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서울연극센터에서 발행하는 웹진 '연극IN'에 게재했던 글에 대해서
백승무 평론가님이 반론문을 보내셔서 '논쟁 아닌 논쟁'을 했는데...
제가 썼던 원문과 백 평론가님의 반론문, 그리고 저의 재반론문을 올립니다.
연극IN에는 분량을 줄인 글을 올려서...
이곳에 풀텍스트를 올립니다.
1) 고재열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
- 가치의 발견에는 경계가 없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연극계도 반상(班常)의 구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미를 추구하는,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작품은 비평과 평론, 보도와 시상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런 작품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평단과 언론에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연극이다.
대놓고 상업극에 대해 비평을 하는 평론가는 없다. 관객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보도하는 언론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작품에 대해서 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작품에 대해서 보도하는 것 자체가 평론가와 기자의 명성을 깎아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만큼 어떤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도 중요하다.
분명 무언가 있다. 재밌는 것을 재밌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언급되는 작품과 언급되지 않는 작품의 경계는 보이지 않지만 굳건히 존재한다. 평론가와 기자에게 이런 벽이 있다면 분명 연출가와 배우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품을 연출하고 출연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연기했는지보다 더 큰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편의상 이런 작품을 ‘대중극’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평단과 언론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중극은 대학로의 터줏대감들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대학로에서 오픈런으로 공연되는 공연 작품 대부분은 바로 이런 대중극이다. 평단의 비평 한 문장도 언론의 보도 한 줄도 없이 몇 개월 혹은 몇 년을 공연하는 작품들이다. 몇몇 작품은 시리즈물이 만들어져서 병렬적으로 공연되기도 한다.
연극계가 어렵다, 연극인들이 현장을 떠나고 있다, 지원을 늘려야 한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온갖 우울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관객을 모으는 이런 대중극들을 계속 ‘없는 연극’ 취급해야 할까? 평론과 기사는 그런 대중극과 명확히 선을 긋고 진정성으로 똘똘 무장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해야 온당한 것일까?
셰익스피어를 보자. 셰익스피어가 셰익스피어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시절 통속극의 성취를 잘 활용해서가 아닐까? 셰익스피어를 셰익스피어일 수 있게 만든 것은 평론가나 귀족들이었을까? 아니면 평범한 관객이었을까? 이 분야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성취가 모두 개인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대 작품의 노하우와 에너지를 자신의 작품 안으로 효과적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런 성취를 일궈낸 것은 아닐까?
단순히 대학로 대중극에도 관심을 나눠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흥행 공식이 있을 것이고 작품을 밀고나가는 힘의 근원이 있을 것이고 관객을 불러 모으는 에너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활용하는 것은 더 나은 성취를 위해 기꺼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닐까? ‘논할 가치가 없는 작품’으로 치부해 버리기 전에 무엇을 뽑아낼 지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희한한 반상의 구분이 있다. 여러 문화예술 장르 중에서는 문학이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식에 문화예술인들이 시국 선언을 하는데도 문인들은 따로 하기도 한다. 흔히 일컫는 문단이라는 곳은 권위를 부여하는 권력과 그 권력을 보위하는 생태계로 구성되어 있다.
몸으로 말하는 무용가들은 혹여나 자신들에게 ‘의식이 없다’는 비난을 할까봐 무용작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작품 해설을 내놓는다. 무용 평론 글을 보면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기보다 누가 더 알아들을 수 없게 글을 쓰는가를 다투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내 이해력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다).
영화는 출연 배우보다는 연출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연출은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배우는 그것을 구현해주는 도구로 이해한다. 그래서 감독이 영화에 출연할 때와 배우가 연출을 할 때 반응이 다르다. 전자는 ‘재미삼아’로 웃고 넘기지만 후자는 ‘건방 떤다’고 비웃는다(물론 속으로만).
이런 반상의 구분이 문화예술계의 자유로운 통섭을 막는 보이지 않는 벽이다. 해외 아티스트들을 보면 한 분야만 줄기차게 고집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관심을 따라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우리 문화예술계는 이것을 도전이 아니라 침범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될까? 평단과 언론의 무관심에도 관객이 몰린다면 뭔가가 있는 것이고, 그 뭔가를 발견하고 전수하는 것은 평단과 언론의 책임 아닐까? 대중극이 단순히 통속극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통섭극으로 진화하는데 평론가의 안목과 언론의 힘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 말이다.
