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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키 작은 영화들

용산 다큐 '두 개의 문'의 두 감독 인터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2. 6. 27.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시사IN> 지면에 맨 처음 소개한 사람은 정혜윤 PD였다. ‘오늘도 여행 중’이라는 연재 칼럼에서 “뭘 어쩔 수 있겠어,라는 사람들의 체념과 망각이 실은 진실의 문을 잠그는 자물쇠”라며, 이 영화를 통해 용산참사를 다시 기억하자고, 그래서 진실의 문을 열어보자고 했다(제237호 ‘진실의 문은 누가 잠갔나’ 참조).


두 번째로 소개한 사람은 격주로 영화평을 연재하는 영화 에세이스트 김세윤씨였다. 김씨는 <두 개의 문>이 용산참사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알려준다며 “처음으로 ‘호소’라는 단어를 쓴다. 호소한다. <두 개의 문>을 봐달라. 꼭 봐달라. 꼭! 일단 본 다음에 얘기하자”라고 호소했다. 원고를 보내며 그는 “<시사IN> 모든 기자들의 <두 개의 문> 관람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기사에서 다뤄줄 것을 요구합니다”라는 메모를 덧붙였다.


필진들의 강요(?)에 의해 <두 개의 문>을 세 번째로 소개하기로 했다. 영화를 보니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원폭 피해자 마을을 다룬 <저녁뜸의 거리>라는 만화를 보면 피해자의 자녀가 “사람들은 그냥 우리가 조용히 죽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영화는 우리가 용산참사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두 개의 문>의 뼈대는 용산참사 당시 진압을 맡았던 경찰특공대의 법정 진술과 증거 동영상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의 시선과 주장, 그리고 그들의 증거를 토대로 과잉 진압 피해자들이 과격 시위 가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을 복기한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처럼 이미 대법원 확정판결이 끝난 사건을 역사의 법정에 불러들이는 영화인 셈이다. 영화로 ‘공소장’을 쓴 김일란·홍지유 감독을 만났다. <두 개의 문>은 6월21일 개봉했다.





영화의 시선이랄까, 사건을 다룬 방식이 독특한 것 같다. 

홍지유(홍):용산참사 이후 현장의 문화예술 분야 활동가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열사 프레임’으로 접근할 것인가, ‘희생자 프레임’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국가 폭력의 희생자인 농성 철거민을 불법 폭력집단으로 매도하는 상황에서 자기방어를 위해 나선 것이라는,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결국 ‘열사 프레임’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을 열사로 했을 때 함정도 있었다.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가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경찰의 시선에서 사건을 재구성할 생각을 했나?

김일란(김):용산참사 재판 법정에 모니터링단으로 함께했다. 여러 증인들의 진술을 듣던 중 경찰특공대원들이 망루가 있는 옥상 쪽으로 향하는 두 개의 문에 대해 진술하는 부분이 놀라웠다. 남일당 건물과 망루에 대해 묘사해보라고 하자 건물 층수와 망루 층수도 헷갈려하는 경찰특공대원들이 많았다. 문이 두 개가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경찰특공대원들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망루에 들이닥쳤고, 그 안에서 끔찍한 지옥을 맛보았다고 했다. 그들을 그토록 당황하고 공포스럽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경찰의 입장에 한번 서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용산참사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홍:절망적인 1심 판결 결과가 나왔을 때였다. 결과도 절망적이었지만 사건이 거의 잊혀가고 있다는 것이 더 절망스러웠다. 영화라는 방식으로라도 이 사건을 다시 알리고 싶었다.


사실관계는 어떻게 재구성했나? 

김:주로 법정 공방을 따라갔다. 김형태 변호사가 집요하게 따졌던 쟁점들을 부각시켰다. 경찰특공대에 진압 결정이 언제 내려졌는지, 누가 결정했는지, 왜 경찰특공대를 불렀는지 등등….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는지 규명해보려고 했다.


경찰특공대의 탄생 배경부터 주요 활동까지도 재조명했다.

홍:그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G20 정상회의 때 새로 산 유니폼을 입고 장갑차 옆에서 폼을 잡던 그들이 어떤 집단인지 궁금했다. 2008년 촛불집회 마무리 시점에 나서 해결사 노릇을 하고 대서특필됐던 그들은 용산참사가 있었음에도 나중에 쌍용차 파업 현장에서 또다시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당시 대테러 진압을 위해 만들어진 경찰특공대가 주로 철거민과 시위대를 공격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다큐멘터리도 미완의 기록밖에 될 수 없는 것 같다. 경찰이 충분한 증거를 내놓지 않았으니까.

김:공개하지 않았던 수사 자료 3000쪽은 결국 공개했다. 거기에서 부적절한 진압을 시인했다. 다른 동영상을 보면 망루 안으로 들어갔던 경찰특공대가 동영상 채증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그 동영상이 분명히 있을 텐데 공개되지 않았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그 결정적 증거를 내놓게 하고 싶다. 밝혀져야 할 진실의 조각들이다.


