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에서 치른 우파적인 개막식 vs
자본주의 국가에서 치른 좌파적인 개막식
주> 이 글은 시사IN 김동인 인턴기자의 자료도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올림픽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행사는 바로 개막식이다(한국은 예외일 수 있다. 금메달이 달린 경기나 축구경기 시청률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것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올림픽 개막식은 원래 지금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선수 퍼레이드는 1908년 런던 올림픽 때, 비둘기 대량 방출은 1924년 파리 올림픽 때 시작되었다. 장거리 성화 봉송 등 올림픽 개막식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체계를 갖춘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의 일이다. 체제 선전의 필요성이 절실했던 나치 정권은 개막식에 유별나게 공을 들였다. 집단 군무와 카드섹션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에 맞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첨단기술의 향연으로 치러졌다.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간 자존심 대결인 양 치러진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거치면서 올림픽 개막식은 더 웅장하고 화려해졌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은 한강에서 ‘강상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주의 균형과 조화를 무용극으로 표현한다는 콘셉트였는데, 올림픽 개막식 중에는 소박한 축에 들었다.
최근 올림픽의 스케일은 대략 이렇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1만3000명에 이르는 공연자가 등장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1만5000명이 등장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는 200만ℓ 물을 스타디움에 채웠다. 더 크게, 더 화려하게, 더 소란스럽게. 이것이 최근까지 치러진 올림픽 개막식의 추세였던 셈이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공장 굴뚝과 노동자
그런 의미에서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은 세계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뮤지컬 형식을 빌린 개막식에 셰익스피어·윌리엄 블레이크·조앤 롤링과 같은 작가, 피터팬·해리포터·메리 포핀스 같은 캐릭터, 여기에 롤링스톤스·퀸·섹스피스톨스·비틀스 같은 밴드의 음악을 영상에 등장시킴으로써 ‘저들이 모두 영국에서 나왔나?’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폴 매카트니의 ‘헤이 주드’ 후렴부 ‘나나 나나나나 헤이 주드’를 함께 따라 불렀다.
베이징 개막식 1140억원, 런던은 482억원
4년 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워낙 화려했기에 런던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처음부터 “베이징과 겨룰 생각이 없다”라며 선을 그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행사 비용이 1140억원이었던 데 비해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 비용은 482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용의 축소가 감동의 축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두 개막식은 여러 측면에서 결이 달랐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을 중국 5세대 영화감독인 장이머우가 맡았듯 런던 올림픽 역시 영화감독인 대니 보일이 총감독을 맡았다. 두 감독의 영화 스타일만큼이나 개막식은 대비되었다. <붉은 수수밭> <국두> <진용> 등 초창기 영화에서 역사 속 개인에 천착했던 장이머우 감독은 후기 영화인 <영웅> <연인> <황후화>에 이르러서는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며 ‘중화’를 내재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데, 이런 경향이 개막식에도 반영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을 역이용해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오페라 <투란도트>를 통해 선보인 스케일의 미학을 더욱 확장해 보여주었다.
대영제국의 영광과 함께 그 그늘도 조명
반면 아일랜드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북서부 랭커셔 등 변방에서 자라 <트레인스포팅> <28일 후>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을 연출한 대니 보일 감독은 중심을 강조하기보다 여러 주변적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내 부담 없이 지켜보면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이미지가 아닌 서사로, 스케일이 아닌 스토리로 승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회주의 중심국가인 중국에서 치러진 올림픽에서 가장 우파적 가치인 ‘민족’이 강조되었고, 자본주의 중심국가인 영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는 무상 복지 등 좌파적 가치가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베이징 개막식의 서사구조는 찬란한 역사를 지닌 중국이 이렇게 발전해 ‘하나의 세계, 하나의 꿈’의 중심에 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장이머우는 중국이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던 당나라 시절의 문화를 호출했다. 장이머우는 평소 “성당(盛唐) 문화는 중화 문화의 최고봉이다. 곧 중화의 문명이 성당처럼 불끈 일어나 세계인의 긍지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해왔다.
이 같은 염원을 강조하려는 듯 장이머우 감독은 개막식에서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려 전통을 더욱 화려하게 부각시켰다. 출연진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사상 최대의 불꽃놀이까지 어우러져 무결점 공연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가 줄을 타고 스타디움 벽을 달려 성화를 점화하는 등 무대도 입체적으로 활용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용
그러나 이런 입체적인 무대로 보여준 중국의 모습은 그리 입체적이지 못했다. 소수민족 전통의상을 입고 나온 아이들은 하나가 된 중국의 아름다움만 노래했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조국에 바치는 송가’를 부른 린 미아오케는 나중에 부분적으로 립싱크로 노래를 부른 것이 탄로났다. 실제 노래를 부른 소녀는 뻐드렁니 때문에 무대 뒤에 숨어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스타디움 건설을 위해 강제 이주된 사람도 100만명이나 되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흘린 민중의 눈물은 철저히 외면됐다.