2) 백승무(연극평론가)
차이는 차별과 다름
- 고재열의 '반상차별론'에 대한 반론, 혹은 변명
고재열 편집위원은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지 않다면>이란 글에서 비평과 언론이 서자, 상놈 취급하는 '대중극'에 대한 무시와 차별의 편견을 걷어내고 취할 건 취하고 배울 건 배우라는 '통섭론'을 주장했다. 부당한 차별이 있으면 철폐돼야하고, 유익한 차이가 있으면 보고 배울 일이며, 편견은 벌을 주고 게으름은 꾸짖어야 한다. 하지만 역할과 기능이 다르고, 자질과 특성이 이질적인 두 경향을 무리하게 저울대에 올려 균형을 잡으려 하고, 균형이 맞지 않으면 통섭의 이름으로 혼종교잡까지 해야 한다는 그 논지는 무리이고 억지이다. 그렇다고 이 반론이 고 편집위원의 주장을 ‘다른’ 주장이 아니라 ‘틀린’ 주장으로 내몰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필자는 고 편집위원이 ‘반상론’의 주범으로 지목한 비평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자 한다.
용어정리부터 하자. 대중성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점을 감안한다면 ‘대중극’보다는 ‘오픈런 공연’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반상 중 ‘상류층’에도 대중성에 대한 지적이 많은 걸 보면 그것이 오픈런만의 독점적 개념이 아닌 듯하니 일단 반상 용어를 ‘정극’(이 용어도 웃기지만 용서 바란다. 어차피 변명으로 시작한 글이다)과 ‘오픈런’ 공연으로 합의하고 시작하자. 배포를 부려본다면 ‘상업극’이란 용어가 더 적절하나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바 레퍼토리 극장이 전무한 우리 현실을 보면 ‘오픈런’이 더 적합해 보인다. 공연기간과 공연성격이 하나로 묶이는 세태를 고려한 것이다.
우선 비평은 왜 오픈런 리뷰에 인색한가. 한국 연극평단의 특성상 보통 개막 첫 달에 비평이 쏟아진다. 이것 또한 레퍼토리 극장이 전무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따라서 개막 초기에 비평의 눈에 띄지 않으면 리뷰 수혜(?)를 받기가 사실상 힘들어진다. 단기 공연과는 달리 입소문에 의지하는 오픈런의 경우 개막 첫 달에 바로 비평의 눈에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오픈런은 서둘러 공연을 봐야한다는 강박도 덜한지라 첫 달 한판승부에서 밀리기 십상이다.
그래도 공연이 좋으면 리뷰를 쓸 만하지 않겠는가? 맞다. 그런데 누가 쓰나? 없다. 평론가가 없다. 당장 써야할 단기 정극도 많은 데 오픈런까지 오지랖을 넓히는 평론가는 극히 드물다. 생계형 전문평론가가 없기 때문이다. 2순위, 3순위 작품까지 필력을 발휘할 생산력 높은 평론가가 없다. 현재 연극판에는 생계형 평론가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생산량과 품질을 양손에 쥘 수 있는 평론가가 없다. 우리 사회에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연극평론가가 없다는 건 불행 중 불행이다. 그나마 공연(연극이 아니라)전문기자가 몇몇 있다는 게 최악을 면해주고 있을 뿐이다. 공연 수에 비해서 비평 수는 절대부족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비평들이 필수 작품은 빼놓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평론 양극화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선 선도투쟁론이 앞설 수밖에 없다. 적은 자원으로 최대효과를 달성하는 현 체제를 비판하려면 오픈런까지 손을 뻗지 못하는 비평의 게으름과 무능력을 탓할 일이지 오픈런이 무시당한다고 오해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정리하자. 현재 비평은 전필 이수하느라 교양과목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하물며 복수전공이나 교생실습은 언감생심이다.