영화를 보면 1차 진압 이후 경찰특공대가 잠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2차 진압을 하면서 불이 났음을 알게 된다. 1차 진압으로 내부가 위험한 상황이란 것을 충분히 파악했을 텐데 왜 이들은 무리하게 2차 진압에 나섰을까.

김:당시 경찰특공대원들이 1차 진압 때 물러난 것은 철거민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망루 바닥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망루 안이 상당히 위험하다고 파악했다는 것은 경찰의 진술 등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철거민의 저항이 별로 없어서 금방 진압 가능할 것이라고만 판단하고 그런 위험을 간과했다. 

홍:아래 특공대장과 주고받은 무선을 보면 지휘부가 추가 진압을 채근했음을 알 수 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금방 끝납니다.” “내가 올라갈까?” “아닙니다. 거의 끝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무선을 주고받았다.


철거민들을 가해자로 만든 판결이 논리적으로 성립하려면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망루에 진입한 경찰에게 던졌어야 한다. 그런 내용을 진술한 경찰은 없는 것 같다. 

김:경찰이 진술한 내용은 망루 안의 철거민들을 순조롭게 진압했다는 것이었다. 망루 안이 어둡고 연기가 많아 숨 쉬는 것이 힘들었고 시너 냄새가 가득하다고 했다. 철거민들은 애초에 시너를 망루 2층과 3층에 놓았는데, 바닥이 내려앉으면서 이를 가장자리로 옮겨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많은 경찰특공대가 진압하면서 바닥이 완전히 주저앉아 일시 철수한 상황이었다. 법원은 철거민 중 누군가가 화재의 원인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바탕으로 판결했다.


급히 출동한 탓인지 경찰특공대가 허둥지둥하는 모습도 영화 속에 보인다. 

홍:위에서는 컨테이너로 공격하고 아래에서는 계단을 통해 올라가며 경찰특공대가 양동작전을 구사하는데,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지자 합판으로 이를 막으면서 경찰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중에라도 김석기씨에게 묻고 싶다. 그 합판이 진압 장비였는지….

김:화염병이 등장하기 2시간 전에 진압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경찰특공대는 소화 장비가 없었다. 개인용 분말소화기 정도였다. 시너에 불이 붙었는데도 계속 물대포를 쏘았다. 컨테이너는 원래 두 개를 사용하려고 했는데 크레인 기사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아 한 대만으로 작전을 해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작전에 투입된 경찰들은 망루가 몇 층인지, 계단이 어느 쪽에 있는지 구조도 전혀 알지 못했다.





유족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김:복잡한 문제다. 재심을 통해 철거민들이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회복을 해야 하겠지만 법의 틀로 보면 화염병을 소지하고 투척한 것은 불법행위다. 문제는 그들이 범한 불법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홍:특수공무집행방해죄가 적용되려면 그것이 정당한 공무 집행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은 화재의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온 6명이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철거민들은 경찰특공대에 ‘다 죽어’라고 말하면서 위험을 경고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이를 ‘다 죽여버리겠다’는 의미로 위협한 것으로 해석했다.

김:망루에서 사망한 이상림씨 장례식 때 아들인 이충현씨가 잠시 구속정지가 되어 나왔는데,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안에서는 물대포 때문에 밖의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선무방송 같은 것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고. 


구속된 철거민들의 반론을 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김:그들의 최후 진술을 넣으려다 뺐다. 직접 변론하기보다 진압 과정의 모순과 실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검찰과 법원도 경찰과 같은 판단을 했는데. 

홍:검찰은 다른 기준에서 경찰 이상의 것을 해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정권에 충성스러운 냄새를 별로 풍기지 않으면서, 자기 직업과 신념에 충실한 척하면서 중형을 얻어냈다. 판사는 검찰 기소문을 대리 낭독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의 실체를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홍:이 영화로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이 사실 새삼스럽다. 당시 1분 1초 단위로 소상하게 사건이 조명됐다. 조·중·동마저도 팩트 전달에 힘을 썼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실체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좀 이해가 안 된다.

김: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기억을 복원하고 싶었다. ‘모두가 피해자’라는 단순 논리는 아니다. 문제의 구조를 살피자는 얘기다. 이 작품 전에 성 소수자 문제 등 인권 다큐를 주로 찍었는데 그때 고민했던 것이 바로 어떻게 감정을 시각화해서 전달할까 하는 부분이었다. 경찰특공대를 통한 팩트의 전달에도 신경을 썼지만 그들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도 주목했다.


영화를 만들기까지 3년이 걸렸는데,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김:이 영화를 보고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3년 내내 너는 기억하며 살았구나. 이걸 부여잡고 살았으니 힘들었겠구나’라고. 돌이켜보니 2009년 1월20일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유가족은 어떨까? 얼마나 수없이 그 순간으로 돌아갈까?’라고 생각하니 먹먹해졌다.


특별히 누가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가?

홍:소수자 문제를 다른 다큐를 만들었을 때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이 보았으면 했다. <두 개의 문>은 누구든 많이 봐줬으면 좋겠다. 개봉까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사람들을 어떻게 극장으로 오게 할지 걱정이다. 그래도 몇 개의 담을 넘어서라도 용산참사와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