'경이로운 영국'의 모습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공동체
반면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서사구조는 산업혁명의 발생지였지만 오늘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며 사는 ‘경이로운 영국’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니 보일은 이를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캘리번의 대사 “두려워하지 마라, 섬 전체가 즐거운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로 집약해서 표현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환경오염까지 개막식에 담아낸 대니 보일 감독은 성화 봉송 주자를 메인스타디움 건설 노동자들이 맞이하도록 했다. 안전모를 쓴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입구에서 성화 봉송 주자를 맞이했다. 영국의 유명한 아동병원인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GOSH)과 무상의료 제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s)를 형상화한 공연에는 실제 간호사들이 무용수로 출연했다.
평범한 영국 가정의 모습이라고 보여준 장면에서는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이 부부로 등장했다. 평범한 신세대의 모습도 흑인 남녀로 설정했고, 자본가 그룹을 보여준 장면에는 흑인과 아시아인이 끼어 있었다. 백미는 영국에서 최초로 동성 간 키스신을 방영한 드라마 <브룩사이드>의 일부분을 방영한 것이었다.
장이머우 감독은 조상들의 4대 발명품(종이·인쇄술·나침반·화약)을 통해 중국이 세계의 중심임을 세계인에게 환기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이 4대 발명품을 부각하기 위해 바닥 LED판 등 서양의 테크놀로지를 최대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애초 중국 정부가 개막식 예술고문으로 선임한 것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었다(스필버그는 중국 정부의 인권정책에 반대해 감독직을 중도 사퇴했다).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설계는 스위스 건축가 에르조그와 드 뫼롱에 맡겼다. 이처럼 중국은 자신들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서양기술을 최대한 끌어들였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폴 매카트니가 <헤이 주드>를 부르고 있다(위 왼쪽).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 전통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위 오른쪽).
맥락이 있는 공연, 웃고 즐기는 가운데 영국 대중문화의 힘 실감!
반면 대니 보일은 셰익스피어, 해리포터, 비틀스 등 영국에서 발원한 세계적인 콘텐츠를 활용하되, 국적을 부각하지 않고 전체적인 맥락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영화감독 케네스 브래너가 <템페스트> 구절을 낭송하게 하고, 조앤 롤링이 <피터팬>의 첫 구절을 낭송하게 하고, 영국 육상선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불의 전차> 주제가를 ‘미스터 빈’의 희극배우 로완 애킨슨이 익살스럽게 연주하게 하는 식이었다.
음악 연출도 비슷한 방식이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경우 니켈백, 앨라니스 모리셋, 에이브릴 라빈 등 ‘캐나다 출신으로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성공한 가수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폐막식을 꾸몄다. 반면 런던 올림픽은 신세대 록밴드 악틱몽키스가 비틀스의 ‘컴 투게더(Come Together)’를 연주하게 하고, 신세대 밴드 ‘투 도어 시네마 클럽(TDCC)’의 보컬 알렉스 트림블이 음악감독인 언더월드가 작곡한 성화 봉송 주제곡 ‘캘리번의 꿈(Cali ban’s Dream)’을 부르게 함으로써 신구 세대의 조화를 꾀했다.
이런 개막식을 복기하면 '영국 히트음악 메들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1970년대 ‘록음악 전성기’, 1980년대 매드체스터(Madchester) 사운드(시대적 음울함), 1990년대 브릿팝, 2000년대 ‘장르적 다양화’를 보여주는 음악을 차례로 연주해 영국 뮤지션을 통해 현대 대중음악의 흐름을 개괄하도록 만들었다.
문제는 이처럼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개막식을 우리가 얼마나 읽어냈느냐 여부이다. 방송 3사의 올림픽 개막식 중계 중에서 미리 배포된 보도자료 이상을 읽어내는 곳은 없었다. 개막 문화행사에 담긴, 반성과 성찰의 메시지를 읽어내기는커녕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모습이라고 이를 오독한 언론사도 있었다. 개막식은 ‘평범하고 있는 그대로의 영국’을 보여주는데, 이를 중계하는 한국 아나운서는 영국 귀족 패션을 선보이며 귀족 문화를 오마주하기도 했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의 예술 총감독으로는 임권택 감독이 선임되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리가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알린 행사라고 자랑하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을 외국인들은 ‘성화 점화 때 비둘기를 태워죽인 끔찍한 개막식’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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