“당신의 말 속에는 여전히 오픈런을 상놈 취급하는 편견이 있지 않는가? 왜 오픈런은 2순위, 3순위고 맨날 부전공인가? 당신도 역시 반상주의자다.”
이는 비평의 역할과 목적을 혼동한 질문이다. 비평의 역할은 연극수준을 높이고 그 역량을 강화, 관극문화를 고양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이 이런 역할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역할이란 목적을 추구한 결과로 따라오는 효용과 공익이다. 비평의 목적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통찰하며 현실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는 기타 등등. 이 지면이 비평의 목적을 설교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그치지만 비평의 목적과 그것이 종국에 가져오는 역할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설명이 됐겠다. 비평의 목적이 그렇다고 할 때, 오픈런이 그 대중성과는 무관하게, 그 진지함과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예술 서열의 말단에 위치하는 것은 엄연한, 그리고 당연한 사실이다. 반상차별론이 상업극의 경제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탕평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우열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우열만은 공시되어야 한다. 비평은 그 욕망을 꿰뚫어야 한다. 그래서 비평이 자신의 목적을 숭상한다면 선후관계에 있어서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차별은 안 되나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때로는 그 차이가 본질을 규정하기도 한다. 정극과 오픈런의 차이는 공연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와 맞닿아있다.
오픈런이 경제적 욕망 너머를 욕망한다면 과욕이다. 포도를 따려면 제 손에 쥔 사과부터 버려야 한다. 오픈런 연출자가 오픈런 ‘전문가’의 딱지를 떼고 자신의 커리어를 다각화, 다양화하는 노력도 필수적이다. 제품 하나, 브랜드 하나로 생존하기는 힘들다. 메이커의 네임벨류를 키워야 한다. 고선웅의 [뽕짝]을 두고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메이커가 고선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뽕짝]은 맥락을 가진다. 작품을 봐야지 왜 연출을 보냐? 옛날에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역사주의 비평을 욕하며 이렇게 물었다. 결론만 말하면 ‘연출이 보이는 걸 어떡해.’ 오픈런 연출도 그런 맥락을 가져야 한다. 기업가치를 봐야지 작전주에 휩쓸릴 순 없다.
감정을 실어 좀 다른 어조로 말해보겠다. 오픈런 불공평 논쟁은 전선도 명확치 않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배부른 돼지’의 구도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처와 아픔만 남기 마련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도토리 키재기한다는 지탄도 가능하다. 한 배를 타고서도 주인입네, 객입네 베고 나누고 가른다면 눈살 찌푸리기 딱이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논쟁하고 싸우고 흥분을 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보다 예술의 명이 더 질기기 때문이다.
생계고에 찌들리는 정극 연출가들은 자주 오픈런의 유혹을 받는다. 그래도 안 한다. 예술과 상업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걸 가르친 선생들이 ‘웬수’다. 배고픔은 정극 연출가들의 자존심이고 숙명이다. 덕분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 아니 전제가 잘못 됐다. 자존심 가져도 되는 작품을 올리기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 "그 대중성과는 무관하게, 그 진지함과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비평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날 재미없는 연극이나 만들지.” 일면 설득력이 있다. 정극 연출가는 관객에게 아부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거는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평 눈치도 보고 자신의 경제적 욕망이 들통날까봐 자기검열도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오픈런이 비평의 불공평에 딴지를 거는 것은 정극이 관객들의 외면에 불평을 하는 것과 형식구조상 별반 다르지 않다. 오픈런이 관객을 차지하고 정극이 비평을 점유하는 것은 형식논리상 공평하다. 이 형식논리를 혁파하기 전에 불공평 타령을 먼저 하는 것은 관객 양극화의 고착화나 예술의 질적 하락을 의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 편집위원의 취지는 오픈런의 작품성을 인정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문화경영학적 접근을 해보라는 충고였을 것이다. 관객을 흡인하는 “뭔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차용하는 지혜로움을 가지라는 권고이다. 비평과 언론이 그 길을 터주고 정극이 열린 마음을 가지라는 의도이다. 따뜻하고 충정이 느껴지지만 그건 기획자에게 할 말이지 창조자에게 할 말은 아니다. 먹잇감 때문에 사람으로 치면 서울-수원의 거리를 오가는 미련한 개미를 보고, 앉아서 먹이 잡는 거미의 기술을 배우라고 한다면 '대략 난감'이다. 너 줄 못 뽑니? 거미집 한 채만 쳐봐. 쉽고 안정적인 영업, 단기 고소득 보장!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모두의 희망사항이다. 비평도 권장할 덕목이다. 그렇다고 오픈런 비법 몇 개를 갖다 쓰라고 주는 건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주는 행위와 뭐가 다른가. 먹고살기 힘들다고 미친소를 키울 수는 없지 않는가.
