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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홍대앞 모습과 현재 모습을 비교하면?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7. 15.


이번주에 '홍대앞 문화'에 관한 기사를 취재 중입니다.
문득 5년 전 썼던 기사가 생각나 먼저 올립니다.
5년 후 변화한 모습은 다음주 시사IN 지면을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뉴욕엔 뉴요커, 파리엔 파리지앵, 홍대앞엔 홍당?  


10여 년 전인 1990년대 초, 홍대앞은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방배동 카페골목과 더불어 오렌지족 문화의 본산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문화지형도는 바뀌었다. 압구정동과 청담동이 여피의 공간으로 발전하는 동안 홍대앞은 히피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인디문화 1번지인 홍대앞에서 지난 10년 동안 인디 밴드와 힙합 그룹, 전자음악 DJ들이 ‘문화쓰나미’를 일으키며 유행을 주도해왔다.

홍대앞이 뉴욕의 소호나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문화예술인들의 양산박’이 되어 가는 데는 홍대 토박이들의 노력이 컸다. 주로 홍대 인근에 서식하며 의식주와 문화 생활, 혹은 데이트까지 홍대 인근에서 해결하며 홍대앞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는 이들, 지역 공무원을 스리슬쩍 구워삶아 각종 문화 이벤트를 여는 이 문화 낭인들에게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안상수 교수는 ‘홍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욕망에는 둔감하지만 취향에는 민감한, 가난해도 기상만은 추상 같았던 남산골 샌님처럼 가난하지만 스타일에서는 꼬장꼬장한 홍대앞 ‘홍당’들을 만나보았다. 홍대앞에 둥지를 틀고 홍대앞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홍당’으로 살아가는 가수 이상은씨, 지난 10여년 동안 홍대앞 문화를 주도했던 문화기획자 조윤석씨, 외국인의 시선으로 홍대앞을 관찰한 일본인 하세가와 씨를 만나 홍대앞 예찬론을 들어보았다.




문화기획자 조윤석
“365일 지속되는 지역 예술제 만들겠다”

 
85학번이니까, 홍대앞에서 생활한 지 벌써 20년째다. 그동안 이곳에서 숱한 일들을 벌였다. 구의회 활동도 하고 협동조합도 만들고, 정말 이곳에서 해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해봤다. 최근에 와서 드디어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고향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느날 문득 나를 보니 복길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홍대앞이라는 고향을 지키는 터주 대감 정도로 봐주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도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곳이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홍대앞은 다르다. 홍대앞은 서울의 두메다. 이곳에 둥지를 튼 토박이들이 경험과 추억이 공유되는 공간을 만들면서 고향을 만들어 냈다. 문화예술인들의 자치구 성격을 갖는 홍대앞에는 배려가 있다. 만나서 수다를 떨고, 그 수다가 사업이 되고, 그 사업이 인생이 되는 곳이 바로 홍대앞이다.
 
홍대앞은 인디 문화가 생성되기 전에 이미 취향 문화가 발달되었던 곳이다. 미술학원이 우후죽순으로 늘어 미술학원 강사를 하며 고소득을 올리는 젊은 대학생이 많아졌다. 이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취향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작업실을 중심으로 서로 어울리면서 문화를 만들어냈다. 남하고 다르게 하려 하고, 남보다 먼저 하려는 계층이 생겨났다. 1990년대 초·중반에 작업실에서 클럽으로 문화의 중심이 넘어가게 된다. 김형태씨 등이 만든 발전소·곰팡이·황금투구 같은 클럽이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홍대앞은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소비적인 곳이 아니다. 생산적인 곳이다. 이곳은 소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강남과 다르다. 내가 돈을 어디에 쓰느냐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몸으로든, 물감으로든, 소리로든 ‘내용을 만드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매주 일요일 홍대앞 놀이터에서 벌어지는 희망시장을 가보면 이들이 일과 놀이를 어떻게 일치시켜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내는지 확인할 수 있다. 

겉으로는 ‘홍당’들이 방탕해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리 방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방탕할 수가 없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면에서 홍대앞은 다소 촌스럽다. 익명성이 없다. 사생활 보장이 안 된다. 그 흔한 러브호텔이 홍대앞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이들의 삶이 나름으로 건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코드다. 서로 코드가 맞아야 한다. 여기에는 위 아래가 없다. 오히려 나이 먹은 게 잘못한 거다. 홍당 중에는 연예인도 있다. 이들이 연예인인지 홍당인지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누구를 사귀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연예인 같은 애인, 혹은 연예인과 사귈 것같이 생긴 애인을 사귀면 그건 연예인이다. 그렇지 않고 홍당과 말이 통하는 애인을 사귀면 그는 홍당이다.

