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서울연극센터에서 발행하는 웹진 '연극IN'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해 백승무 평론가님이 반론문을 보내셔서 '논쟁 아닌 논쟁'을 했는데...
일단 발단이 된 원문부토 게재합니다.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
- 가치의 발견에는 경계가 없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연극계도 반상(班常)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미를 추구하는,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작품은 비평과 평론, 보도와 시상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런 작품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평단과 언론에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연극이다.
대놓고 상업극에 대해 비평을 하는 평론가는 없다. 관객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작품에 대해서 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작품에 대해서 보도하는 것 자체가 평론가와 기자의 명성을 깎아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만큼 어떤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도 중요하다.
분명 무언가 있다. 재밌는 것을 재밌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언급되는 작품과 언급되지 않는 작품의 경계는 보이지 않지만 굳건히 존재한다. 평론가와 기자에게 이런 벽이 있다면 분명 연출가와 배우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품을 연출하고 출연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연기했는지보다 더 큰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편의상 이런 작품을 ‘대중극’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평단과 언론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중극은 대학로의 터줏대감들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대학로에서 오픈런으로 공연되는 공연 작품 대부분은 바로 이런 대중극이다. 평단의 비평 한 문장도 언론의 보도 한 줄도 없이 몇 개월 혹은 몇 년을 공연하는 작품들이다. 몇몇 작품은 시리즈물이 만들어져서 병렬적으로 공연되기도 한다.
연극계가 어렵다, 연극인들이 현장을 떠나고 있다, 지원을 늘려야 한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온갖 우울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관객을 모으는 이런 대중극들을 계속 ‘없는 연극’ 취급해야 할까? 평론과 기사는 그런 대중극과 명확히 선을 긋고 진정성으로 똘똘 무장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해야 온당한 것일까?
셰익스피어를 보자.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시절 통속극의 성취를 잘 활용해서가 아닐까? 셰익스피어를 셰익스피어일 수 있게 만든 것은 평론가나 귀족들이었을까? 아니면 평범한 관객이었을까? 이 분야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성취가 모두 개인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대 작품의 노하우와 에너지를 자신의 작품 안으로 효과적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런 성취를 일궈낸 것은 아닐까?
단순히 대학로 대중극에도 관심을 나눠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흥행 공식이 있을 것이고 작품을 밀고나가는 힘의 근원이 있을 것이고 관객을 불러 모으는 에너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활용하는 것은 더 나은 성취를 위해 기꺼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닐까? ‘논할 가치가 없는 작품’으로 치부해 버리기 전에 무엇을 뽑아낼 지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희한한 반상의 구분이 있다. 여러 문화예술 장르 중에서는 문학이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식에 문화예술인들이 시국 선언을 하는데도 문인들은 따로 하기도 한다. 흔히 일컫는 문단이라는 곳은 권위를 부여하는 권력과 그 권력을 보위하는 생태계로 구성되어 있다.
몸으로 말하는 무용가들은 혹여나 자신들에게 ‘의식이 없다’는 비난을 할까봐 무용작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작품 해설을 내놓는다. 무용 평론 글을 보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누가 더 알아들을 수 없게 글을 쓰는가를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내 이해력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다).
영화는 출연 배우보다는 연출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연출은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배우는 그것을 구현해주는 도구로 이해한다. 그래서 감독이 영화에 출연할 때와 배우가 연출을 할 때 반응이 다르다. 전자는 ‘재미삼아’로 웃고 넘기지만 후자는 ‘건방 떤다’고 비웃는다(물론 속으로만).
이런 반상의 구분이 문화예술계의 자유로운 통섭을 막는 보이지 않는 벽이다. 해외 아티스트들을 보면 한 분야만 줄기차게 고집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관심을 따라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우리 문화예술계는 이것을 도전이 아니라 침범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될까? 평단과 언론의 무관심에도 관객이 몰린다면 뭔가가 있는 것이고, 그 뭔가를 발견하고 전수하는 것은 평단과 언론의 책임 아닐까? 대중극이 단순히 통속극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통섭극으로 진화하는데 평론가의 안목과 언론의 힘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 말이다.
원문 보기 :
http://webzine.e-stc.or.kr/03_story/column_view.asp?Idx=74&CurPage=1&KeyWord=&Search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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