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평론가 김문성 님이
'판소리를 세계에 전한 파란눈의 외국인 이야기'를 시사IN에 기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면 사정상 원문 일부만 게재되었습니다.
원문 전문을 '독설닷컴'에 올립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국악 한류'가 있었다
글 - 김문성 (국악평론가)
호주의 재즈뮤지션 사이먼 바커가 한국사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소위 ‘듣보남’인 그로 인해 한동안 우리나라는 아니 전세계 문화예술계는 한국 굿음악 나아가 한국 전통음악을 화두로 많은 담론을 만들어 낼 것 같다.
우연히 접한 타악에 매료된 한 이방인이 자신의 영혼을 감동시킨 연주자를 찾아 멀리 이국땅을 헤매다 극적으로 상봉한다는 다소 신파조의, 흔해빠진 줄거리이지만, 추종의 대상이 ‘굿음악의 대가’라는 점에 다다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왜, 무엇 때문에? 즉흥성이 강한 음악 그리고 슬픔을 본질적으로 내재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재즈와 상당히 닮아있어 한번 듣게 되면 중독성이 생긴다는 굿음악.
하지만 난해한 음악적 구조와 복잡한 사설로 인해 쉽게 접근하기 힘든 너무도 낯선 가락이어서 이방인 바커의 여정과 결과에 자연스레 시선이 고정된다. 그리고 그의 드럼에 푸너리가락이 올곧이 배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궁(窮)하지 않으면 통(通)함이 결코 없는 그 어려운 무속음악 세계에서 오히려 바커는 우리보다 더 궁(窮)했기에 통(通)하여 달(達)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동해안 별신굿 음악의 대가였던 김석출 스타일의 타악에 매료된 외국인은 사이먼 바커가 처음은 아니다. 굿판에서 잔뼈가 좀 굵은 연구가들이라면 누구나 사이먼 밀즈를 기억할 것이다. 영국출신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첼리스트인 밀즈는 1997년 런던을 방문한 김석출의 굿장단에 매료되었고, 대학에서 틈틈이 사물놀이를 배웠다. 대학원생 신분이던 2000년 아예 짐을 싸들고 내한해, 6개월 이상 체류하면서 김석출에게서 푸너리 장단을 배웠다. 마치 김석출 일행인 듯 동해안 일대의 굿판을 헤집고 다닌 밀즈의 별신굿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해박했으며, 제마수, 청보, 쪼시개, 덩덕궁이를 줄줄이 설명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밀즈가 잊혀진 것은 바커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클래식 전공을 포기하고 런던대학원에서 한국음악을 전공하던 재즈매니아 밀즈는 ‘굿음악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퓨전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신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재즈나 다른 음악적 프로세스를 통해 굿음악을 녹여낼 가능성이 많았음에도 그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 영국 전통악기 백파이프에도 뛰어난 소질을 지녔던 밀즈는 ‘전통음악은 그 자리에서 감상할 때 가장 아름다우며 전통악기 그 자체를 존중할 줄 알아야 음악이 음악다워진다. 음악을 섞는 것은 오만한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신념이 그로 하여금 연구이상의 선을 넘지 않게 했다. 대신 그는 글로서 무속음악을 기록하였고, 이를 영국에 소개했다.
“여기 이십세기에 우리가 위대한 천재 하나를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이때 우리는 이사람을 침묵의 오솔길에 있는 무덤에 가게 두어야만 하다니. 누구의 실수인가? 일부는 성미급한 임씨(임방울)가 학생들을 무서워 달아나게 하고 방송국에서 대중의 분노를 불러낸데 원인도 있다. 그러나 책임의 대부분은 냉담과 무관심을 지킨 한국인 자신에 지워야 하는 것이다. (중략) 어찌하여 상류가정의 소년, 소녀들에게 서양고전음악을 가르치려고 하면서 국악은 가르치지 않으려할까?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뿐 아니라 이나라를 위한 국악에 대한 관념을 지키기도 위험한 짓이다...”
