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도 낙하산 사장이 내려왔다.
내부 반응은 세 갈래다.
놈놈놈 식으로 표현하면,
축배를 드는 놈
눈치 보며 살길 찾는 놈
분노하는 놈,
이렇게 나뉜다고 한다.
2008 베이징 올림픽, 16일간의 열전이 끝났다.
그 기간에 맞춰 정부는 KBS 장악 열전을 펼쳤다.
딱 18일 걸렸다.
올림픽 개막식에 맞춰 정현주 사장을 해임시켰고
올림픽 패막식에 맞춰(정확히는 선수단 귀국에 맞춰) 낙하산 사장을 임명시켰다.
KBS 기자들과 PD들이 막아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중간에서 기만적인 ‘같기도 투쟁(이것은 막는 것도 아니고 안 막는 것도 아니여~)’을 펼친
KBS 노조 때문에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은 정부의 낙하산 사장 임명을 막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사원들이 부지기수로 다쳤다. 갈비뼈가 금간 기자만도 세 명이었다.
엊그제 KBS에서 대학 동기 PD와 대학 후배 PD를 만났다.
후배는 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새로운 ‘KBS 삼분론’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KBS 삼분론’을 알 필요가 있다.
KBS에 구전되는 말 중에 “KBS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라는 농담이 있다.
‘3분의 1은 열심히 놀고, 3분의 1은 남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래서 노는 사람만 못하고),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만 일한다’는 것이다.
KBS의 방만한 경영을 비꼰 농담인데, 정부의 KBS 장악이 본격화되면서 바뀌었다.
정부가 낙하산 사장을 보내 KBS 장악을 하는 데 대한 반응이 세 가지로 갈린다는 것이다.
‘3분의 1은 방관하고, 3분의 1은 KBS 장악을 돕고 (그래서 방관하는 사람만 못하고), 3분의 1만 KBS 독립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국민이 지켜주겠다고 촛불을 켜는데 성문 열어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 KBS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후배는 이제 세 부류가 이렇게 분류된다고 설명했다.
‘축배를 드는 사람, 눈치를 보며 살 길을 찾는 사람, 분노한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놈놈놈 식으로 표현하자면
축배를 드는 놈, 살 길 찾는 놈, 분노하는 놈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뒤늦게 합류한 대학 동기는 악몽을 꾸고 왔다고 했다.
악몽은 이랬다.
꿈에 어딘가에 잡혀갔다.
분위기가 너무나 위압적이어서 자신이 북한에 잡혀온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정부기관에 잡혀온 것이었다.
기관원이 그에게 물었다.
“역사발전의 5단계가 어떻게 되지?”
동기는 대답했다.
“네 원시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
선진대한민국입니다”
동기는 “꿈 속에서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얼결에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라고 말했다.
날나리 대학생이었던 나와 달리
대학시절부터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동기였다.
사회과학 학회 활동도 열심히 했다.
동기는 사표를 내고 싶다고 했다.
말렸다.
그러나 답을 줄 수는 없었다.
휴가 기간 동안 발표된 KBS 내부 구성원들의 성명서를 올린다.
입사 2년차인 33기 기자 37명의 성명서와
입사 9년차인 26기 기자 28명의 성명서다.
(26기 성명서는 나와 언론사 입사년도가 같은 기자들의 성명서라도 특별히 애착이 간다)
이로서 KBS를 지키기 위한 양심 성명을 낸 기자와 PD 숫자가 304명이 되었다.
지금까지 31기 기자 52명, 34기 기자 27명, 29기~34기 PD 160명 등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방송가에서는 젊은 기자 PD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들고 일어선 것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이들이 끝까지 열정을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
<방송의 독립과 자유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번 KBS 사장 해임처리 사태는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를 짓밟고
언론의 독립성을 유린한 정권의 폭거입니다.
우리 33기 기자들은 뜻을 모아 정권의 공영방송장악 기도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 부끄럽지 않은 KBS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양심에 따라 권력에 대한 독립된 감시자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
언론인의 책무라고 생각하며, 공영방송의 가치를 믿고 KBS에 입사했습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는 취재현장에서 공영방송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와 신뢰를 보았고,
기사 한 줄의 엄청난 영향력을 경험했으며, 사회적 공기로서 긍지를 키워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자부심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KBS인이란 사실이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결의합니다.
우리는 정부의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홍보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단호히 저항하며
언론의 독립과 자유를 침해하려는 모든 부당한 기도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 해임처리 원천무효! 유재천 등 이사 6명 즉각 퇴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하나. 정부는 법과 상식을 무시하며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관철시킨
이번 해임 처리를 즉각 원천무효화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하나. 유재천 이사장 등 이사 6명은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8월 8일 월권으로 경찰을 불러들여 우리의 일터와 직원들을
상처 입히고 모독한데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물러나라!
# 선배들이여, 함께 싸우자!
정권은 선배들이 수십 년간 싸워 일군 방송독립을 짓밟고
시대를 거꾸로 돌리고 있습니다.
