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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행복한 책꽂이

백년 동안의 충절, 손자가 정리하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0. 11. 18.

언론인권재단 안병찬 이사장님은 영원한 현역 기자입니다. 
월남전 마지막 종군기자로 철수하는 미군 군함 위에서 마지막 기사를 송고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사저널 때 고문으로 모셨습니다.
제작년에 '안병찬의 기자질 46년'이라는 블로그를 만드시기도 했는데, 
간혹 시사IN에 기고를 하기도 하십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만, 노기자는 죽지 않고 기록합니다. 
안 이사장님이 필생의 역작을 내놓으셨습니다. 
바로 조부인 안숙 선생의 한문 일기를 한글본으로 펴낸 것입니다. 
안숙 선생은 경술국치 때 자결하신 분입니다. 
자결 100년 만에 손자에 의해서 그 뜻이 전해지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성균관 직강(直講:정5품 벼슬)을 지낸 선비 위당 안숙 선생(1863~1910)이 민영환 선생의 자결 소식을 듣고 지은 비장한 ‘절명시’이다. 절친했던 민 선생의 자결을 정몽주의 비극에 비겨 시를 지었던 그는 자신도 5년 뒤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괴산 오랑강에 투신했다.  


선생이 자결한 지 꼭 100년이 되는 지난 11월1일, 손자인 안병찬 언론인권재단 이사장(73·사진)이 조부의 유고를 한글로 완역해 출판하고 기념회를 열었다. 이로써 그가 몸을 던져 구하고자 했던 나라, 그가 이루고자 했던 아름다운 나라의 구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00년 동안 옥고가 묻혔던 사연은 이렇다. 위당 선생이 순국할 당시 장남 안태식(1897~ 1976)은 고작 13세였다. 7년 후 어머니마저 여읜 탓에 6남매의 가장이 되어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했다.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전수받은 그는 만년에 보관하고 있던 부친의 시문을 묶어 유고집을 냈다. 그리고 19일 뒤 타계했다. 


숙제는 손자인 3남 안민식의 아들 안 이사장에게 넘어갔다. 안 이사장은 <위당 유고>를 바탕으로 조부의 애국 행적을 밝혀내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고 위당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했다. 그리고 자결 100년 만에 선생의 유고를 한글로 완역해 그 뜻을 후세에 전했다.


주> 다음은 안병찬 이사장님이 본인 저서에 서문으로 쓰신 자신의 가상 '부고기사'입니다. 
자신의 죽음마저도 기록하고 싶은 노 저널리스트의 로망이 담겨 있는 재밌는 글이어서 첨부합니다. 





발칙한 꽁트, [나의 사망기사]

표제 : 눈사람(雪人) 되다 


현역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인 안병찬 언론학 박사가 2008년 10월 4일 생일날 몽골-알타이산맥 최고봉인 몽하이르한울(해발 4362m) 8부 능선을 넘은 직후 조난하여 불귀의 몸이 되었다. 나이 71세.

몽골의 산악수색대가 동사한 그와 안내인 돌고르 그리고 몽골 말 한 마리를 발견하는 데는 이틀이 걸렸다. 
그의 최후 모습은 극적이었다. 눈사람(雪人)이 되어 서있었다. 휘몰아치는 풍설 속에 저승사자를 뿌리치며 몽골 안내인을 구하려고 애 쓴 듯 그 어깨를 움켜잡은 채 동작을 정지하고 있었다. 표정은 마침내 아늑한 곳에 대피한 양 지극히 평온했다. 그도 죽는가하여 많은 사람이 무상을 실감했다. 그는 이중 인간이었다. 생전에 딱딱하지만 열린 사람, 도발적이지만 유연한 존재라는 평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는 자기 성미대로 종말 여정조차 현장 기록으로 남겼다. 취재수첩의 말미는 두 줄의 최후 상황으로 끝난다. 

“아! 몹시 졸리다……안내인은 이미 잠들다……. 그 사람 얼굴이 보인다, 여섯 사람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오후 6시 12분……” 

이 시대 최초 유일한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했던 그는 르포르타주 심포니의 마지막 몇 분을 장중하게 연주하지 못하고 인생을 미완성으로 마감했다. 

당초 그는 종족의 근원지라는 몽골-알타이산맥과 고비-알타이산맥을 시계방향으로 돌며 큰 원을 그려 보겠다고 했다. 취재수첩에 따르면 그가 악전고투하며 최고봉의 능선을 넘은 것은 생일 하루 전 하오 4시20분께. 캄캄한 밤이 되자 북방의 깊고 높은 산맥지대에 체감온도 영하 40도의 강풍설이 엄습한다. 그 속에서 그는 시각마다 한 거름 두 거름 ‘불귀의 기록’을 남기는 강기(剛氣)를 발휘한 것이다. 