고 편집위원 말대로 연극판은 힘들다. 만병통치약은 없다. 즉효약도 없다. 용어부터 시작해서 정극과 오픈런을 가르는 기준은 뭐고, 그렇게 갈라서 얻는 게 뭔지 답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극의 고립화도 비판해야 하고 오픈런의 통속성도 비판해야 한다. 질문은 많은 데 답할 사람이 적다는 것도 참 통탄할 노릇이다.
3) 고재열
재반론, 혹은 변명
- 백승무 ‘차이는 차별과 다름, 고재열의 '반상차별론'
에 대한 반론, 혹은 변명’에 대한 재반론 혹은 해명
연극IN 3호에 게재한 칼럼, ‘왕후장상의 연극이 따로 있나-가치의 발견에는 경계가 없다’에 대해 연극평론가 백승무 님께서 ‘차이는 차별과 다름-고재열의 '반상차별론'에 대한 반론, 혹은 변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일단 부족한 글에 진지한 반론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백승무 평론가가 보내준 글은 반론이라기보다는 필자가 보지 못한 연극계 이면을 지적한 보론의 성격이 강했다. 연극계에 한 발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방외자 입장에서 쓴 글에 대해 연극계 본류의 입장을 대신 전한 것으로 해석했다. 풀어서 말하자면 필자는 관객의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고 백승무 평론가의 반론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변명’한 것이다.
‘대중극’ ‘상업극’ ‘통송극’으로 불리는 ‘오픈 런 공연’의 장점을 활용하자는 필자의 주장에 대백승무 평론가는 ‘역할과 기능이 다르고, 자질과 특성이 이질적인 두 경향을 무리하게 저울대에 올려 균형을 잡으려 하고, 균형이 맞지 않으면 통섭의 이름으로 혼종교잡까지 해야 한다는 그 논지는 무리이고 억지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부분은 장점을 활용하자는 것을 ‘혼종교잡’으로 과잉해석한 것이 아닌가싶다.
“다음 ‘용어정리부터 하자. 대중성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점을 감안한다면 ‘대중극’보다는 ‘오픈런 공연’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수긍하기 어렵다. 연극을 구분하는 방법론에서 시기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나눈다는 것은 수긍하기 힘들다. <염쟁이 유씨>와 같은 작품은 오픈런으로 공연되고 있지만 작품성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지 않나? 무 자르듯 명확한 구분법은 없겠지만 시기적 구분은 수긍하기 어렵다.
평론가들이 오픈런 공연을 외면하는 이유에 대해 백승무 평론가는 “한국 연극평단의 특성상 보통 개막 첫 달에 비평이 쏟아진다. 이것 또한 레퍼토리 극장이 전무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따라서 개막 초기에 비평의 눈에 띄지 않으면 리뷰 수혜(?)를 받기가 사실상 힘들어진다... 당장 써야할 단기 정극도 많은 데 오픈런까지 오지랖을 넓히는 평론가는 극히 드물다. 생계형 전문평론가가 없기 때문이다. 2순위, 3순위 작품까지 필력을 발휘할 생산력 높은 평론가가 없다.”라고 설명했다.
