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의 마지막 모습은 어땠을까?
고종 무능론과 고종 암약론을 넘어선 제3의 해석을 내놓는 김기협 교수,
일본에 인질로 간 영친왕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본 고 김을한 기자,
그들이 본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책으로 만날 수 있다.
"졸렬했다"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저자, 김기협 계명대 교수
망국의 군주 고종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다. 고종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고종 덕분에 그만큼이라도 버텼다고 하는 축도 있다. 국수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문명사 관점에서 역사를 읽어내는 김기협 교수(계명대·사학과·사진)는 제3의 해석을 내놓는다.
김 교수의 해석은 이렇다. “조선은 어차피 망할 나라였다. 고종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종 때문에 품위 없이 망했다. 고종은 나라가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졸렬했을 뿐이다.” 김 교수는 고종 책임론과 고종 암약론을 둘 다 부정한다. 그는 고종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망국을 막기 위해 암약한 것이 아니라, 자리보전을 위한 꼼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유교 정치의 쇠퇴를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보는 그는 유교 질서가 쇠퇴하고 권력이 사유화되면서 유교 정치의 틀이 깨졌다며 이를 되살리려고 한 흥선대원군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전통적 기준으로도 역사를 봐야 한다는 그는 충분한 시간만 주어졌다면 유교 정치의 틀 안에서 독창적 근대화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1910년 8월29일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겨받은 날이다. 망국 100년, 저자는 망국의 결과만큼 그 과정도 주목하라고 주문한다. 그는 “엘리트 계층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통치 질서가 문란해진 조선 말기 모습과 ‘경제만 살리면 된다’며 장관 후보자의 도덕성을 무시하는 지금의 모습은 닮았다. 역사의 복선을 볼 줄 모르는 사고방식이다”라며 비판했다.
"우아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저자, 고 김을한 서울신문 기자
1950년 서울신문 기자였던 김을한(사진)은 도쿄 특파원 발령을 받았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을 찾아갔다. 인질로 잡혀갔던 영친왕은 나라가 해방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견제로 입국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고립무원이던 영친왕은 그를 반겼다.
1970년 영친왕이 서거할 때까지 김을한은 20년 동안 망국의 충신처럼 헌신했다. 그러나 냉정한 기자의 시선을 잃지 않았다. 일본 황실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으며 제1항공군사령관(육군 중장) 지위에까지 오르며 물질적으로는 일본 방계 황족보다 풍족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황폐했던 영친왕의 삶을 그는 ‘끝없는 한, 마르지 않는 눈물’이라 묘사했다.
저자는 영친왕을 중심으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여동생 덕혜 옹주 그리고 이들의 구술을 통해 고종·순종·명성황후·의친왕 등 황실의 마지막 사람들을 들여다보았다. 이방자 여사는 저자에 대해 “김을한씨의 서술은 대체로 정확하며, 아주 어려운 시기에 왕 전하의 잘못된 국적을 다시 고치고 가여운 덕혜 옹주를 본국으로 모셔오게 해주었다. 그 노고를 고맙게 생각한다”라고 평했다. 1971년 발간된 책이 국권 찬탈 100년을 맞이해 39년 만에 복간되었다.
1971년 초간 당시 운보 김기창이 책의 장정을 그렸고 일중 김충현이 제자(題字)를 썼고 작가 김팔봉은 추천사를, 월탄 박종화는 ‘영친왕을 위해 곡하다’라는 시를 헌정했다. 박종화는 영친왕을 원나라의 볼모로 가서 노국공주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귀국 후 고토를 회복한 공민왕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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