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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퇴사에 즈음해...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20. 9. 9.

시사IN도 나한테 할만큼 했으니까...
     
시사IN에 사표를 냈다.
애초 3월에 내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말렸다. 코로나가 한창인데, 일단 스타트업 모형으로 진행해 보라고 붙들었다. 못이기는 척 붙들렸다. 코로나를 무시할 정도의 자존감은 없었으니까. 
     
6개월이 지났는데 코로나는 그대로였다. 아니 더 나빠졌다. 재확산으로 세상은 다시 셧다운이 되었다. 아무도 여행을 얘기하지 않았다. 
     
시사IN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형이 안 나왔고, 무엇보다 예상 못한 변수들이 계속 나타났다. 해외여행을 못가면 프리미엄 국내여행으로라도 비즈니스 모형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재확산이 앗아갔다. 
     
처음 여행동아리 형태의 여행자 플랫폼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득할 때 예를 든 것은 트레바리였다. 독서동아리가 비즈니스가 되는데 여행동아리가 안 되겠나, 20대 후반 30대 초중반 대상의 서비스가 되는데 50대까지 아우르는 서비스가 안 되겠나, 네트워킹은 도시에서 무엇을 도모하는 것보다 함께 도시를 떠날 때 저절로 이뤄진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내가 만들려고 했던 것은 여행사가 아니라 여행 기획 그룹이다.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놓고 우리식으로 여행을 기획해서 여행사를 섭외하는 방식이다. 이런 ‘여행자 플랫폼’을 구축해서 장거리/장기 여행을 짰을 때 25명 이상의 그룹이 무조건 만들어질 수만 있다면 여행사들은 우리가 원하는 여행을 구현해줄 것이다. 여행사와의 관계에서 강력한 협상력을 갖게 되는데 그 협상력을 바탕으로 프리미엄 여행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진행해 보니 예상 못한 리스크가 많았다. 어찌보면 코로나는 지나가는 리스크였다. 더 큰 리스크는 따로 있었다. 독서에서는 아니면 말고가 되지만 여행은 강력한 컴플레인 대상이다. 사람들의 취향은 제각각이어서 이를 함께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참아주지만 언제까지 참아줄 지는 모를 일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문제였다. 네트워킹은 너무 빨리 되어서 6개월도 안 되어 불협화음이 나타났다. 빨리 알면 빨리 싫어진다. 예전부터 알던 사이도 아니라서 오래 지켜보지도 않는다. 그냥 ‘아니면 말고’다. 
     
시사IN이 이 십자가를 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이건 시사IN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가서 내가 리스크를 안고 구축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여행 불가 시대에 시사IN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만도 없었다. 해외여행이 정상화될 때까지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형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혼자 서바이벌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구축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내기 전에 최소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후원회원을 모집했다. 다행히 후원회원에 신청해주신 분들이 있어서 비빌 언덕 하나는 만들어 두었다. 
     
시사IN은 마지막까지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주2일만 일하는 보직으로 이동시켜주겠다고도 했다. 이만하면 눈물이 날 만큼, 회사는 할만큼 한 것이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이건 받지 않기로 했다. 정규직은 정규직에 상응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회사 형편이 빤한데 내가 짐이 될 수는 없었다. 도울 일이 있으면, 혹은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돌아와서 알바로라도 돕겠다고 했다.
     
사표를 냈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더니 응원의 말이 쏟아졌다. 마치 “제 사표를 대신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응원을 받고서야 깨달았다. 직장인의 꿈은 '사표'라는 것을. 어쨌거나 저쨌거나 직장인으로서의 꿈은 이루었다.


     
기자를 20년 했다. 기자업을 ‘졸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회는 간단하다. 그냥 ‘할만큼 했다’는 생각이다. 편집권 독립을 위해서 1년 동안 싸웠고, 6개월 동안 파업했고, 무기정직을 두 번 당했고, 끝내 사표를 내고 나가서 선후배들과 시사IN을 창간했다.  
     
시사IN이 벌어준 6개월의 시간 동안 ‘여행자 플랫폼’에서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컨셉의 여행을 진행했고, 20여개가 넘는 소모임을 구축했고,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다양한 주제의 원데이 클래스도 진행했다. 시험 삼아 공동 구매도 여러 번 해보았다.
     
안타깝게도 그 시간 동안 돈 벌 궁리는 제대로 못했다. 이제부터 이 숙제를 풀어야 한다. 진짜 황야로 아니 사막으로 혹은 시베리아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이미 나와 있었던 것 같은데 더 혹독한 상황을 맞이할 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재확산 국면에 사표라니, 이 정도면 파도타기를 넘어선 급류타기일 것이다.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닌데, 요즘 인생 참 짜릿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내가 나를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여행업이 가장 어려울 때다. 이럴 때 여행업에 뛰어드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짓이다. 그래서 일단은 생존이 목적이다. 이런 조건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난관도 잘 풀어나갈 수 있을테니까. 
     
모두가 언택트 시대를 고민할 때 나는 여행이라는 고전적인 컨택트 방식을 고민했다. 나는 언택트의 시대가 되면 그 반작용으로 컨택트에 대한 요구가 더 절실해질 것으로 본다. 조용히 그때를 대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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