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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키 작은 영화들

1992년 '결혼이야기'가 2012년 '도둑들'로 진화하기까지, 한국 기획영화의 발전과정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2. 8. 20.


1세대 기획영화,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



1992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우리 대중문화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해였다. 그해 5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데뷔했다. 6월에는 최수종·최진실 주연의 미니시리즈 <질투>(MBC)가 방영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최민수·심혜진 주연)가 개봉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라드 위주의 음악시장을 댄스음악 위주로 바꾸고, <질투>가 트렌디 드라마의 효시가 되었듯 서울에서만 52만 관객이 든 <결혼이야기>는 기획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가내수공업’ 형태의 한국영화가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뀌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결혼이야기>는 한국영화에 전문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그 전까지 감독이 혼자 시나리오·캐스팅·홍보·마케팅까지 다 하던 것을 프로듀서가 맡아서 하게 했다. ‘기획은 길게 하고 제작은 짧게 하는’ 할리우드식 제작 방식은 1988년 영화사 ‘우영’이 <달콤한 신부들>(강우석 감독)에서 처음 시도했는데 이것이 <결혼이야기>에서 꽃피우게 된 것이다. 


<결혼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 열풍을 일으켰다. <결혼이야기>는 당시 신씨네 신철 대표의 부인이던 오정완씨(현 영화사 봄 대표)가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으로, 신혼부부 200쌍을 면접해 수집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당시 ‘명기획’을 운영하던 심재명 대표(현 명필름 대표)는 ‘잘까 말까 끌까 할까’ ‘남주기 아까우니 우리 결혼하자’는 카피로 흥행을 이끌었다. 


<결혼이야기>가 성공하자 신철 대표는 곧바로 강우석 감독에게 <미스터 맘마>(최민수·최진실 주연)를 연출하게 해 기세를 이어갔다. 이후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신승수 감독)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김호선 감독) 등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가 연이어 제작되었다. 새로 영화계에 진입한 대기업 자본은 관객의 기호에 맞춘 이런 영화들을 선호했고, 덕분에 감각 있는 젊은 감독들이 쉽게 데뷔할 수 있었다. 



 



2세대 기획영화, 조폭물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10여 년 뒤 한국 영화계는 새로운 흥행 코드를 발견했다. ‘조폭 영화’였다. <신라의 달밤>을 시작으로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등 ‘5자 성어’ 조폭 영화가 극장가를 접수했다. 영화당 500만명 내외의 관객을 모으며 한국영화의 부흥을 주도했다. 2002년 한국 영화계는 전국 관객 1억명 돌파와 전국 스크린 1000개 돌파라는 겹경사를 맞았다. 


이들 조폭 영화는 평소 극장을 찾지 않던 관객을 극장에 불러들이고, 명절 텔레비전 영화 특집에서 청룽(성룡)과 리롄제(이연걸) 영화를 밀어냈다. 그럼에도 평가는 박했다. ‘막장 드라마’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면, 조폭 영화는 비웃으면서 보는 ‘막장 영화’였다. 그러나 음악평론가들의 비판 소재였던 댄스음악이 한류의 ‘킬러 콘텐츠(폭발적으로 보급되는 계기가 된 콘텐츠)’가 되었듯 조폭 영화도 이후 캐릭터 코미디와 선 굵은 범죄물로 진화했다.       


2004년 개봉한 <범죄의 재구성>(박신양·백윤식 주연)은 조폭 영화의 변종으로 영화적 진화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에서 최동훈 감독은 ‘한국형 누아르’의 결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조폭 영화에서 관객을 웃기던 슬랩스틱 유머는 냉소적인 블랙 유머로 진화했다. 


<범죄의 재구성>(관객 250만명)을 시작으로 ‘케이퍼 무비(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유의 범죄 영화)’를 계속 제작한 최 감독은 허영만 원작의 <타짜>(조승우·김혜수 주연)를 각색해 또 한 번 흥행 신화를 썼다(684만명). 영화사 이름을 ‘케이퍼필름’으로 할 만큼 장르 영화의 길을 걷던 그가 고전 판타지물인 <전우치>로 잠시 외도했다 돌아와 연출한 영화가 바로 올여름 개봉한 <도둑들>(김윤석·이정재·전지현 주연)이다. 


