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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의 작가 박범신, "이적요는 세 번 굴욕 당했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2. 6. 21.



사형장에서 가장 당황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사형장의 분위기를 조용히 이끄는 사람은 누굴까? 뜻밖에도 사형수라고 한다. 사형수가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자신의 죽음을 편안하게 이끈다고 한다. 왜? 그들 중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사형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없이 자신의 죽음을 그리고, 죽음에 대비한 사형수만이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박범신(66)에게 소설 <은교>는 사형수에게 다가온 사형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사형처럼 다가온 늙음에 대해 성찰하고 받아들이게 만들어주었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 이것이 가능하냐 그렇지 않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통해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작가에게는 더 중요했다.


2년 전 출간된 <은교>가 영화화되면서 다시 화제다. 베스트셀러 순위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1980년대 전성기 때 자신의 소설이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을 숱하게 지켜보았던 작가는 이번 영화를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다행히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은교>가 다시 화제가 된 지금, 작가 박범신씨를 만나보았다. 






많은 독자들이 주인공 ‘이적요’에게서 박범신을 읽는다. 늙음은 본인에게 어떤 것이었나?  

내가 50대에서 60대를 넘어오면서 파우스트처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젊음을 살 수 있다면 사고 싶었다. 내 모든 소설을 불태워 젊음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늙어가는 슬픔은 혹독했다. 작가라 더 예민해서 그런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시간은 사고를 깊이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훼손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늙음을 다루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늙음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이적요’(주인공 이름)는 두 번의 굴욕을 겪었다. 한 번은 출판사에서. 한 번은 영화사에서. 애초 블로그에 <살인 당나귀>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때는 이적요의 나이가 77세였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은교>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때 주인공의 나이가 많다고 60대 중반으로 하자고 요구했다. 그래서 따졌다. 주인공 나이가 많다고 소설이 안 팔리는 게 좋은 나라냐? 일흔은 걸쳐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겨우 70세를 관철했다. 영화화할 때는 늙은 배우가 주연을 하면 임팩트가 없다며, 그래서 젊은 관객이 안 온다며 젊은 배우를 캐스팅했다.


‘70대 노인과 10대 소녀의 사랑’은 어찌되었건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적 사랑 아닌가? 

이적요에 대해서 ‘노욕’이라는 표현을 쓴 글을 보았다. 아름다운 것을 끌어안고 싶은 심리는 그냥 욕망이다. ‘노욕’이라는 말은 용어 자체가 이미 가치판단을 내린 것이다. 노인은 욕망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은 폭력적 시선이다. 늙은이는 왜 욕망을 갑옷 속에 숨기고 살아야 하나? 욕망은 나이가 없다.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아름다움에 홀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욕망이다. 


스스로에게 이 소설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1993년 절필했다가 1996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를 평론가들이 ‘갈망기’라고 하던데, 마지막 갈망에 대해 말한 것 같다. 죽음을 넘어서고 싶은 불멸에 대한 갈망에 관해 쓴 <은교>는 갈망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소설이다. 늙어감을 가장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육체다. 아프고 죽어가고 삶의 유한성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육체인데, 내 안의 동물을 다 끌어내어 육체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정말 폭풍같이 썼다. 이 소설을 쓰고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고통스럽지 않게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늙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가?

삶의 유한성에는 ‘쫄지 마 씨바’가 없다. 다 쫄아야 한다. 이 소설로 많이 극복했다. 내 안의 응어리를 풀어낸 것 같다.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적으로서의 죽음이 친구로서의 죽음이 되었다. 죽음의 눈알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죽음에 매달리거나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내 안에 끌어들여 다룰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죽음에 대해 트레이닝이 된 것이다. 나에게 이 소설은 살풀이요 굿이다. 





죽어가는 이적요에게 은교는 어떤 존재인가?

영숙이나 영자가 아닌, 여자로 생각하지 않게 하는 중성적인 느낌이어서 ‘은교’라고 이름 지었다. 은교는 롤리타와 다르다. 은교는 열일곱이 아니라 스물다섯이어도 되고, 서른이어도 된다.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중요치 않다. 열망하는 절대적인 존재다.


소설 <은교>에서는 장르문학 작가인 서지우를 통해 문단 내부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문단의 육두품이나 마찬가지인 장르문학 작가들을 통해 문화 권력에 대해서도 환기시켰다. 

이 소설은 단지 섹스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본능의 지퍼를 열어 보이는 작품이다. 지퍼 속에 페니스를 감추고 없는 듯이 행동하는 지식인 사회를 건드리고 싶었다. 문단 내부의 문화 권력의 구조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 허상과도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것은 명분과 본성이 매우 잘 짜인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 지성계는 앞에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뒤로는 과실을 따먹는다. 겉으로 드는 깃발과 속내가 다르다. 지식인 사회는 본능의 카르텔이다.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한국방송공사 이사 등을 지낸 본인도 문단의 주류 아닌가?

