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에서 창궐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면 마치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의 검투사 시합을 보는 기분이다. 88만원세대 노예들은 오디션 원형경기장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기성세대 관객들은 TV로 구경하고 ARS로 응원 함성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연예인 황족들은 엄지손가락 올렸다 내렸다하며 합격 불합격을 결정짓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로마시대 검투사 시합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한 명의 승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들은 심사위원들의 갖은 독설을 받아낸다. 마치 ‘음악의 신’처럼 군림하는 심사위원 앞에서 그들은 열창 뒤에 죄인처럼 서서 꾸중을 듣는다.
<슈퍼스타 K2>, <위대한 탄생>, <신입사원>, <코리아 갓 탤런트>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의 뒷그림자가 보인다. 젊은 지원자들이 죄인처럼 서서 온갖 독설을 받아내야 하는 포맷이 바로 우리 사회의 알레고리 아닐까?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의 시선으로 기성세대가 지금 88만원 세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닐까?
기성세대는 88만원세대를 적자생존의 경쟁으로 떠민 것에 대한 반성 없이 편안한 관중석에서 그들의 발버둥을 즐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세상이 그지 같애? 세상은 원래 그런거야! 네가 찌질해서 그 모양 그 꼴인거지. 벗어나고 싶어? 그럼 발버둥쳐? 우리도 다 그렇게 컸어’
압권은 MBC의 아나운서 오디션 프로그램 <신입사원>이다. MBC는 신입 아나운서를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하고 있다. 이 발상에는 ‘왜 가수는 오디션이 되고 아나운서는 안 되나? 아나운서만 성스러운 직업인가? 아나운서도 오디션으로 뽑으면 참신하지 않을까’라는 전제가 들어 있다.
물론 아나운서의 역할은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하고 있다. 많은 아나운서들이 쇼·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시청자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그 친근감이 뉴스 전달력을 높이는 것인지 혹은 방해가 되는 것인지는 아직 연구가 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말을 가장 잘 구사하는 아나운서들의 역할이 방송에서 확대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대중을 대상으로 스타를 선발하는 방식의 가수 오디션과 평범한 입사 시험인 아나운서 선발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 세계의 불문율은 입사 관련 정보는 노출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의 미래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MBC 아나운서 오디션에 떨어지는 모습이 전 국민에게 노출된 사람을 KBS나 SBS가 뽑을 수 있을까?
입사를 놓고 회사와 지원자는 철저하게 갑과 을의 관계다. 갑이 요구하는 것을 을이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슈퍼갑’ MBC는 지금 지원자들에게 금도를 넘어서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아니면 말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MBC가 아나운서 오디션 참가자들에게 '신체포기각서' 수준의 서약서를 미리 받아두는 것은 탈락자들이 나중에 초상권 운운하지 않도록 미리 수를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꿈에 도전한 대가가 방송에서 남의 들러리를 서는 것이라니, 참으로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방송사보다 MBC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기를 꿈꿨던 한 후배가 자신은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지 않았다며 “나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것이지 구경꺼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MBC가 아나운서를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선발하는 것에 대해서 설문을 돌려보았다. 111명이 답한 가운데, ‘천박하다(49%-54표)’가 ‘참신하다(29%-33표)’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관심없다(22%-24표)’는 답도 많았다. MBC가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풀어낼 지 모르겠지만 대중의 시선이 삐딱하다는 것은 염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나운서가 아니라 MC 선발이었다면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입사의 문제가 아니라 챔피언 결정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운서가 가진 상징가치만을 얄팍하게 이용한 이런 변형 입사시험을 방송하는 것은 깊이 따져봐야 할 문제다. 재미있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사장을 오디션으로 뽑아라.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의 창궐은 ‘약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 ‘강자만 할 말 다 하는 세상’의 알레고리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 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노동하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노동하기 힘든 나라, 그 덕에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그런 사회가 방송에서 재현되고 있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젊은 세대를 기성세대가 팔짱 끼고 구경하고 있다.
주> PD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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