<도둑들>은 지난주에 개봉한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라이즈>(크리스천 베일, 게리 올드먼, 앤 해서웨이 주연)와 묘한 대비를 이뤘다. <배트맨>이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를 보여준다면, <도둑들>은 한국영화식 도둑 서사를 보여준다. <배트맨>이 햄릿처럼 고뇌하는 영웅을 보여줄 때, <도둑들>은 돈키호테처럼 질주하는 악당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두 영화는 흥행에서도 흥미로운 승부를 펼치고 있다. 개봉 사흘만에 누적 관객수 100만 명을 넘어선 <도둑들>은 개봉 16일만인 8월9일 누적 관객수 800만 명을 넘어섰다. 같은 기간 <배트맨> 누적 관객수는 583만 명에 달했다. 





<도둑들>, 

3세대, 장르형 블록버스터영화의 초석을 놓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로 범죄 3부작을 완성한 최 감독은 영화를 개봉할 때 도둑론을 펼치며 ‘돌직구’를 던졌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날, 옆 십자가에 나란히 매달린 건 도둑이었다. 도둑은 오래된 직업이다.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는 순간부터 도둑은 함께 있어왔다. 어떤 도둑은 돈을 훔치고 어떤 도둑은 마음을 훔친다. 그리고 어떤 도둑은 세상을 훔친다. 이 영화는 그런 도둑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둑들>이 재미있는 이유는 한국 정치의 행태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도둑놈들하고 일할라니까 불안 불안하네.”(앤드류-오달수 분) 도둑들이 이처럼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도 결탁하는 모습은 정당들의 야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 합리화를 일삼는다. “도둑이 도둑 걸 훔치는 게 죈가?”(마카오 박-김윤석 분) 


한국형 장르영화의 전형을 만들어 ‘한국영화는 이렇다’는 것을 보여준 것 외에도 <도둑들>이 갖는 의미는 새로운 형식의 한국형 블록버스터 모형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강제규 감독 스타일의 ‘전쟁 영화’나 윤제균 감독 스타일의 ‘재난 영화’가 삐끗할 때 최 감독은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와이어 액션 장면을 연출했다. 홍콩 배우 런다화(임달화)와 말레이시아 출신 리신제(이심결)를 출연시켜 한국영화의 지평을 넓힌 것도 의미가 있다. <도둑들>은 우리 영화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두 번째 죽음



<가비> <마이웨이> <7광구> <퀵> <고지전> <라스트 갓 파더> <황해>. 

<도둑들> 이전 1년여 동안 개봉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 7편이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2000년대 초 이후 두 번째 ‘집단 폐사’다. 

그 이유는 감독 탓일까, 아니면 시스템 탓일까.

<도둑들>이 활로를 보여주기 전에 좌충우돌했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연대기를 정리해 보았다. 

  


<가비> <마이웨이> <7광구> <퀵> <고지전> <라스트 갓 파더> <황해>. 최근 1년간 개봉된 이들 한국 영화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제작비가 100억원 내외인(<마이웨이>는 300억원)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흥행에 참패 혹은 석패한 영화라는 점이다. 대작 영화 일곱 편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면서 영화계는 집단 ‘멘붕(멘탈 붕괴)’에 빠져 있다.


물론 이들 일곱 편을 ‘흥행에 실패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로 묶는 것은 무리한 일반화일 수도 있다. <퀵>의 경우 가까스로 손익분기점을 넘길 만큼은 관객이 들었고, <고지전>과 <황해>는 평단으로부터 ‘한국 영화의 지평을 넓힌 영화’라는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하자면 홈런 타자가 번트로 살아 나가거나 대형 파울을 친 것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의 본령은 흥행이고 이 영화들은 이 지점에서 분명 실패했다.


중심 타자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이렇게 부진한 성적을 보이는 동안 <써니> <최종병기 활> <완득이>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댄싱퀸> <건축학 개론> 등은 두루 흥행했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 <화차> 등 사회성 있는 영화도 예상 외로 선전했다. 양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지만 질적으로는 다양성이 확보된 시기였다.