나는 아웃사이더다. 한번도 주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좋은 대학도 못 나왔고 창비파(창작과비평)도 아니고 문지파(문학과지성)도 아니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어딘가 소속되고 보호받으면 편했겠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는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독자는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이다. 문학의 제단에서 나는 소녀처럼 문학순정주의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특정 문단에 속하지 않아 혹시 손해를 본 적이 있었나?

나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 나는 독자에게는 찬미의 미사를 받았지만 지식인 사회에서는 인민재판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나는 양쪽으로 치였다. 정치적 억압과 함께 민족문학 진영의 억압도 받았다.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런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결국 믿을 것은 텍스트의 힘밖에 없었다. 정파 권력에 기대어 일시적인 성공을 맛볼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평가는 결국 텍스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회적 발언은 소설을 통해서만 하기로 했다.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지 악을 써봐야 통하지도 않는다. 


과거 얘기를 듣다보니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이상하게 상처에 대한 내공은 쌓이지 않는다. 아직도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예술가로서는 축복이지만 개인으로서는 고통이다.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수 있었던 것은 존재에 대한 연민 때문 아니었겠나? 요즘은 트위터 멘션에도 상처를 받는다. 왜 나는 둔해지지 않을까, 둔해지면 내가 편할 텐데. 글을 안 써도 좋으니까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상처가 문학의 거름이 되지 않나? 

나는 살려고 소설을 쓴다. 안 쓰면 우울증이 온다. 내 안의 짐승이 소설을 안 쓰면 생살을 뚫고 나왔다. 내 안에 있는 짐승에게 안 잡아먹히려고 소설을 썼다.  






영화 <은교>는 어땠나? 

예고편을 보고 좀 두렵기도 했다. 이거 노인 포르노가 나오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안심했다. 원작의 주제의식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영화화했다고 본다. 존재론적 주제를 담은 한국 영화가 별로 없다.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다. 


영화를 여러 번 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불편하고 불행한 관객이었다. 이적요에게 감정이입도 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동료 문인들과 보았는데 그들이 어떻게 볼지에 관심이 쏠렸다. 고향 논산에서 세 번째 보았을 때 비로소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여러 번 울었다.


아쉬운 점은 없었나?

주인공 이적요의 영화라기보다 은교의 영화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늙어가는 슬픔에 대해 주목해주기를 바랐는데…. 원작에 좀 짓눌린 느낌도 있다. 더 무시하고 더 해체하고 더 까발리고 그래서 원작을 넘어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나? 특히 이적요 역을 맡은 박해일은?

처음에 감독이 박해일을 소개할 때 서지우로 쓸 줄 알았다. 박해일이 연기를 못한 것은 아니지만 노인이 아닌 사람이 노인 연기를 하니까 노인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어색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처럼 보이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옷 밖의 젊음은 숨길 순 있어도 옷 안의 젊음은 숨길 수 없다. 사람들은 그 옷 안에 젊은 육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사람들은 옷 안의 글래머를 느낀다.


그렇다면 누가 이적요로 적합했을 것 같은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이적요인 배우를 찾았어야 했다. 그러나 자기 카리스마를 유지하면서 이런 문학적 영화를 감당할 만한 나이 든 배우가 많지 않다. 김갑수와 박근형 정도가 떠올랐다. 해외 배우로는 <데미지>의 제러미 아이언스가 어떨까 싶다.


은교 역의 김고은은 어땠나?

참 잘 찾았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순수 자연미인인 얼굴, 순정에 투신할 수 있는 인물, 자본주의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 자기가 좋으면 나이·스펙·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투신할 수 있는 인물이 은교인데 근접했다.


영화 덕에 소설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한국의 독자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은교>는 깊은 주제의식과 서사의 힘이 있는 좋은 소설이다. 그런데 영화화가 안 되었을 때는 독자가 안 찾고 영화화되어 독자가 찾는다는 것이 씁쓸했다. 독자들에 대한 섭섭함이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도 하고 블로그를 통해서도 젊은 독자들과 소통한다.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밝은가. 나도 젊었을 때는 그렇게 밝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 밝음을 보지 못하고 어두움만 보고 살았다. 왜 그렇게 죽음만을 생각했는지….


다음 문학적 행로는 어디인가? 

지금은 수상한 과도기다. 근원에 대한 갈망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발언할 것이 없다. ‘갈망기’가 끝난 후 좌초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한 시대가 끝나고 한 시대가 열리는데…. 어떤 시대가 열릴지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