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하면 문경새재인데... 그 다음이 없다.
여행감독인 나도 그랬다. 지난해까지는... 그런데 지난주말 문경새재를 가지 않는 1박2일 문경 여행을 연출했다.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앞으로 더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문경새재를 걷지 않았지만 문경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가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코스가 만족스러웠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좋았고, 쨍하면 쨍한대로 좋았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가 어우러진 최고의 여행이었다.
@ 첫째 날 : 경상도 특히 TK지역에서 가장 개방적인 고장, 문경
우리에게 문경의 첫 풍경을 열어준 사람은 관광두레PD인 천금량 쌤이다. 기획자의 자질 중 최고의 자질은 '일을 개발하는 능력'인데 천 쌤은 그 능력이 탁월하셨다. 문경시에서 부탁한 것도 아니고, 돈 나오는 일도 아닌데, 우리의 안내자 역할을 자처하셨다. '천금량 보유도시'라는 것은 문경시의 복이다.
문경의 첫맛은 파밀리아가 열어주었다.
지난해 문경 관광반상회에 여행 특강을 갔을 때부터 점 찍어 두었던 곳이다. 문경에 도시보다 더 도시적인 레스토랑을 만들고 싶었다는 주재훈 셰프의 말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5월에 미리 와서 음식을 먹어 보았는데 역시나 기대이상이었다. 인당 2만원의 오마카세 방식 세트를 주문했는데 가나다라브루어리의 오미자에일을 곁들여 주었다.
파밀리아가 문경의 시작점으로 손색 없는 이유는 레스토랑이 자리 잡은 위치, 레스토랑의 안팎의 인테리어와 주변 건물과의 조화 그리고 음식맛이 좋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한옥 안마당을 두리번 거리거나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염색 공방을 둘러보며 망중한을 즐길 수 있다.
주암정은 하나의 우주였다. 버려진 정자를 한 어르신의 집념이 복원시켰는데 이후 시민운동으로까지 발전해서 지금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나의 소공원이 되었다. 자신이 없을 때 오더라도 차 한 잔 하고 가라며 전기포트를 설치해 두신 어르신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코로나19 국면에 방역을 위해 닫았는데 천금량PD님의 연락을 받으시고 재개장 해주셨다.
문경에 대한 천금량PD님의 설명 중에 가장 인상적인 말은 경상도 특히 TK 지역에서 가장 개방적인 고장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경상도 지역과 달리 문경은 텃세가 없다는 것이었다. 천PD님은 그 이유를 문경새재에 한 때 90여 개의 주막이 있어서 외지인과의 교류가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고 분석했는데 일리가 있었다. 화수헌과 산양정행소 등을 관리하는 리플레이스팀과 같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준 것은 그런 개방성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양조장을 빵집/카페로 바꾼 산양정행소와 근대 의상을 대여하는 볕드는날 그리고 한옥 카페인 화수헌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인스타 명소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가족 체험여행 위주로 혹은 스토리텔링 위주로 여행을 개발했는데 요즘은 인스타 스팟을 만드는 것으로 여행을 개발한다. 입소문이 빠르기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문경시는 천금량 보유도시이면서 또한 이종기 보유도시이기도 하다. 이종기 박사님은 오래전부터 알던 분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술 전문가시다. 이 박사님을 문경에 붙든 것은 바로 오미자다. 한국만의 술을 만들기 위해 평생 고민해오던 이 박사님과 오미자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오미자는 원산지가 우리나라다. 다섯가지 맛이 어우러진다는 철학은 한 음식 안에서 우주를 구현하는 우리의 음식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오미자와인과 오미자 스파클링와인 그리고 몇 가지 증류주를 개발하셨는데 우리 일행은 오미자 스파클링와인을 시음해 보았다. 대부분 오미자를 직접 따서 그 자리에서 먹어본 사람은 없을텐데 오미자를 바로 따면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상적인 맛이 났다. 우리가 묵은 숙소가 바로 인접해 있고 식당가와 카페가 그 중간에 있는데 단체 관광객 위주로 영업을 해서 개별 여행자가 이용하는데는 제한이 있었다. 잘 연계한다면 좋은 미식 블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문경에 가면 '주류 탐사'로 일정을 짜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음식은 거들 뿐~) 오미자 와인을 만드는 오미나라를 비롯해 요즘 가장 힙한 막걸리를 만드는 문경주조와 두술도가가 있고 <캠핑클럽>에 나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가나다라브루어리 등 좋은 술도가가 많다. 거기에 문경은 전국 오미자 생산량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곳이라 각종 오미자 음료가 개발되어 있다. 음료 여행의 최적지가 아닌가싶다.
술과 음료를 중심으로 일정을 짜고 여기에 문경의 음식을 페어링 한다면(이를테면 약돌돼지구이) 훌륭한 미식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우리 여행자 플랫폼의 '술로미식회' 멤버들과 당일투어로 함 와보려고 한다. 문경이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당일 여행지로도 괜찮을 듯 싶다.