할리우드에 비해 장르의 다양성 떨어져


블록버스터는 원래 파괴력이 엄청난 폭탄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연거푸 불발탄으로 판명되자 이런저런 진단이 나왔다.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볼거리에 치중해 스토리가 빈약했다는 지적이다. 관객의 눈높이와 욕구에 맞춘 전략이 부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투자사의 섣부른 간섭도 영화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된다. 핑계는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이런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집단 폐사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01년 말~2003년 초 대작 한국 영화 10여 편이 흥행에 참패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앙’이라는 별명이 붙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정점으로 <흑수선> <화산고> <무사>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예스터데이> <아 유 레디> <튜브> <원더풀 데이즈> <청풍명월> <내추럴시티>가 흥행하지 못한 것이다.


10년 만에 블록버스터의 악몽이 재현된 셈인데, 중요한 것은 지금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참패 요인으로 지목되는 사항들이 당시에도 거론됐다는 점이다. 실패도 진단도 똑같았다. 비슷한 실패를 하고 비슷한 처방을 받았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진단이 잘못 내려졌거나 처방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일단 성공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살펴보자. 분류를 해보면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괴물> <해운대>와 같은 ‘재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웰컴 투 동막골>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와 같은 ‘분단 영화’, 그리고 <왕의 남자> <최종병기 활> <전우치>와 같은 ‘역사 영화’, 마지막으로 <친구> <아저씨> <두사부일체>와 같은 ‘조폭 영화’이다. 


‘공상과학 영화’ ‘영웅 영화’ ‘판타지 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블록버스터로 제작되는 할리우드에 비해 다양성이 떨어짐을 알 수 있다. ‘분단 영화’와 ‘조폭 영화’ 정도가 우리만의 독특한 흥행 코드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조폭 영화’는 이미 시효가 다했고 ‘분단 영화’도 관객이 피로에 젖어 소구력이 날로 떨어진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실패 법칙 세 가지 : 

컴퓨터그래픽, 미래사회, 무협 


우리 대작 영화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차우> <7광구> <유령> 등 컴퓨터그래픽(CG)에 승부를 건 영화들이 있었지만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예스터데이> 같은 미래 사회를 그린 영화도 반응이 별로였다. <비천무> <무사> <중천> <화산고> 등 한국형 무협물도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으로 비주얼적인 시도를 했던 영화들은 대부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피상적인 진단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비주얼이 아니라 비주얼을 받쳐줄 콘텐츠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주목할 것이 감독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감독보다는 메이저 제작사의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제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감독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는 지점에 감독이 있다. 감독에 따른 분류는 그대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분류법이 되기도 한다.



흥행 영화의 주역 감독들, 꾸준히 하락세


1000만명 넘게 관객을 동원한 다섯 편(<괴물>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해운대> <실미도>)을 연출한 감독을 기준으로 분류하면 이렇다. <살인의 추억> <괴물>의 봉준호, <왕의 남자> <님은 먼 곳에>의 이준익,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마이웨이>의 강제규, <두사부일체> <해운대>의 윤제균, <실미도>의 강우석, 여기에 1000만명 영화는 아니지만 <친구> <태풍>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만든 곽경택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봉준호·이준익·강우석 감독은 결과적으로 흥행에 성공했을 뿐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블록버스터형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봉준호 감독은 현재 대작 합작영화 <설국열차>를 제작 중이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작품성이 아닌 흥행 면에서 보자면 전반적으로 하락 추세라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다작하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경우 <왕의 남자> 이후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 <님은 먼 곳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등을 연출했다. 그는 음악이 중심을 이루거나 역사를 재해석한 영화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왕의 남자>의 성공 경험이 있으니 '선택과 집중'으로 대작을 만들어주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강우석 감독은 <실미도> 이후 <공공의 적2>와 <공공의 적 1-1> 등 ‘공공의 적’ 시리즈를 이어가는 한편 <한반도> <이끼> 등을 연출했는데, 블록버스터 영화로 규모를 키우지 않고도 꾸준히 300만~400만명 관객을 모으고 있다. 강 감독이 흥행에 실패한 영화는 <글러브> 정도이다. 대체로 사회성 있는 남성적인 범죄 영화에 강점을 보인다.


