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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열이 만난 사람

'4대강 콘서트'와 '노무현 추모콘서트' 기획자 탁현민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4. 19.

지난해 노무현 추모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와 
노무현재단 출범콘서트 'Power to the People'을 기획했던 
공연기획자 탁현민 한양대 겸임교수가 
'시민에게 권력을!  Power to the people 2010'과 
'4대강 콘서트(서울 봉은사 5월29일 예정)'를 기획했습니다. 

우리시대 '우드스탁'을 꿈꾸는 그를 지난달 만나보았습니다. 
그의 네 번째 책 '상상력에 권력을' 권말인터뷰를 위한 것이었는데, 
'독설닷컴'에도 올립니다. 
그에게 '저항'의 의미를 들어보았습니다. 





탁현민, 
그의 시계는 언제나 
1969년 우드스탁에 멈춰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까까머리였다. 10년 전이었다. 수더분한 모습의 그 시민단체 간사는 잠깐 얘기를 나눠보는 것만으로도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는 ‘문제의식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끼 있는 활동가’였다. 그의 꿈은 단순했다. 시민운동이 자립할 수 있도록 공연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었다. 

물경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 속에 그도 변했다. 멋지게 변했다. 그는 이제 ‘끼 있는 공연기획자’ 중에 가장 문제의식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변한 것인 동시에 변하지 않은 것이다. 변했다면 좀 더 요령 있는 기획자로 변한 것이고, 변하지 않았다면 처음처럼 여전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운동가라는 것이다. 

요즘도 ‘의미’를 담아내는 기획안을 들고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메시지를 지닌 기획이라면 찾아갈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탁현민. 5-18 광주민중항쟁 30주년 기념 공연 의뢰서를 비롯해 각종 기획안이 그 앞으로 배달되었다. 일이 넘쳐났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돈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를 ‘공익 기획자’로 각인시킨 것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 - 다시 바람이 분다’였다. 사람들은 그 거대한 씻김굿을 보며 그 감동의 굿판을 벌인 탁현민이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그해 여름 뜨거웠던 추모 열기를 그는 가을의 노무현재단 출범콘서트 ‘파워 투 더 피플’의 차가운 각성으로 갈무리했다.

나는 그를 광야로 내몬 공범이었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노무현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나는 탁현민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는 멋진 답을 내놓았다. 비록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이 봉쇄되어 성공회대학교 대운동장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감동까지 봉쇄할 수는 없었다.  

그가 멋지게 공연을 마무리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는 위태로웠다. 혼자 벌어 혼자 먹던 그에게 이젠 군식구까지 딸렸다. 그가 먹여살려야할 직원만도 열 명이 넘었다. 벌어먹을 궁리를 하기도 모자란 그를 사지로 내몰았건만, 주변에서 걱정을 하건 말건 그는 공연만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매력적인 결과물로 자신을 증명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면 그는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어떤 기분인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러기를 몇 번... 이번엔 그가 인터뷰를 자청했다. 흔쾌히 달려갔다. 책을 내면서 그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5-18 광주민중항쟁 30주년 추모공연 기획안을 붙들고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30주년인데 오히려 행사 예산은 축소되어 있었다. 거기서부터 질문을 물고 들어갔다. 




- 왜 그런 공연을 떠맡는가? 

엔터테인먼트가 엔터테인먼트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드스탁 축제처럼 음악이 사회적 발화의 수단이 되기를 바랬다. 사회변혁의 중요한 수단이었던 포크음악은 1970년대부터 허물어졌다. 1980년대 노래를찾는사람들이 의미 있는 성취를 이뤘지만 ‘삶의 노래’는 1990년대 이후 허물어졌다. 그 계보를 복원하고 싶다. 

-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대중문화의 본질은 유흥과 오락 선정성이지만 저항성 역시 그 본질의 하나다. 그런데 저항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안타깝다.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우드스탁에서 외쳤던 것은 “모든 금지하는 것은 금지한다”라는 것과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는 것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은 ‘우리 꺼’라며 자율경영을 선언하고 공장을 점거했고 학생들은 캠퍼스를 점거했고 예술가는 극장을 점거했다. 그런 세상을 꿈꾼다. 

- 그런 시절은 이제 끝나지 않았나? 

우드스탁 직전까지 체제 저항의 상징이었던 밥 딜런은 정작 우드스탁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관심은 ‘개인 혁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세계 주류 음악은 그때부터 혁명성을 잃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포크음악과 민중가요 폭풍이 지나간 뒤엔 개인의 감정을 담은 음악만 만들어지고 있다. 

- 40년 뒤, 노무현 추모콘서트로 그 명맥을 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기분이 어땠나?  

