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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재개발 사업이 가져올 재앙 미리 맛본 연천댐 수해민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9. 26.


태풍 곤파스 피해에 이어 추석 폭우 피해까지...
MB정부가 물의 마력에 무신경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연거푸 벌어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래부터 물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현대건설 사장 시절 각서까지 쓰며 만들었던 연천댐은 두 번이나 무너졌습니다.
(두번 째 댐은 그가 사장에서 물러난 뒤 건설되었습니다.)
10년 전 그 지역을 둘러보고 쓴 르포기사입니다.
요즘 수재민들을 보면서 그때 그 희망 잃은 연천주민들이 생각나서 올립니다.





경기도 연천군 고문리 재인폭포에는 코문이의 전설이 있다. 고을에 새로 취임한 원님이 한 남사당패 광대의 부인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녀를 가로채려고 광대를 죽이고 수청들게 하자 그 부인이 원님의 코를 물어버렸다는 것이다.


연천군수해대책위원회 이선걸 위원장(57)은 관의 횡포에 대한 민의 저항을 보여주는 이 전설의 현대적 모델이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가 지은 댐이 두 번씩이나 연거푸 무너지게 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밝혀내기 위해 그는 생업도 제쳐놓고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


연천댐 건설과 붕괴 과정을 역추적하면서 그는 수없이 분노했다. 알면 알수록 화가 나는 일이 많았다. 호우주의보와 호우경보가 발령되었는데도 상업 발전을 위해 저수량 유지에만 급급했던 현대건설,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를 위해 공직을 사퇴해야 하는 시점 바로 전에 댐 재건설을 허가한 연천 군수, 붕괴된 댐을 정밀 안전관리 검사 대상에서 제외해 준 건설교통부의 행태에 그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를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수해의 원인이 댐에 있지 않고 집중 호우에 있다'며 현대건설에 면죄부를 준 대한토목학회의 '연천 홍수 피해 원인 및 영향조사연구' 보고서였다. 몇 년 동안 수리·수문학을 직접 연구한 그는 "토목학회가 현대건설이 제공한 잘못된 자료를 검증 없이 참고했다. 이는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행위이다. 이런 잘못을 지적하는 의식 있는 교수가 나오기 바란다"라며 토목학회를 비난했다.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에서 철제 전기배전함을 제작하고 있는 김덕경씨(49)는 비가 오면 일을 멈춘다. 그리고 서둘러 제품과 기계를 컨테이너에 집어넣는다. 공장이 옥외에 있어서 그와 하늘 사이에 비를 막아줄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공장이라기보다는 쓰레기 하치장에 가까운 그곳에서 그는 영하의 날씨에 칼바람을 맞으며 물건을 만들고 있다. 프레스와 드릴 등으로 판금 제품을 만드는 그의 공장에는 농사를 짓던 아주머니 두 사람만이 함께 일하고 있다.


김씨의 옥외 공장 바로 옆에는 그가 1994년에 5억원을 들여 지은 공장이 있다. 그는 그 공장에서 스무 명이 넘는 직원을 데리고 일했었다. 그 공장이 1996년과 1999년에 연천댐이 붕괴해 침수하는 바람에 그는 부도를 냈고, 공장은 경매로 남의 손에 넘어갔다.



공장 침수해도 보상금 한푼 못받아


수해로 10억2천만원(1996년 3억6천만원, 1999년 6억6천만원)의 피해를 당한 그가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생수 3통, 라면 4상자, 쌀 40kg, 고추장 한 종지뿐이었다. 수해로 모든 것을 다 털리고 2억5천만원 빚을 졌지만 공장에 대해서는 피해보상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단돈 1원도 보상받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비를 피할 만한 공장 부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계속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공장에 쌓여 있는 2억원어치 재고품은 녹이 슬어 고철덩어리가 된 지 오래이고, 1억5천만원어치 금형과 1억원어치 기계 설비도 녹슬고 있다. 연체 이자를 내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등록되어 있는 그는 돈을 구할 방법이 없다.


지난해 또다시 수해를 당했을 때 그는 심한 좌절감에 자살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르고 남은 기계를 가지고 공장 바로 앞 공터에 옥외 공장을 차렸다. 다행히 그를 믿은 채권자들이 기계를 압류하지 않고 채무를 연장해 주어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채권자들이 김씨가 개발한 '지그'라는 금형 기계로 제품을 만들 경우 다른 업체보다 40% 정도 싸게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조건이기는 하지만 자기 사업을 다시 일으킨 김씨는 다른 수재민에 비하면 그래도 행복한 축이다. 두 번의 수재와 그에 따른 경기 침체로 지역 경제가 완전히 무너진 청산면 백의리 주민에게는 조그만 희망도 남지 않았다.