이들과 달리 윤제균·강제규·곽경택 감독은 뚜렷하게 블록버스터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을 연출하거나 제작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 시스템과 투자 모형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들이 꾸준히 하향세를 그린다는 사실이다.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의 대실패로 ‘강제규식 대작 영화’ 문법의 시효가 끝난 것 아니냐는 평가를 듣는다.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답습한 것이 실패 요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한 영화 프로듀서는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CEO 중에는 성공한 이유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시장 변화와 소비자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강제규 감독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라고 분석했다.



한국 영화계 체질이 블록버스터에 적응 못해


곽경택 감독은 <친구> 이후 <챔피언> <태풍>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계속 블록버스터형 영화로 제작했지만 모두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다. 곽 감독의 특징은 계속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마초적 감성을 바탕에 깐 영화이기는 했지만 주제와 소재가 한 감독의 영화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실패하자 곽 감독의 다양성 추구는 영화적 방황으로 읽혔다.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하는 감독 중에서 코미디 감각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윤제균 감독은 제작에 참여한 <퀵>과 <7광구>의 실패로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3D 영화로 제작된 <7광구>의 참담한 실패는 이후 3D 영화로 제작되려던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전반을 위축시켰다. 



투자사와 감독의 기 싸움, 배는 산으로?


이런 상황에서 최근 벌어진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바로 <미스터 K> 사태다. <미스터 K>는 CJ E&M이 투자하고 윤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로,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한 이명세 감독(<인정사정 볼 것 없다> <M>)이 연출을 맡았다. 그런데 영화를 10분의 1도 찍지 않은 시점에서 이명세 감독이 하차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제작사 측 주장은 이 감독이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지 않아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인데, 시나리오에 애초 감독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부분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스터 K> 사태는 그간 감독 개인의 역량과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가 시스템에 의해 제작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확실히 옮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자기 영화세계를 지닌 중견 감독으로 평가받는 이명세 감독마저 개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제작사와 투자사의 사전 기획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스템과도 유사하다. 그간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흥행 문법은 따르되, 그 제작 시스템을 전면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곧 확실한 볼거리,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인 스토리 등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 문법을 한국화해 재미를 보았으되, 이를 시스템으로 확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잇달아 흥행에 실패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블록버스터는 숙명적으로 ‘절대로 망하지 않는 영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차>의 변영주 감독은 “블록버스터일수록 감독의 작가적 역량보다 제작사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다. 블록버스터에는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구현하느냐가 관건이다. 우리 블록버스터 영화는 감독 개인의 역량에 지나치게 의지해왔다”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한국 영화계 체질이 아직 블록버스터 제작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 감독은 “투자사가 블록버스터 제작에 관여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관여할 만한 안목과 전략이 있느냐가 관건이다. 블록버스터에 대한 축적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섣부른 간섭은 영화를 망치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어정쩡한 타협이 이뤄지기도 한다. 한 영화 제작자는 “배급 영향력 때문에 블록버스터를 안고 가려는 투자사와 블록버스터에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감독이 어중간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양산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투자사와 감독이 밀고 당기는 사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도 흔하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블록버스터 다워야"


전문가들은 ‘블록버스터 영화는 블록버스터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적 안전장치를 두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양식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르 영화에 취약한 한국 영화계는 이런 양식화에 취약하다. 한국 영화 2.0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다.


블록버스터의 계절인 여름을 앞두고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또다시 시험대에 섰다. 올여름 전후로 <타워>(설경구·손예진 출연), <도둑들>(김윤석·김수현·전지현 출연), <연가시>(김명민 출연), <R2B:리턴투베이스>(비·신세경 출연) 등이 개봉될 예정이다. <괴물2>(박명천 연출), <권법>(박광현 연출), <템플스테이>(윤제균 연출), <설국열차>(봉준호 연출) 등도 200억~300억원 예산으로 제작되고 있다. 이들의 권토중래는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