두 번의 공연을 기획했다. 사람들은 난산 끝에 이뤄낸 첫 번재 콘서트가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두 번째 공연이었다고 생각한다. 겉보기에는 첫 콘서트가 더 화려했을 수 있다. 두 번째 콘서트에는 헤드라이너도 줄어들고 관객도 적었지만 연출자로서 더 만족스러웠다. 앞의 공연은 울컥한 기분을 달래는 굿판이었지만 뒤의 공연은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 가수들에게 섭외 연락을 할 때 부담스럽지 않았나? 

나를 위해서 하는 공연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하는 공연이었다. 공연을 통해서 자신들의 미안한 마음 불편한 마음을 해소시키는 공연이었다. 나는 그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이다. 공연의 성격을 설명하는 설득의 과정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원해서 한 일이다. 

-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수들이 자유롭게 참석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가수들의 사회적 참여활동이 막혀있다. 참여하면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미국 가수들은 아이티 참사 후 바로 모여서 바로 음반 내고 <We are the world>를 불렀다. 한국 가수들은 참여의 전통이 없어서 그런 일이 있어도 안 모인다. 쇼오락프로그램에서 판을 깔아주지 않는 이상 안 모인다. 예전에는 환경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와 같은 공익 콘서트가 있어서 윤도현이 나와서 ‘철망 앞에서’ 같은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기회가 없다. 

- 기껏 멍석을 깔았는데 가수들이 안 나온다고 하면 어떤 기분인가? 

기획자로서 ‘훈련된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다. 가수가 공연에 출연하는 이유는 돈이 될 수도 명예가 될 수도 혹은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획자라면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가수가 이에 대해서 느끼지 못했다면 1차적으로 기획자 책임이다. 충분히 설명하고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탓이다. 

- 탁현민 공연에는 ‘긴급구호팀’이 있는 것 같다. 궁하면 부르는? 

윤도현 김C 강산에 이런 뮤지션들은 자신의 생각에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도 한번쯤은 나를 믿고 무대에 올라줄 수 있는 뮤지션들이다. 

- 평소에 의식 있는 듯 보였던 가수가 섭외를 거절하면 좀 섭섭하지 않나?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나는 윤도현이 왜 발언하는가를 묻기보다 드렁큰타이거 타블로 장기하 노브레인 크라잉넛이 왜 침묵하는지를 물으라고 하고 싶다. 이미지는 할말 다 하고 사는 것 같은데 아무말도 안 한다. 조금 불만이다. 

- 그들은 음악을 통해서 얘기하지 않나? 

‘소외된 모든 자들 왼발 한 발 앞으로’라고 말하면서 엠넷 뮤직비디오어워드에서?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 1주기 추모 공연 power to the people 2010 


서울 / 5월  8일(토)  
광주 / 5월  9일(일)  
대구 / 5월 15일(토) 
대전 / 5월 16일(일)  
부산 / 5월 23일(일) 

주요 출연진  : YB, 강산에, 이한철, 문명이야기, 
시민합창단, 프로젝트밴드 - 사람사는세상 -  
우리나라, 안치환, 두번째 달-바드-2피아, 윈드씨티

 

-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연을 계속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나? 조금 속된 말로 혼자 ‘독박을 쓰는 것’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든다. 한번 잘못 휘말려서 했으면 된 것 아닌가 하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1년 동안 연출하는 수많은 공연 중에 정말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공연,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를 가진 공연은 그런 공연이었다. 그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든 아니면 그것으로 끝이던 간에 나는 그때 너무나 행복했다. 그것이 이유다. 앞으로도 끊지 못할 것 같다. 저항을 담은 음악공연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 저항음악에 대한 어떤 로망이 있는 것 같다. 

좀 그렇긴 하다. 나는 음악도 1960년대 음악이 좋다. 왠지 인간적이고. 내 상상력의 원천이다. 신념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대중에게 음악으로 기쁨 주고 돈 버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문화가 단지 위로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상상하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물론 그 힘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에서 온다고 본다. 

- 로망을 쫓으면 돈이 안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래서 신념이 중요한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내 음악 좋아할 소수를 생각해야 한다. 대중음악도 예술인데 어떻게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나. 어떤 아티스트든 관객은 정해져 있다. 관건은 어떻게 그들을 결집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연도 사실 상업적으로 괜찮은 콘텐츠일 수 있다. 우드스탁을 보자. 사회적 의제를 내세운 지극히 이념적인 콘서트였지만 60만명이 모였다. 잘만 표현해내면 60만명이 모일 수 있는 것이다. 

