출한 DSP미디어가 카라를 만드는 데는 10년이 걸렸지만 레인보우를 만드는 데는 2년밖에 안 걸렸다. 걸그룹 열풍은 최근 10년 동안 가장 두드러진 대중문화 현상이다. 바꿔 말하면 대중문화계에 10년 만에 큰 장이 선 것이다.
걸그룹 데뷔 나이, 19~20세에서 15~16세로 연령져 낮아져
대중은 걸그룹이 나오는 족족 흡수했다. 올해 6월18일 데뷔한 포미닛이 SBS 인기가요에서 ‘뮤직’으로 정상에 오르기까지 딱 10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몇몇 걸그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대로 된 정규앨범을 내기도 전 스타 그룹의 반열에 올랐다. 자고 나면 새로운 걸그룹이 나왔고 몇 밤 더 자고 나면 새로운 걸그룹은 인기 걸그룹이 되어 있었다. S.E.S와 핑클이 인기를 끈 이후 꼭 10년 만의 일이다.
걸그룹은 침체된 대중음악계의 ‘소녀가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소년팬과 아저씨팬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MBC <음악여행 라라라>의 이흥우 PD는 “걸그룹 열풍이 불기 시작한 후 TV음악프로그램 시청률이 10%를 넘어섰다. 걸그룹이 대중음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요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신규 멤버 충원할 때 걸그룹 멤버를 0순위로 고려한다고 한다.
걸그룹 열풍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은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기 걸그룹 중 한 팀인 소녀시대의 경우 식음료 광고를 넘어 카드(신한카드), 휴대전화(LG전자 뉴초콜릿폰) 등 대형 광고 모델로 나서는 등 톱모델의 반열에 올라섰다. 애프터스쿨의 유이는 소주 광고에 이효리와 함께 모델이 되는 등 선배 ‘빅모델’의 전철을 밟아간다. 이전 빅모델과 차이가 있다면 빅모델로 성장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는 것이다.
삼촌 부대 이끈 걸그룹, 대중문화 소녀가장 역할
그러나 걸그룹이 지나치게 많이 나왔다는 것은 짐이 되고 있다. 한 대형기획사 간부는 지금 양상을 ‘걸그룹 춘추전국시대’라고 표현했다.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는 걸그룹들의 각축장이라는 것이다. 걸그룹이 많이 나오다보니 그 안에서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로 나뉘기도 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걸그룹의 실력은 엇비슷하다. 대체로 먼저 나온 그룹이 선점효과를 누린다”라고 평가했다.
대중음악계 종사자들은 적정 걸그룹 숫자를 8팀 내외로 본다. 그룹당 멤버 수가 5명 내외이기 때문에 8팀만 되더라도 40여 명에 이른다. 현재 16팀 이상이 활동하고 있어 걸그룹 멤버만 80명이 넘는다. 내년 초반에 데뷔할 그룹도 4~5팀이 있어서 곧 100명이 넘게 된다. 이는 인간 기억력의 한계와 인지능력을 벗어난 숫자다. 업계에서는 보통 상위 8팀 정도만이 기억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걸그룹 데뷔와 관련해 최근 나타나는 양상은 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19~20세(1989~1990년생) 여성들로 구성되던 걸그룹은 이제 15~16세(1993~1994년생) 소녀들로 구성되고 있다. 30세면 걸그룹에서는 원로 축에 든다. 요즘 활동하는 걸그룹 중에서는 1980년생인 애프터스쿨의 가희가 최고령이다. 에프엑스의 크리스탈이 1994년생으로 가장 어린데 이 그룹의 평균연령은 16.6세에 불과하다.
걸그룹 멤버들의 출신성분은 다양하다.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의 조카인 소녀시대 써니, 배우 하재영씨의 딸 쥬얼리 하주연, 가수 전영록씨의 딸 티아라 전보람 등 연예인 2세도 있고 투애니원의 씨엘과 다라, 소녀시대의 티파니처럼 교포 출신도 있다. 해외 진출을 감안해 에프엑스는 엠버라는 중국계 미국인과 중국인 빅토리아를 멤버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걸그룹 구성의 핵심은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
그렇다면 걸그룹은 어떤 원칙에 따라 만들어질까? 일반 시청자가 보기에 걸그룹은 비슷비슷한 외모와 분위기의 여성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중요하다. 소녀시대의 제시카와 에프엑스의 크리스탈은 자매간이다. 예전이라면 ‘은방울자매’나 ‘펄시스터즈’처럼 자매그룹으로 나왔겠지만 요즘은 다르다. 다양한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걸그룹의 구성원리에 대해 대중문화 전문블로거 ‘웅크린감자’씨는 걸그룹 구성의 3요소로 ‘에이스, 보컬, 막내’를 꼽았다. 그룹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에이스’, 음악성을 책임지는 ‘보컬’ 그리고 맑고 순수한 이미지로 호감도를 높이는 ‘막내’가 가장 중요한데 이 세 요소가 조화를 맞춰 구성되어 있어야 그 걸그룹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멤버들도 나름의 주특기가 있다. 대부분 오랜 연습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걸그룹 멤버들은 자신만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 춤꾼으로 래퍼로 실력을 기르고, 하다못해 성대모사라도 익혀서 자신들에 대한 호감도를 높인다. 이전에는 아저씨팬들을 의식해 섹시한 이미지의 멤버를 중용했으나 요즘은 소녀팬이 늘면서 중성적 이미지의 멤버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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