문산에서 철원을 잇는 37번 국도 중간에 있는 백의리는 원래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1960년대 후반 이곳에 주둔했던 미군 7사단이 철수하자 그 자리에 한국군 사단사령부가 들어섰다.그러자 백의리는 기지촌에서 한국군을 상대로 한 상업지구로 탈바꿈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때 연천댐 건설해


1985년 현대건설이 상업용 발전 댐인 연천댐을 완공한 이후로 여러 번 침수되었던 백의리는 댐을 만들 때 담수 지역으로 거론되었던 곳이다. 댐에서 3.8km 상류에 위치한 백의리가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았기 때문이다.


지대가 낮아서 1996년과 1999년 댐이 무너졌을 때 백의리는 상류 지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급물살에 집이 떠내려 갈 정도였다. 수해는 단순히 물이 차고 빠지면서 가재도구가 못쓰게 되는 것 이상이었다. 물질적 손실도 많았지만 연속된 수해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이 컸다. 절망감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고, 충격으로 주저앉았다가 다시 걷지 못하고 끝내 휠체어에 의지해서 생활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살림살이를 수마에 빼앗긴 여자 중에는 비만 오면 광주리에 이것저것을 마구 담아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지역 경제 파탄은 정신적 후유증보다 더 지독했다. 수해를 당한 지 17개월이 지난 지금 백의리의 지역 경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수해 복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서 지역 상권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1996년 수해를 당했을 때 주민은 복구를 위해 빚을 많이 졌다. 그런데 빚을 채 갚기도 전인 1999년 다시 수해를 입자 주민들은 완전히 경제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은 복구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집도 망가진 대로 놓아두고 가게도 수리하지 않고 방치했다.


그러자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상권이 무너지자 이곳을 찾던 군인의 발길도 뜸해진 것이다. 12월은 원래 부대 연말 회식이 많아 단체 손님이 많은 달이었다. 하지만 수해가 난 후로 군인들은 마을을 코앞에 두고도 인근의 전곡읍 등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붕이 날아가고 빈터에 잡초만 무성한 동네가 회식 장소로 적합할 리 없었다.
경기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자 무리해서 빚을 내 수해를 복구했던 김종윤씨(67) 같은 사람은 손님이 없어 빌린 돈의 이자도 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지역 경제 파탄에 가정 파탄, 그리고 인간성 파탄까지

침체가 계속되면서 그나마 있던 가게들도 문을 닫았다. 문방구·오락실·비디오 가게·세탁소·소주방·호프집·다방·노래방은 완전히 구조 조정되었다. 마을의 가게 중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이 절반도 채 안 되었다. 그나마 손님도 거의 없어서 매상이 형편없었다. 마을 전체를 통틀어서 제대로 영업을 하는 곳은 박찬규씨(44)가 운영하는 중국집뿐이었다. 그는 동네에서 우스개로 박재벌이라 불린다.


수해가 났을 때 정부는 백의리에 가옥 복구비와 수리비를 지원했다. 완전 파괴된 가옥에 대해서는 5백40만원을, 반쯤 파괴된 가옥에 대해서는 2백70만원을 지급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집 수리와 재건축을 하지 못했다. 정부 지원금만으로 집을 새로 짓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융자를 더 얻어야 했지만 그들에게는 돈을 빌릴 여력이 없었다. 1996년 수해 때 빌린 돈의 이자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었거나 이미 집이 담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빚을 더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막에서 임시로 기거하던 주민들은 집수리나 건축을 포기하고 컨테이너 를 하나씩 구입했다. 집을 다시 지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2백만원짜리 컨테이너는 안성맞춤이었다. 수해 피해가 있고 난 후 컨테이너 집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경제가 무너지면서 덩달아 가정도 무너지는 경우가 속출했다. 가정 불화로 부부 싸움을 하는 집,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식구가 가출하는 집이 많아졌다. 수해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을 서로 원망하며 부부싸움을 하던 한 주민은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질러 자살하기도 했다.


퇴직금으로 식당을 열었다가 수해로 모든 것을 다 날린 한 퇴역 군인은 부인마저 집을 나가자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그의 두 아이는 구걸로 연명하고 있다. 한 주민은 그런 아이들이 더 있다며 "부모가 모두 집을 나가 밥을 굶는 아이들이 많은데 방학이 시작되면 학교 급식마저 못 얻어먹게 생겼다"라고 걱정했다. 그는 "수해가 났을 때는 물 반, 기자 반이더니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라며 소외감을 표현했다.


백의리에서는 소주가 수면제로 통한다. 너무나 마음이 답답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량한 동네에 술병만 넘쳐난다. 슬픈 사실은,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그 소주병을 모아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손자가 빚을 지고 집을 나간 후 증손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서 아무개씨(86)는 푼돈이나마 벌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동네를 돌며 소주병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