- 얼마나 큰 장을 펼치고 싶나?

61만?

- 한국에서는 왜 그런 장이 안 설까? 

우드스탁을 어느 각도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위대한 음악페스티벌로 바라볼 수도 있겠고 히피들의 축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드스탁이 68혁명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판 우드스탁’을 표방하는 축제에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다. 아무런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목적도 없는데 무슨 우드스탁인가? 

- 다시, 왜 그런 무대를 꿈 꾸나? 

그냥 저항하고 싶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식으로든. 오늘 현실에서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부정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다. 그것이 나의 동력이다. 이걸 진보라고 부른다면 내가 진보인 것이고. 

- 그런 ‘꿈의 무대’를 연출해 놓고선 공연이 끝나면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그땐 모든 게 귀찮아진다. 공연은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라 일단 피곤하다. 공연 때는 흥분한 상태라 괜찮은데 공연이 끝나면 진이 빠진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기분이다. 공연 다음날은 하루 종일 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허탈하기도 하다. 자괴감도 들고. 공연 한 번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그런 공연으로나마 위로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 사장이 이렇게 몽상에 빠져있는데 회사는 어려움 없나? 

진보는 굶어죽는다라고들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 설립 3년차인데 굶지 않는다. 다음 달 월급 정도는 챙겨 놓았다. 한 달에 한 명씩 외국 연수를 보내주고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면 학비도 무상 융자해준다. 월차 연차는 꼭 쓰게 한다. 아예 지분도 똑같이 해서 사회주의적 기업으로 만들고 싶다.  

- 시민운동을 떠난 지 벌써 10년인데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시민단체 행사를 기획하면서 목표로 삼은 것은 돈이었다. 돈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돈에 가장 가까운 일을 했다. 그걸 하면서 내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삥 돌아서 다시 그 자리에 온 것 같다. 그 때 구상했던 것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선생님이나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님이 내가 이런 역할을 하도록 이끈 분들이다.  

- 대중문화계에 날선 비판을 많이 한다.

위기니까. 한국 대중문화는 산업적으로 위기다. 하이 리스크 노우 리턴이다. 콘텐츠 부족 인프라 부족 선정성 방송중심... 문제가 아닌 것이 없는 문제다. 논쟁을 해도 딱히 적이 없다. 상대방도 문제를 다 알기 때문이다. 다만 풀어나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실제 공연을 연출하면서 공연을 비판하고 방송 출연 연예인과 함께 하면서 방송을 비판하고 대중음악계 일원이면서 대중음악을 비판했다. 이율배반이었던 셈인데 알면 알수록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함께 작업하는 뮤지션도 그렇고, 전에 있었던 다음기획도 그렇고, 본인이 대중음악 주류의 일원이지 않나? 

내가 쓴 글의 반 이상은 방송 비판이다. 연예권력이라 할 수 있는 연예정보프로그램과 순위 프로그램에 대한 것이다. 방송 중심 구조의 폐해를 설명하고 주류기획사 비난했다. 주류 음악인 틈에 있어서 방송 구조를 잘 알아서 비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내부고발자’ 역할을 한 셈이다. 

- 비난을 많이 하는데, 비난을 받는 건 없나? 

없는 것 같다. 잘 나가야지, 돈을 많이 벌어야지 비난을 받는데 비판 받을 만한 위치에 오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그런 공연을 하고 돈을 남겨 먹었다면 말이 나왔을 것이다. 더 힘들어지기만 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는데 누구도 안 하려고 해서 했다. 다행히 그걸 뒤에서 비난하는 몰염치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 마지막 질문이다. 왜 저항하는가? 

문화라는 것은, 아니 대중문화라는 것은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과정이다. 20세기 음악의 시대를 연 두 주인공 재즈와 록큰롤을 보자. 재즈는 흑인 비주류 음악이었고 록큰롤은 틴에이저 음악이었다. 그런데 둘 다 주류가 되었다. 대중음악의 발전 과정은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하는 과정이다. 독립영화나 인디음악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걸그룹만 탐닉하면 그런 것이 안 나온다. 

주류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2002년 체험했다. 한국에서 록음악은 비주류였다. 블랙홀이 그랬고 백두산이 그랬다. 그런데 국내 굴지의 통신사가 윤도현을 선택했다. 윤도현이 월드컵 가수가 되는 과정은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과정이었다. 월드컵은 록을 필요로 했다. 댄스가수나 트로트가수도 모두 응원가를 만들었다. 분위기가 안 났다. 그러던 것이 유도현이 <오 필승 코리아>와 록 버전 <아리랑> 등으로 일거에 평정했다. 나는 그런 기적을 또 맛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