선배들에게 호소합니다!
90년대 방송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선배들의 뜨거운 투지를 보여주십시오!
오랫동안 공영방송을 고민하고 실현해왔던 우리 선배들이
더 크게 뜻과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정권은 결코 KBS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33기 기자들이 선배들과 함께 또 앞장서 신념과 패기로 싸우겠습니다.
========================<< 33기의 이름 >>=============================
고진현, 곽선정, 권태일, 김동욱, 김문영, 김상민, 김성현, 김연주, 김용덕, 김정은, 김준범,
김지선, 김태현, 김효신, 박상현, 박선우, 박주미, 박찬규, 변진석, 서영민, 손은혜, 송수진,
신지원, 안다영, 오수호, 유지향, 윤지연, 이만영, 이수진, 이종영, 임종빈, 조경모, 조태흠,
최송현, 최형원, 한규석, 황현규 (가나다 순, 이상 37명)
====================================================================
아직 끝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기도와 낙하산 사장 논란의 핵심인물로 거론돼왔던 김인규 전 이사가 결국 스스로 KBS 사장 공모신청을 포기했다. 우리는 쉽지 않았을 김인규 선배의 결단을 환영한다.
사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인규 선배가 논란의 정점에서 비켜섰다 해서 KBS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끝이 난 것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현 정권은 더욱 교활하고 교묘한 수법으로 KBS를 장악하려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몇 개월에 걸쳐 감사원과 국세청, 검찰까지 모든 권력기관을 총동원해 시시각각 KBS의 목을 죄어오는 이 정권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왔다.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해 YTN과 아리랑TV, 한국방송광고공사, 한국디지털위성방송 등 방송사와 관련 기관을 차례로 휩쓸어 버린 이 정부의 서슬퍼런 방송장악의 칼끝은 이제 KBS와 MBC를 정조준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는 우리의 뉴스를 통해 KBS 사장은 ‘국정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한다’는 청와대 박재완 수석의 발언을 들어야 했다. 또 ‘KBS가 진정한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한나라당 대변인의 ‘충고’도 나왔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치욕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어찌 청와대와 여당이 이토록 후안무치하고 뻔뻔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독립성을 보장해야 할 공영방송에 경찰력을 투입하면서까지 사장 해임안을 폭력적으로 변칙 처리하고서, 정권의 국정철학을 구현할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KBS를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일인가?
KBS 건물을 수십 일간 경찰차벽으로 둘러싸 국민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언론사에 사복경찰을 난입시켜 방송독립을 외치는 언론인들을 짓밟는 것이 KBS를 ‘국민의 방송’으로 만드는 일인가? 더 이상 얄팍한 속임수로 국민을 오도하지 말라. 이는 신뢰도 1위인 ‘국민의 방송 KBS’를 ‘정권의 방송’으로 탈바꿈시키려는 현 정부의 언론장악 기도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이대로 당하지는 않는다!
KBS 기자로 살아온 지난 9년, 그 시간은 우리에게 공영방송의 가치와 언론인의 막중한 책임감을 직접 몸으로 체득한 실천적 체험의 기간이었다. 민주주의의 첨병인 언론의 자유와 방송의 독립성은 이제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자부심 그 자체이다.
공영방송과 방송민주화의 미래를 위협하고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그 어떠한 시도에도 굴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서 탄식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26기 기자 전원은 여하한 경우라도 정치권에 몸담은 자나 권력의 측근 인사, 그리고 과거 자신의 영달을 위해 권력의 주구가 돼 방송민주화에 역행해온 인사가 KBS 사장에 임명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할 것이다. 선배들의 피와 땀으로 도도히 이어져 온 방송민주화의 물결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의 코드 인사를 현재의 코드 인사로 ‘바로 잡겠다’는 자기모순과 몰상식이 도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한발 한발 전진해 온 엄연한 방송 민주화 역사의 진화과정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행위이다. 치우침으로 치우침을 치유할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우리는 공영방송 KBS를 정권의 손아귀에 고스란히 갖다 바치려는 현 이사회를 강력히 규탄하며,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그들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한다. 특히 국민의 시선이 베이징에 쏠린 올림픽 개막일을 틈타 KBS 안에 공권력을 끌어들이고 자유언론을 짓밟은 그 참담한 사태에 대해 유재천 이사장을 비롯한 6인의 이사는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방송민주화의 역사에 부끄러운 이름을 더 이상 남기지 말고 하루 속히 사퇴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우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우리 KBS 26기 기자들은 방송을 정권의 도구로 만들려는 그 어떠한 시도와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한국사회를 어둠의 시대로 회귀시키려는 이명박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방송장악 음모는 끝내 실패할 것이다. 선후배와 동료들, 그리고 언론자유를 외치는 시민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비장한 각오로 공영방송 장악 저지 투쟁에 나설 것이다. 정부와 이사회는 험난한 싸움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2008년 8월 21일 KBS 보도본부 26기 기자 28명 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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