앞으로 홍당들을 조직하는 작업을 더 할 생각이다. 지역 신문 혹은 지역 잡지를 만들려고 한다. 3백65일 지속되는 지역 예술제도 조직하고 있다. 이곳은 더욱 더 재미있어질 것이다. 월드컵 이후 사람들이 밖에서 나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홍대앞에도 돈이 돌기 시작했다. 슬슬 자본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가수 이상은
“여긴 두뇌 자극하는 재미난 학교다”

 
어려서 맛본 인기는 약이면서 독이었다. 20대 후반을 우울증으로 보내야만 했다. 5집 <공무도하가> 이후는 고행을 하며 보낸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주로 음악 활동을 했던 것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음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재일동포 저널리스트 강신자씨의 도움으로 구마모토라는 도시의 조그만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을 했는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 소리에 내 스스로 감동할 만큼 섬세하게 소리를 잡아주었고, 관객들이 그 소리에 성심성의껏 귀 기울여 주었다. 직감적으로 ‘여기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목적은 ‘음악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내가 다시 귀국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 바로 홍대앞이다. 홍대앞에는 내가 착지할 만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음악을 할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음악을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롤링홀이나 사운드홀릭, 쌈지스페이스 같은 곳은 가난한 인디 밴드들의 음악적 오아시스 노릇을 하고 있었다.

홍대앞에서 살기로 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 심지어 공무원도 마음에 든다. 문화 예술에 배려할 줄 안다. 열두 살 연하의 남자 친구를 만나 ‘기적의 시간’을 보낸 곳도 홍대앞이다. 여기서 살면서 나이 드는 것이 좋아졌고 철 들어가는 것이 좋아졌다. 음악도 밝아지기 시작했다.

12집 음반을 만들면서 주안점을 둔 것은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이 아니라 군더더기가 없는 음악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미니멀하게 음악을 해보고 싶었는데 홍대앞의 이미지와 맞았다. 어떤 면에서 홍대앞은 도회적인 면보다 시골스러운 풍모가 강하다. 홍대앞 놀이터는 특히 사랑하는 공간이다. 뭔가 허술해서 좋다. 허술한 사람들이 허술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게 좋다.

나는 홍대앞이 어른들을 위한 재미난 학교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흐뭇한 자극을 주는 ‘두뇌 자극소’다. 나는 강남과의 문화전쟁에서 홍대가 이겼다고 생각난다. 홍대앞은 문예적이다. 이쪽에서는 그쪽을 별 볼일 없게 보지만, 그쪽에서는 이쪽을 신비롭게 바라보고 있다. 12집 앨범 <로만토피아>는 나에게 이런 음악적 영감을 준 홍대앞에 바치는 헌시다. 내 취향에 안 맞는 곳,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곳도 많지만 그런 곳들도 나름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무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나무만 좀더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인 하세가와

“우린 대개 가난하지만 나름으로 사치스럽다”


신중현·산울림 등 한국의 록 가수를 좋아해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와서 허벅지밴드·황신혜밴드·델리스파이스·위퍼 등에서 활동했고 지금은 뜨거운감자 밴드에 속해 있다. 한국에 온 1997년부터 아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홍대앞에서 생활했다. 홍대앞은 여자 미술대학이 있는 도쿄의 고엔지 지역과 비슷하다. 아방가르드적이다.

홍대앞은 이태원과 함께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태원의 외국인과 홍대앞의 외국인은 다르다. 이태원의 외국인은 그냥 그곳이 편해서 찾는 반면 홍대앞의 외국인은 한국을 적극적으로 체험하려고 한다. 알렉이라는 미국인이 있다. 영어 강사인데 홍당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홍대앞의 외국인들은 한국말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도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술자리에서 한국말을 배웠다. 발치니오라는 브라질인과 친한데, 한국말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일본에 들어갔다가 홍대앞에 오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이상하다. 이곳은 산도 없고 물도 없고 나무도 거의 없다. 그런데 왠지 편하다. 오랜 친구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일부러 약속하지 않아도 어디를 가나 아는 사람이 있다. 역으로 여기를 벗어나면 불편하다. 여자 친구도 꼭 홍당을 사귄다. 홍당이 아니면 얘깃거리도 없고 얘기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홍당들의 특징은 돈이 있어도 있는 표를 내지 않고, 돈이 없어도 없는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어떤 차를 탈 것인가 하는 얘기는 여기서 들어 본 적이 없다. 무리에 한두 명은 꼭 빈대가 있는데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가난한 편인데, 나름으로 사치를 부린다. 자전거 사치, 커피 사치 등이 이들이 부리는 사치다.

내가 DJ로 일하는 가게에 한 여자애가 있는데 전형적인 홍당이다. 그녀는 귀차니스트다. 게으르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 싫은 사람과 싫은 것에는 꼭 티를 낸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아하지만 일부러 친해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돈은 없는데 외국 나가는 것은 좋아한다. 뭔가를 해보려고 하고 뭔가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홍당들이 서로 마주치는 시간은 오후이다. 외지 사람들이 몰리는 밤에는 홍당들은 나돌아다니지 않는다. 오후에 돌아다니면 늦잠 자고 일어나 어슬렁거리는 홍당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몇은 매우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 중 몇은 살짝 눈인사만 하고, 그 중 몇은 서로 마음으로만 인사한다. 서로 ‘밤새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다가 이제 일어나 머리를 식히는구나’ 하고 인정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