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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위기인 한국의 대학/대학 내 비정규직 문제

고려대 청소 할머니들의 짜릿한 '폐지 전쟁'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1. 14.




‘우리는 빵과 함께 장미도 원한다’는 구호가 등장하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는 1985년 미국에서 벌어진 이주 노동자 캠페인 ‘용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의(Justice for Janitors)’를 소재로 한 영화다. 학대받는 이주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고발한 이 영화에서 노동자들은 갖은 협박과 방해를 극복하고 노조를 조직해 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한다.

첨단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는 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했다.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지역 한인마트에서 일하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이었다. 마지막 행진 장면에는 이들과 연대하는 한인 대학생들도 함께했다. 그 중심에 있는 구호가 바로 ‘빵과 장미’였다.


정말 낭만적인 이야기다. 이 ‘빵과 장미’가 한국에서 ‘밥과 장미’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영화보다 참혹했다. 우리의 환경미화원들은 아직 ‘밥’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인 이날 고려대학교 본관에는 50여 명의 대학생이 민주노총 공공노조 산하 공공서비스지부 고려대분회 노조원들과 함께 점거농성을 벌였다. 노조원은 대부분 60세 전후의 할머니였다.


점거농성은 12월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진행되었다. 학교가 청소 용역업체를 교체하면서 환경미화 할머니들이 그전에 맺은 임단협을 승계하지 않으려고 하자 학생들과 할머니들이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학교 곳곳에서 전쟁이 치러졌다.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 대자보를 써붙이면 학교 직원들은 이를 뗐고 학생들은 다시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환경미화 할머니들은 학교 본관에서 밥을 지어 학생들을 먹였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학생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예일대생들이 명예박사를 받으러 온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야유했듯이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을 막다가 핵심 학생들이 출교되기도 했던 고려대생들에게는 본관 점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교수를 감금했다는 누명을 쓰고 7명이 출교를 당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화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총장실을 점거했던 하버드생들처럼 과감히 본관 점거에 들어갔다. 총학생회가 나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조직한 ‘미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학생대책위원회’ 소속 학생들이었다.


이번에는 학교가 아무 말도 못했다. 학교가 환경미화 할머니를 직접 고용한 것이 아니라 용역회사가 고용한 것이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고, 또 학생들을 제 3자라고 문제 삼을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학교 건조물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기도 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환경미화 할머니들의 요구가 너무나 기본적이고 타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지시를 받은 용역회사는 노조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60세까지 낮추려던 정년을 70세로 유지하기로 했고 단체협약은 승계하기로 했다. 폐지 판매비용으로 식대보조금 2만5000원을 지불하기로 했고 노조전임자도 유지하고 1년에 두 차례 노조 단합대회도 보장하기로 했다. 할머니들의 완승이었다.



학교 측이 완패한 이유는 반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 달 전에 고려대는 환경미화 할머니들과 전쟁을 치렀다. 발단은 폐지대금이었다. 고대 할머니들은 폐지를 모아 팔아서 식대에 보탰었다. 용역회사에서 나오는 식대는 한 달에 3만5000원이었다. 아침 점심 두 끼와 토요일 아침 등 할머니들은 한 달에 50끼를 이 식대로 해결해야 했다. 한 끼에 700원꼴이었다. 할머니들은 폐지를 판 돈으로 쌀을 싸서 보충해왔다. 


그런데 용역회사가 폐지대금을 가져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이유는 학교 측이 등록금 동결을 이유로 청소용역비를 줄였기 때문에 수입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용역회사는 폐지를 건드리면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 그릇의 밥이 달려 있는 폐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할머니들은 ‘성전’을 시작했다.


공공서비스노조 고려대분회 이영숙 분회장(64)은 100년 전통의 고대에서, 100년 동안 폐지의 주인은 우리였다. 한 끼 700원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서 폐지를 가져가라"라고 말하며 노조원을 독려했다. 폐지에 관해 100년 넘게 유지되어온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려대 학생도 거들었다. 이것이 ‘1차 폐지전쟁’의 시작이었다.

싸움은 금세 불이 붙었다. 이영숙 분회장은 마이크를 잡고 “우리는 여기서 청소하는 노동자다. 한 달 3만5000원으로 밥 먹고 산다. 배고파서 못살겠다”라고 외쳤다. 이들의 배고픔을 외면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노조, 교수회, 정규직 대학노조 등 모두가 들고 일어섰다. 할머니들에게 다이어트를 강권하는 학교 측을 대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폐지대금을 할머니들에게 주라는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점심시간에만 서명을 받았음에도 3일 만에 1만48명의 서명이 모였다. 학생대책위를 주관한 한 학생은 “3일 만에 1만명이 넘게 서명을 한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등록금 인상 반대 서명을 한 달 동안 받아도 이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 학생들이 너무나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학교와 용역회사 측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용역회사 측은 2만5000원을 일괄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이런 대학 미화노조의 기원은 2002년 고려대노동절 행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동절을 맞이해 고려대 학생들은 학내 청소용역노동자 실태를 파악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휴게실에서 쉬고 식대는커녕 한 달 임금이 40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노동조합 조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핵심 노동자 몇 명만 해고당했다. 다시 ‘불철주야(불완전노동 철폐를 주도할꺼야)’ 팀을 만든 학생들은 비밀리에 환경미화 할머니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그 결실을 2004년에 맺었다. 

할머니들이 노조 결성에 적극적인 이유는 임금이나 근로조건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고려대분회 김윤희 병원대표는 “노조 없을 때는 소장이 그랬다. 당신들은 말이니까 앉지 마라. 자도 서서 자라. 그러면 우리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복창해야 했다. 늙어서 까먹는다고 매일 아침 그 짓을 시켰다라고 말했다.

노조가 만들어진 후 고려대 환경미화 할머니들은 학내외 연대 활동을 열심히 했다. 총학생회 등록금 집회에도 참석 했고 고려대 출교생들이 천막농성을 할 때는 명절 때마다 떡국을 끓여다 먹였다. 출교 무효 재판이 벌어지는 법원까지 함께 가서 응원했다. 할머니들의 그런 넘치는 정을 받아온 학생들은 할머니들을 위해 기꺼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반납할 수 있었다.

환경미화 노조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에 대해 권태훈 조직부장은 “요즘 대학생들은 88만원 세대로서의 자의식이 있다. 본인이 아르바이트나 인턴을 경험하면서 저임금과 비인간적인 대우 임금체불 등의 노동시장 현실을 경험했다. 혹은 부모님이 외환위기로 실직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