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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대, '298세대'는 왜 정치에 등을 돌렸나?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2. 5. 12.


영화 [건축학개론]이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마흔 즈음 세대에게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서태지세대'로도 불렸던 이들은 대중문화가 폭발한 시대를 살면서 그 과실을 따먹은 세대다.  IMF 전에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도 했던 세대다. 하지만 IMF 이후 잊힌 세대가 되면서 정치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가장 반이명박 정서가 강했던 이 세대가 총선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들은 왜 정치에 등을 돌렸을까?






영화 <건축학개론>이 흥행가도를 질주하고 있다. 개봉 5주(3월22일) 만에 350만을 넘어서고도 여전히 뒷심을 발휘하며 400만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한국 멜로영화 사상 최다관객 동원이다. 1990년대 감수성으로 똘똘 무장한 이 영화는 남자들에게 첫사랑의 아련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로 ‘넥타이부대’에 특히 인기가 있다. 20여년 전 대학신입생 시절을 기억하며 영화에 삽입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듣는다.   


1992년 대학을 입학했던 신입생들은 흔히 ‘서태지 세대’로 불렸다. 그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특종 TV가요를 통해 데뷔했기 때문이다. 비록 심사위원들에게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지만 서태지는 중고등학교 교실을 강타했다. 1980년대가 조용필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서태지의 시대였다. 대중문화 전공자들에게도 장이 섰다. ‘서태지,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환호하며 온갖 서태지 담론을 쏟아냈다.


전람회 1집은 1994년에 발매되었다. 전람회는 서태지처럼 소란스럽지 않았다. 혼자 조용히 듣고 영화의 주인공처럼 친구에게 살짝 들려주어 조용히 귀에서 귀로 전달될 뿐이었다. 서태지는 1992년 데뷔했지만 주로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199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반면 1994년 데뷔한 전람회는 워크맨세대가 고음질의 CD플레이어세대로 바뀔 때 고음질에 맞는 고품격 음악을 들려주며 대학생들의 귀를 붙들었다. 대학생들은 서태지의 노래보다 서태지 담론을 더 좋아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이 흥행하자 영화주간지 <씨네21>에서는 ‘1990년대의 아이콘’ 10가지를 선정했다. <씨네21>은 심은하, 서태지, 무라카미 하루키, 왕가위, 압구정동, 모래시계, 게스 청바지, 농구, 결혼 이야기, 영화잡지 이렇게 10가지를 꼽았다. 이 10가지의 아이콘을 재해석하면 1990년대는 외국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의 대중문화를 일군 시대였다. 1980년대가 ‘민중문화’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였고, 그것이 한류의 초석이 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 대중문화가 폭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1997년 말 찾아온 IMF 금융위기 때 외신은 한국을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나라’라고 비꼬았는데, 그 일찍 터뜨린 샴페인 맛을 먼저 본 세대가 바로 1990년대 초중반 대학을 다닌 세대였다. 이 세대는 ‘우리의 삶은 부모세대의 삶보다 더 윤택해질 것이다’는 확신을 갖던 세대였고  배낭여행과 어학연수를 통해 해외문화를 온몸으로 흡수한 세대였다. 이 세대가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신세대 X세대 신인류 오렌지족... 그리고 298세대


세상은 이들을 특별하게 이름 붙였다. 신세대 X세대 신인류 오렌지족... 별종이 출연한 것처럼 취급했다. 이때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들은 개성 넘치고 자유분방한 척이라도 해줘야 할 정도로 이들을 보는 시선은 특별했다. 이후 이들은 디지털 문명 1세대가 되었다. PC통신을 처음 시작하고 인터넷문화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혈연 지연 학연이 아니라 관심과 취미에 따라 모이기 시작한 첫 세대였다. 리더가 아닌 시샵(SYSOP 동호회 운영자)의 시대였다.     


가장 덕을 본 사람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활동한 연예인들이었다. 배용준 장동건 이병헌 등 이 시기에 데뷔한 연예인들은 호황기를 누리고 한류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가장 소비성향이 강한 세대를 팬으로 보유한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이전 어느 세대의 연예인보다도 인기의 수명이 길었다. 이들의 팬들이 ‘카드대란’으로 신음할 때는 카드광고에 출연하며, ‘하우스푸어’를 전전할 때는 브랜드아파트 광고에 출연하며 영광을 누렸다. 나이가 들어서는 한류스타로 금의환향해 다시 팬들을 규합했다.  