‘연극평론 시장의 부재’를 원인으로 지목했는데 여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연극 시장의 위축과 연극평론의 부재는 궤를 같이 한다. 어느 순간 연극은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났다(연극이 변방으로 물러나서 연극 지면이 좁아진 것인지, 연극 보도가 줄어서 연극의 쇠락을 부채질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역시 연극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연극을 잘 만든다고 해서 연기를 잘 한다고 해서 연극의 메시지가 강력하다고 해서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는 극히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대학로에서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아무리 연출을 잘해도, 아무리 극본을 잘 써도 대중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간에 매개체가 되어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백승무 평론가는 “우리 사회에 대중적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연극평론가가 없다는 건 불행 중 불행이다. 그나마 공연(연극이 아니라)전문기자가 몇몇 있다는 게 최악을 면해주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최악이다. 지금 연극계는 움츠려 있다. 뮤지컬 시장이 지방 공연장까지 두루 대작뮤지컬을 공연할 만큼 성장한 것과 대비된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연극계는 최소한의 시장을 지켜내고 있다. 물론 ‘시장 내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연극영화과 학생들도 많다. 요즘 대학로에 가보면 딱 봐도 연극영화과 학생들로 보이는 관객이 많다. 그러나 다른 예술 장르가 동원으로 학생들을 공연장에 이끄는 것에 비해 자발적으로 이끄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시장 내 시장’에 머물지 않고 유의미한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는 대학로 연극에 경의를 표한다.
백승무 평론가는 “비평의 역할은 연극수준을 높이고 그 역량을 강화, 관극문화를 고양하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이 이런 역할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역할이란 목적을 추구한 결과로 따라오는 효용과 공익이다... 오픈런이 그 대중성과는 무관하게, 그 진지함과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예술 서열의 말단에 위치하는 것은 엄연한, 그리고 당연한 사실이다. 반상차별론이 상업극의 경제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탕평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비평의 영역에는 ‘발견’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임권택이 어떤 영화감독이었나? 출발부터 그가 예술영화 감독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도 기계적으로 상업영화를 찍어내는 감독 중 한 명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끝없이 발견해주는 노력에 그는 진정성으로 화답하고 거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학로 대중극 중에 발견해줄 만한 작품이/연출이/배우가 한 명도 없었을까?
그리고 “오픈런이 경제적 욕망 너머를 욕망한다면 과욕이다. 포도를 따려면 제 손에 쥔 사과부터 버려야 한다... 메이커의 네임벨류를 키워야 한다. 고선웅의 [뽕짝]을 두고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메이커가 고선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뽕짝]은 맥락을 가진다... 생계고에 찌들리는 정극 연출가들은 자주 오픈런의 유혹을 받는다. 그래도 안 한다. 예술과 상업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걸 가르친 선생들이 ‘웬수’다. 배고픔은 정극 연출가들의 자존심이고 숙명이다. 덕분에 비평이 관심을 가진다”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한국적 연극 현실에서 비평의 역할에 하나가 더해지는 것 같다. 바로 ‘위무’다. 연극적 순수성을 지켜온 연극인들에게 비평이라는 위무가 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관객몰이에 혈안이 된 연극에까지 이런 위무를 해줄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고선웅을 고선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스스로 고선웅이 되지 못할 때, 고선웅이 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발견해 줄 수는 없을까?
백승무 평론가는 정극과 대중극의 선긋기를 명확히 한다. “정극 연출가는 관객에게 아부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을 거는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비평 눈치도 보고 자신의 경제적 욕망이 들통날까봐 자기검열도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오픈런 비법 몇 개를 갖다 쓰라고 주는 건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주는 행위와 뭐가 다른가. 먹고살기 힘들다고 미친소를 키울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선긋기가 역으로 정극 연출가들의 창작성을 가둘 수도 있다고 본다. 그것이 국가권력이든 상업주의든 자기검열은 감옥이다. ‘평론가들이 어떻게 볼까?’ ‘이런 방법은 정극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편법이 아닐까?’ ‘정극 연출가는 이런 것은 안돼’라고 인식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또 상상력의 감옥이 되지는 않을까?
어찌되었건 백승무 평론가의 말대로 만병통치약도 없고 즉효약도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이 반론이 아니듯, 이 글도 재반론이 아니다. 답은 극본에, 연출에, 연기에 있을 것이다. 연극계 방외자로서 미력이나마 보태기 위해서 본 연극은 트위터에 페이스북에 블로그에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쓴 만큼 만든 만큼 해낸 만큼 연극인들이 인정받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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