어린 시절, 소년 안병찬은 말을 달려 중원의 드넓은 초지를 가로지르는 올곧은 용장 한 사람을 선망했다. 중학교 한문선생님은 중국 『삼국지』의 ‘장판파’ 전투에서 상산 조자룡이 촉나라 유비의 아들 유선을 갑옷 속에 품고 호왈백만 조조 군단 한 가운데를 필마단창으로 짓무찔러 열고 나가는 대목을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조조가 경산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마치 무인지경을 가듯이 자기 진지를 걷어차며 달리는 대담무쌍한 자가 있다. 조조의 명령에 맹장 조홍이 말을 몰아 산을 내려가 앞질러 나가서, “야, 적장 존함이 무엇이오?”하고 묻는다. 조자룡이 청공의 검을 고쳐 잡으며 “이 사람은 상산 조자룡. 네가 감히 앞질러 막으려는가.”하고 눈을 부릅뜨자, 조홍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뛰어 올라가 조조에게 복명하니, 조조는 무릎을 탁 치며 말한다. “만일 조자룡을 얻어 내 진중에 둘 수 있다면 한이 없겠구나!”  

안병찬은 태양이 강렬하게 빛나는 열사로 날아가고 싶어 했다. 영국 감독 데이비드 린이 찍은 <아라비아의 로렌스>, 작렬하는 사막을 눈부시게 그려낸 영화의 미학으로 그는 사막이 살아 숨 쉰다고 느꼈다. 역시 영국 감독인 안소니 밍겔라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만들어낸 영상은 풍미가 또 달랐다. 쌍엽기가 사막 위를 날아갈 때, 황혼 아래 펼쳐지는 사막은 사랑과 절망을 반사하며 끝없이 물결친다. 대조적인 두 장면은 그로 하여금 사막의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했고 동시에 그의 야성을 충동했다. 

청년기에 그는 프랑스 작가 두 사람의 작품에 주목한다.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은 1927년 상하이의 4․12 쿠데타를 무대로 한 중국 혁명의 에피소드를 소설화한 것이다. 혁명이라는 숨 가쁜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조건을 발견하는 한 청년의 생생한 체험과 피 어린 기록이다. 안병찬은 행동주의 휴머니즘이 발휘하는 능동의 정신이 인간을 불안에서 건져내는 횃불이 됨을 본다. 

그는 앙트완 생텍쥐페리가 행동을 통한 명상 속에서 시적 언어로 써낸  『인간의 대지』에서 ‘성실한 용기’를 읽는다. 생텍쥐페리는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모래밭 한 가운데 큰 대자로 누워 바람과 모래와 별을 극채색으로 그린다. 그는 칠레 우편비행을 감행하다가 안데스산맥 고산에서 조난하여 눈과 얼음, 추위와 절벽 속에 5일간 사투한 끝에 생환한 친구 앙리 기요메의 극기적인 행동이 얼마나 성실한 것인가 증언한다. 생텍쥐페리는 역경과의 싸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 극기적인 행동을 서정적 필치로 묘사해 낸 행동적 휴머니즘의 독창적인 르포르타주 작가다. 

그는 두 작품을 통해 행동주의 휴머니즘에 근거하여 단순한 사실주의를 지양(止揚)하고 문학성과 역사성에 도달하려는 르포르타주 형식에 눈 떴으나, 그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서 붙잡으려한 사막의 신기루였다. 

베트남 통일 결정전의 시기에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마지막 날까지 남부 베트남 수도 사이공에 남아서 숨 가쁘고 절박한 순간순간들을 체험하며 기록했다. 그가 생환한 뒤 처음으로 르포르타주 형식을 빌어서 실험한 작품이 ‘사이공 최후의 새벽’(1975년 판)이다. 

그런데, 1988년에 그가 접한 이태의 ‘남부군’은 “그 분식(粉飾) 없는 적나라하고 치열한 사실의 기록”으로 가장 역사에 근접한 르포르타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증보하여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행하는 르포르타주를 시도한 결과물은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2005년 판)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몽골 말을 타고 고비사막의 드넓은 모래와 초지를 관통하여 만년설이 덮은 고비-알타이 및 몽골-알타이 산맥의 준봉과 폭풍설에 맞서는 최 고난도의 고행을 선택했을까. 그는 세 가지 주제 즉 올곧은 인간의 풍모, 사막과 바람과 별의 서사, 행동주의 휴머니즘의 르포르타주를 알타이 최후 노정에 혼입했다. 짐작컨대 그는 탐험과 고행을 통해 인간의 고향을 찾는 삶의 대장정을 실천하고자 한 것일 테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가 ‘기획 여행’으로 행로를 잡았을 것이라는 가정에 동의한다. 인간사의 종착역 같은 것은 생각하기 싫다면서 활시위의 팽팽한 긴장을 사뭇 붙잡으려고 한 그, 그러나 최후의 선택은 자기 고집대로 가슴을 펴고 떳떳 당당하게 운명의 끝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현장 체험을 거쳐 인간사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그토록 애쓰던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안병찬은 바람과 별 속에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바니스트가 되어, 장장 3000리의 알타이 장정에 올라, 자기한테 남은 최후의 에너지를 불사르며 스스로에게 쿠드그라스(coup de grace), 자비로운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안병찬-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의 탐험》, 커뮤니케이션북스 기획 ‘한국의 저널리스트’ 시리즈 중,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