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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위기인 한국의 대학/대학 내 비정규직 문제

1939년생 최경순 할머니의 마지막 출근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1. 13.


가운데 안경쓴 사람이 최경순 할머니다.



2009년 12월31일 새벽 5시15분 미아리고개 버스정류장 동료 한 명과 최경순 할머니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1939년생인 최 할머니는 이날 22년 동안 환경미화원으로 일해온 고려대학교에 마지막 출근하는 길이었다. 언덕에서 칼바람을 맞고 버스를 탄 다음 성북구청 앞에서 다시 갈아타서 고려대 이공대 후문에 도착한 시간은 5시55분이었다. 



이날은 그나마 방학이라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한 것이었다. 보통 때는 4시30분에는 버스를 타야했다. 자녀들이 한창 클 때는 자녀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도시락을 싸놓고 출근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최 할머니가 청소를 시작한 것은 1988년 10월이었다. 청소일을 하고 번 돈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려왔다. 최 할머니의 친정은 잘살았다고 한다. 피란 가서도 여고에 다닐 만큼 윤택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인물이 좋았는데 인물값을 했어. 개떡같은 남편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애들은 인물이 좋아. 우리 둘째는 사람들이 차인표라고 그래”라고 말했다.

    
 
쉼터에서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은 최 할머니는 생활환경대학 5층으로 향했다. 그녀의 임무는 5층 교수연구실과 실험실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맨 먼저 하는 일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 교수연구실과 실험실 등 총 40여 개 사무실을 돌며 쓰레기를 치웠다. 방마다 보안키가 있어서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불편했다. 번호키는 비밀번호도 외우고 있어야 했다. 일흔 살의 그녀에게 디지털은 짐이었다. 



쓰레기를 치우고 난 뒤엔 바닥 청소다. 바닥 청소를 할 때는 실험실을 조심해야 한다. 위험 약품이 많기 때문이다. 교수연구실과 실험실 청소를 마치면 복도를 청소한다. 최 할머니가 청소하는 복도 맞은편 건물에 “너의 젊음을 고대에 걸어라. 고대는 너에게 세계를 걸겠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최 할머니가 황혼을 바친 고대는 그에게 무엇을 줄까?


최경순 할머니




8시, 아침 청소를 끝낼 무렵 교수 한 명이 출근했다. 최 할머니도 친구 중에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예전엔 부러웠는데 지금은 안 부러워. 내 몸 가지고 내가 벌어먹는데 이만큼 떳떳한 것이 어딨어. 아파트 중도금 이자를 매월 60만원씩 내야 하는데 한 2년만 더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8시45분, 최 할머니가 동료들과 아침을 먹는다. 쌀은 학교와 싸워 지켜낸 폐지 판매대금으로 산 것이었다. 동료들은 최 할머니를 아랫목에 앉게 했다. 최 할머니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해오는 동안 가장 보람 있는 일로 노조 만든 일을 꼽았다. 퇴사를 1주일 남기고도 그녀는 구조조정에 대항해 동료들과 본관에서 이틀 동안 철야농성을 벌였다. 최 할머니는 "필요하려면 삭발이라도 하려고 했다. 내가 이공대 대표를 맡고 있는데, 남은 동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하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밥과 장미'를 내건 청소 할머니들의 투쟁에 학교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진 이유는 명확했다. '쪽팔려서' 고려대와 용역 계약을 맺은 회사는 청소 할머니들이 밥값에 보태던 폐지 판매대금을 빼앗으려 했다. 할머니들은 한 그릇의 밥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고 노조위원장이었던 이영숙 할머니는 "100년 전통의 고대에서 100년 동안 폐지는 우리 것이었다"라고 말하며 할머니들을 독려했다. 결국 용역회사는 폐지를 빼앗지 못했다.



10시, 아침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최 할머니는 관리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면접에 합격하면 정년을 넘겼지만 촉탁직으로 근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면접장에는 고대 미화노조 이영숙 위원장도 나와 있었다. 끝까지 동료를 지킨 그를 동료들도 지켜주었던 것이다.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최 할머니는 새해 아침 다시 ‘노동의 새벽’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