첫째 날 저녁에는 문경새재 달빛트레킹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비로 트레킹이 어려워졌는데 새재로778에서 열린 낭만발전소 콘서트에서 그 이상의 감동을 맛보았다. 낭만발전소 윤민영 매니저는 입구에서 방문자 개인정보메모와 온도 측정을 하며 철저한 코로나방역으로 손님을 맞았다. 하지만 비가 거세지면서 행사를 실내에서 진행했는데 우리는 달빛트레킹을 못한다는 사실도 잊고 공연을 집중해서 보았다. 마치 유럽 여행을 하다 마을 축제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문경새재 달빛트레킹을 제안하신 분은 문경 참콩물의 권혁주 대표였다. 문경에 귀향한 후 문경관광반상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시는 권 대표님이 '문경새재를 문경새재답게 경험하는 방법'이라며 제안해 주셨는데 비 때문에 구현하지 못했다. 다음 문경 여행 때 꼭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다.
@ 둘째 날
둘째 날 우리 일행의 아침을 열어주신 분은 무형문화재 사기장 미산 김선식 선생님이셨다. 사재를 털어 만든 찻사발 박물관에서 문경 찻사발(막사발)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고 우리를 가마로 안내했다. 김선식 선생님은 '장작부심'이 대단하셨다. 우리 전통 장작가마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작을 패서 껍질을 벗기고 10년 정도 말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막사발의 불완전과 우연의 미학이 흥미로웠다. 전기 물레가 아니라 전통 발물레로 만들면 좌우 대칭이 완벽하지 않은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사람들이 막사발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런 미세한 비대칭 때문이라고. 그리고 재가 날리는 구석에 있던 막사발은 예전에 불량품 취급을 받았는데 지금은 그런 변주를 오히려 더 높게 평가한다. 암튼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그릇이 있다면 그릇에 담을 음료가 준비되어야 하는 법, 차의 인문학을 하시는 김세리 박사님을 특별히 모셨다. 잎차로 차를 내려주기도 했지만 이날 목표는 김선식 선생님의 찻사발로 말차를 마시는 것이었다. 미리 준비한 말차를 힘차게 격불해서 찻사발로 나눠 마셨다. 문경에서만 할 수 있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경시청 조석제 주무관님이 오미자청과 오미자가루를 제공해 주셔서 오미자 말차도 시음해 보았다.
일행은 김선식 선생님의 찻사발을 들고 여행 내내 두루 활용했다.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고 가나다라브루어리의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 또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찻사발은 머그컵의 훌륭한 대용품이었다. 앞으로 문경 여행을 할 때 이런 찻사발을 먼저 구입하게 하게 가나다라브루어리 문경주조 두술도가 화수헌 등을 두루 돌면 재밌을 것 같다.
좋은 그릇과 좋은 차가 있으면 좋은 음악이 있어야 할 터, 우리 여행팀의 보배인 하소라 쌤이 가야금을 켜기 시작했다. 김세리 쌤이 차를 내릴 때 보조적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해 차회 마지막 무렵에는 단독 공연에 나섰다. 차를 내리는 정자는 가야금 연주를 하기에도 최선의 장소였다.
첫째 날이 마음 편히 문경을 여행하는 날이었다면 둘째 날은 그런 문경에서 받은 느낌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표현해 보는 날이었다. 미리 기획된 버스킹이기는 했지만 준비를 과하지 않게 하고 '예술의 장소성'에 방점을 찍었다. 이런 장소 특정 예술이 우리 여행팀의 큰 강점이다.
둘째 날 마지막 코스는 단산 활공장이었다. 1000m가 안 되는 산이지만 주변에 산이 없어서 시야가 넓게 열리는 곳이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곧 캠핑장이 들어서는 곳이다. 그동안은 모노레일과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만 쓰여서 낮시간에만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와보니 최고의 석양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최고의 시간을 팔지 않고 장소만 팔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일행은 함께 석양을 즐기며 사진을 찍었다.
문경시에 제안한 것은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맞아서 문경이 레포츠의 중심도시임을 선언하라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국토 정중앙은 양구지만 남한의 중심지는 문경이다. 문경에서 만나면 모두가 공평하게 이동하게 된다. 3만불 시대가 되면 동호회 활동이 활발할텐데 문경에서 회합할 수 있도록 문경시가 판을 깔면 좋을 것 같다.
문경 단산에서의 시간은 천시와 지리와 인화가 어우러진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아닌 낮시간이었다면 이 언덕은 단지 뙤약볕을 직접 받는 곳이었을 뿐이다. 아재들이 잠시 말없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힐링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을 통해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경에서의 모든 순간이 좋았지만 특히 이때가 좋았다.
문경 단산을 여행 코스로 제안해 주신 분은 문경시청의 고상규 계장님이다. 캠핑장이 조성되는 이곳을 전국적인 '차박의 성지'로 만들고 싶어하셨는데 직접 가보니 '차박의 성지'보다 '백패킹의 성지'로 구축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경이 레포츠 1번지가 되기 위해서는 좀더 친환경적인 방식을 도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정의 마지막은 플라멩코 무용가 마리솔 최원경 쌤과 하소라 쌤의 콜라보 무대였다. 일전에 남원 여행을 갔을 때 둘이 장르는 다르지만 예술적 성향이 비슷해서 콜라보 하면 좋은 공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는데 이런 멋진 무대를 만들었다.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는 아티스트들이다.
우리는 여행팀에 이런 아티스트가 있기 때문에 이런 버스킹 무대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는데(스피커도 집에서 쓰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내가 가져와서 사용했다), 다른 여행팀의 경우 문경시에서 지역 아티스트 지원 사업과 연계해서 이런 버스킹 무대를 연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훌륭한 무대라서 누구든 감동받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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