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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

모든 시민은 미디어다 (소셜미디어 체험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4. 17.



주> 문화연대 웹진 '상상나누기'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모든 시민은 미디어다

-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 체험기
 
 
10년 전 <오마이뉴스>가 창간될 때 명제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자와 언론사가 독점했던 뉴스 생산에 시민이 접근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주었다. 오연호 대표의 이 실험은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고 ‘대한민국 미디어 특산품’이 되어 세계 유수 언론과 언론학회에 소개되었다.
 
10년이 지났다. 우리 사회 미디어환경은 어떻게 바뀌었나? 그 변화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5년 전 등장했던 블로그를 살필 필요가 있다. 블로그가 등장하면서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모형은 한 단계 성숙했다. <오마이뉴스>는 시민이 뉴스를 작성하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뉴스가치 평가 편집 등 게이티키핑을 편집부에서 맡았다. 뉴스 생산의 민주화가 완벽하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블로그로 오면서 이 모형은 한 단계 성숙했다. 모든 시민은 기자이면서, 데스크이면서, 언론사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묘형도 한계가 있었다. 블로그가 미디어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뷰’ 등 메타블로그를 활용할 수 밖에 없는데 이슈 주도권이 메타블로그 에디터에 있었다. ‘열린편집자’ 등 누리꾼들고 결합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주요한 편집권은 에디터에게 있었다.
 
오마이뉴스와 블로그를 거치면서 뉴스 생산의 민주화를 이뤘던 대안미디어 모형은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뉴스 유통의 민주화까지 이루게 된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뉴스를 전달하면서 뉴스 유통의 독점 구조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적극적 뉴스 소비를 통해 뉴스 생산의 민주화/뉴스 유통의 민주화/뉴스 소비의 민주화를 완결하게 된다. 바야흐로 ‘모든 시민은 미디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생산과 유통의 민주화를 통해 이름 없는 시민의 폭로와 허약한 구멍가게 언론사의 뉴스가 주류언론사 뉴스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아바타>의 신령스런 나무처럼 씨줄과 날줄로 얽혀 ‘집단지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모두가 블로그라는 뉴스의 성을 쌓고 트위터라는 뉴스의 길을 내 누구나 뉴스 생산자이여 유통자이며 현명한 소비자인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이 과정을 함축하는 말은 ‘뉴스의 패자부활전’ 혹은 ‘이슈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블로그와 트위터에서 뉴스와 이슈의 언더그라운드 마이너리그 2부리그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에서 다양한 패자부활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뉴스의 형식을 갖춘 것보다 갖추지 못한 것이, 공식 뉴스 유통 채널을 따른 것 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더 영향이 큰 시대가 되고 있다.
 
이제 ‘억울해 죽겠다’고 올려놓으면 최소한 억울해서 죽지는 않게 알아주고 위무해주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관건은 두 가지다.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절실한 뉴스인가 하는 것과 이를 전하려는 소통의 의지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나 하는 것이다. 그 억울한 목소리를 발견해낼 눈과 귀가 열렸고 전달해줄 손과 발이 풀렸다.
 
이제 프로저널리즘과 아마추어 블로거리즘의 이분법은 사라지고 있다. 일반인 기자 전문가가 모두 어우러진 블로고스피어의 이슈리그는 더 이상 조기축구가 아니다. 코리안리그다. 트위터 역시 진화하고 있다. 전국노래자랑 지역대회, 동네잔치가 아니다. 연말 가요대상이다. 트위터 이슈가 곧 일반 이슈다. 블로고스피어가 곧 오버그라운드고 트위터가 곧 일반 사회가 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기존 언론사에 속해 뉴스 정규군이었던 나는 계급장 떼고 이 뉴스의 원형경기장에 뛰어들었다. 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가 된 것이다. 그 원형경기장에서 거듭 승부를 벌인 끝에 파워블로거와 파워트위터러가 되었다. 블로고스피어에서 보낸 2년과 트위터스피어에서 보낸 8개월의 경험을 복기해본다면. 1인 미디어의 시대에서, 만인 미디어의 시대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 원형경기장은 한 사람의 승자를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다. 더불어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곳도 아니다. 파워블로거로서의 경험(블로고스피어에서 꽤 잘 나갔다. ‘독설닷컴’은 <무한도전>식으로 표현하자면 블로고스피어의 1인자였다), 그리고 파워트위터러로서의 경험(팔로워 1만7천명은 나같은 ‘듣보잡’에게는 기록적인 수치다)을 합친 결론은 ‘소통’이었다. ‘소통’은 약자들의 마지막 보험이었다.
 
이런 소통이 기득권 세력에는 다분히 불편한 것이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트위터에 안달복달이다. 선관위가 트위터에 얽매이는 까닭은 아마 ‘트위터만 막으면 된다’라는 판단이 서서 일께다. 선관위의 예민한 촉수는 벌써 나에게까지 뻗었다. 서울시장 후보 관련해 재미삼아 트위터에 올려놓은 설문을 문제 삼아 시비를 걸었다. 이런 선관위의 히스테리에서 ‘트위터 포비아’가 읽혔다.
 
하늘의 별과 같이 미디어가 많아진 시대다. 그러나 결코 넘치지 않는다. 그 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시위한다고 해서 은하수를 구조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는 ‘1인 미디어’의 역할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왜? 모두가 소중하니까.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