임방울이 타계하자 그를 ‘드물고 유일한 꽃’으로 비유하며, 국악천시풍조가 강한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기고문을 작성한 이는 다름아닌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앨런 헤이먼이었다.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헤이먼은 한국전쟁 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임방울 판소리 음반을 듣고는 매료돼 국악에 빠졌다. 1957년 미국으로 일시 귀환했다가 1959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헤이먼은 임방울에게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시조, 민요, 기악등에도 출중한 솜씨를 보였다. 국악예술학교 첫 외국인 강사 타이틀을 갖고 있는 헤이먼은 이후 명지대, 홍익대 영어강사로 있으면서 한국인과 결혼해 해의만(海義滿)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갖기도 했다. 영화음악작곡가로도 활동해 영화 ‘한라산’의 주제가로 1964년 청룡상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헤이먼은 한국국악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 여럿을 세웠다. 우선 국악이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접고 서구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를 직접 마련하였다. 미주아시아협회를 통해 국악단의 미국공연을 주선했고, 그 덕에 1964년 삼천리가무단이 뉴욕의 링컨센터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삼천리가무단의 성공은 아리랑가무단의 창설로 이어졌고, 이듬해 아리랑가무단은 구미에서 ‘센세이셔널’을 만들어내며 한국 전통음악의 해외공연 물꼬를 텄다.
또한 1964년 헤이먼은 영국 에든버러대학 민속학자 존리비가 한국을 방문해 김소희, 김옥심, 이정열 등 당대 최고 명창들의 소리를 녹음할 수 있도록 역할했다. 우리음악이 세계인의 눈과 귀를 잡아매기까지 바로 임방울의 소리에 영혼이 팔린 한 외국인 영어강사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존리비가 한국 음악에 대한 열정보다는 민속학적 연구를 위해 내한한 학자인데 비해, CEO였던 게러스 드 브룬은 한국의 전통음악이 상품화가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실행에 옮긴 이방인이었다. 한국언론인과의 친분으로 국악을 접한 뒤 특히 정악의 묘음에 매료된 브룬은 아일랜드 클라다 레코드 사장이었으며, 1976년 한국에 체류하면서 황병기, 김옥심, 안향련, 이은주, 이은관과 교류하고 그들의 소리를 녹음했다. 헤이먼이나 밀즈처럼 음악을 배우는 대신 음반제작을 통해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리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국악이 변방의 음악에서 세계무대에 당당히 합류하게 된 데에는 아렌 호바네스 부부의 역할이 컸다. 한국음악의 흐름을 ‘베토벤 말기 현악4중주곡’에 비유하기도 했던 호바네스는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을 졸업했으며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일본에 체류하면서 동양음악을 연구하던 1963년 한국을 찾게 된다. 피리명인 김태섭에게서 피리를 사사받은 그는 아악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이주환의 정가를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라고 했다. 판소리를 ‘호머의 서사시 한국판’이라고 말하고, 아악을 ‘세계에서 가장 표출적이고 숭엄하면서도 자유스러운 음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가야금과 서양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16번’은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접목한 첫 외국작곡가의 작품이다. 그의 부인 호바네스 역시 김천흥에게 해금을 사사한 피아니스트로 하와이 할라함무용연구소장인 교포 할라함의 무용곡을 작곡하면서 전통음악에 빠져, 남편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기악을 배우게 된 것이 결국 아렌 호바네스의 방문과 ‘교향곡 제 16번’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새당악 ‘무궁화’와 ‘타령’, ‘영산회상’을 작곡한 루해리슨 역시 한국과 전통음악을 전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미국현대음악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그는 한국방송협회(KBC)에서 제작한 음반 ‘한국아악’에 매료되었고, 1961년 동남아 방문을 갑작스레 취소하고 대신 한국행을 택했다. 국악원에서 아악을 두달간 배운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만든 곡이 ‘무궁화’이다. 이 곡은 서울대음악연주실낙성기념연주회 때 서울대 국악과 학생들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서울대 국악과가 창작국악 중심으로 정립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지한음파(知韓音派)로서 이후 한국음악을 미국에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수 십년동안 국악은 서양인들의 심장을 데우고 눈귀를 즐겁게 하며 그들을 우리음악 세계로 자연스레 끌여들였고, 그것을 계기로 다시 우리음악이 세계로 나아가는 전기를 마련했다. 파란눈의 이방인들은 전통음악을 통해 인생전환의 계기를 마련했고, 자신들이 구축했던 오리엔털리즘을 스스로 극복하며 그 자리를 한국음악으로 채웠다. 그리고 그 음악이 세계의 주류음악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향성을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러한 이방인들의 여정이 잠시 주춤하다가 사이먼 바커를 계기로 다시 활성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바커가 헤이먼처럼 ‘반은 한국인’이 되어 한국음악 특사로 역할할지, 루해리슨처럼 지한음파(知韓音派)로서 역할할지 아니면 밀즈처럼 잠깐 반짝하다 사라지는 음악가가 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조차 등한시 하는 전통음악의 참가치를 제대로 향유하는 이방인이 우리음악을 자신의 음악에 녹여내 연주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도 고 김석출 선생에게 ‘땡큐’란 말을 전하고 싶다.
‘땡큐 미스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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