가장 대중문화의 수혜를 많이 받고 자란 이 세대의 결과물도 결국 대중문화 영역에서 나왔다. <무한도전>의 김태호 PD와 <1박2일>의 나영석 PD, 그리고 <지식채널e>의 김진혁 PD 모두 이 세대다. 소셜테이너의 전형을 보여준 김제동과 김여진,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문화의 저수지를 만든 김유식 대표, 시사콘서트 영역을 개척한 탁현민 교수, 웹툰 시대를 연 강풀, 다음 아고라를 만든 김태형, 1인 미디어 시대의 스타 미디어몽구까지 이들은 전범이 없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냈다.   


그러나 1990년대 황금기를 보낸 이 세대는 세대 전체적으로는 IMF 금융위기를 거친 후 ‘잊힌 세대’가 되었다. 그 이전 세대가 ‘386세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고, 그 이후 세대가 ‘88만원 세대’라는 안타까운 별명을 얻었지만 이 세대는 그런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의 낀 세대라는 의미로 298세대(386-88=298)로 명명해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전혀 주목받지 못해, 이번 총선에서도 정치권은 386세대 다음에 이 세대를 건너뛰고서 그 밑 세대에서 청년비례대표를 선정했다. 그 어떤 당도 이 세대를 수용하고 포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가장 야당성향이 강한 세대에서 가장 정치에 무심한 세대로


이들이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지방선거 이후였다.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이 세대는 가장 야당성향이 강한 세대로, 20대보다 투표율도 높고 야당지지 성향도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투표율은 50~60대와 버금가고 야당성향은 386세대보다 강한 이들이 야권의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다. 인터넷과 디지털문화와 익숙한 이들은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나 ‘나는 꼼수다(나꼼수)’와 같은 팟캐스트로 빨리 수용해 이후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이번 총선에서 벌어졌다. 이 세대가 투표를 가장 안 한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와 이번 총선의 투표조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20대 투표율이 41.1%에서 45.0%로 오를 때 30대 투표율은 46.2%에서 41.8%로 떨어졌다(방송3사 출구조사). 20대가 투표율에서 30대를 제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줄 알았던 이 세대가 부진하자 야권은 결정타를 맞았다. 왜 이명박 정부를 가장 싫어하는 이 세대가 이명박 정부 심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투표에 가장 무심했던 이 세대가 야당이 참패한 것으로 나온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실망은 가장 많이 했다는 점이다. 흔히 ‘멘탈 붕괴(멘붕)’라고 하는 선거 후유증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세대가 바로 이 세대였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 트위터 정치 담론이 큰 낙차를 보이며 수그러들었고 ‘멘붕’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이번 총선에 대해 이 세대는 무심하거나 집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트위터를 통해 이런 물음을 일주일 내내 던지며 몇 가지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이들이 대학을 다녔던 1990년대 초중반은 학생운동의 쇠퇴기였다. 쇠퇴기였을 뿐만 아니라 교조적인 학생운동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었던 때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대학에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중문화가 융성하고 학생운동이 쇠퇴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사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떨어지고 정치혐오는 가장 강한 세대였다. 그 세대가 뒤늦게 촛불집회와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정치의식이 고취되었다가 한풀 꺾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샵이 아니라 리더로 나선 '나꼼수'


다음은 나꼼수의 역할이다. 나꼼수는 IMF 트라우마 때문에 생활전선에 매달리던 이 세대가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만든 ‘빨간약’이었다. 뒤늦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은 나꼼수를 386세대 학생회장과 같은 리더가 아니라 인터넷 동호회 시샵으로 이해했다. 지금 시대를 읽는 프레임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나꼼수였다. 그런데 나꼼수 멤버인 김용민씨의 출마는 ‘나를 따르라’며 나꼼수가 리더로 나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해석이었다. 


비록 잊힌 존재였지만 이 세대는 누구보다 자의식이 강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세대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도 부정적이다.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세대다. 이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그런데 야당 지도부는 국민경선제로 치른 전당대회 이후 지지자들의 목소리에 무심했다. 나눠먹기 공천 문제 등 숱한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투표일까지 2달이 넘는 시간 동안 외면했다. 원래 정치혐오가 심한 이 세대가 소통이 되지 않는 야당을 보면서 선거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갓 마흔을 넘어서거나, 마흔에 턱걸이하고 있거나,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298세대는 대선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까? 20대 반값등록금 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날라리 선배부대’를 만들었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나설까? 아니면 이번 총선처럼 ‘무심하거나, 집착하거나’ 할까? 답은 정치권의 몫일 것이다. 요즘 박원순 서울시장의 개혁 시정을 보며 ‘멘붕 힐링’을 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인다면 이들은 대선판을 재미있는 축제로 바꿔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