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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한국기행

타이틀을 잃어버린 도시, 나주에 다녀오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20. 2. 17.

그 겨울의 나주곰탕 한 그릇

 

그리고 타이틀을 빼앗긴 도시, 나주

 


@ 울컥한 날의 나주곰탕 한 그릇

2012년 대선이 끝나고 사흘 쯤 지났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신대 한의대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기 위해 나주를 찾았다. 나주의 겨울은 황량했다. 단지 스산한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깊은 절망이 읽혔다. 20년 전 김대중 후보가 졌을 때 한겨레신문 박재동 화백은 가슴이 뻥 뚫린 사람 그림으로 광주시민의 심정을 표현했는데 그 모습을 실제로 보는 느낌이었다.

특강을 하면서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졌다. 그들에게 이 상황을 납득시키기도 쉽지 않았고 새로운 희망을 말하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사람의 병만큼 세상의 병에도 관심을 갖기를 호소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도 제시 못했다는 것을 내내 어두운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의장을 나서는데 행사를 주최한 한의사가 국밥 한 그릇 먹고 가라며 차에 태웠다. 가볍게 날리는 눈발을 가르며 차는 국밥집으로 향했다. 거리는 한산했는데 국밥집은 제법 분주했다. '나주곰탕 하얀집' 나중에 그 집이 아주 유명한 음식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맑은 국물에 숟가락을 밀어 넣는데 뭔가 울컥했다. 뜨거운 국물을 털어 넣으니 뱃속 저 밑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철저히 그날의 기분 탓이었겠지만 음식이 힐링이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말없이 국밥을 삼키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고요 속에서 오직 깍두기 씹는 소리만 허공에서 부딪쳤다. 다 먹은 사람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남은 자리에는 빈 발우처럼 국밥 그릇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먹고 난 자리가 그렇게 정갈한 모습을 지금껏 보지 못한 것 같다.

‘나주곰탕 하얀집’은 전라도 양반가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음식이다. 정갈하고 담백하다. 이름은 곰탕이지만 국물이 맑다. 주인장의 설명에 따르면 좋은 머리고기 양지 사태 목심을 넣고 삶아서 우려내는데 비율이 중요하다고 한다. 재래식당으로는 드물게 오픈형 주방이라 국물 우려내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100년 전통의 식당이라는데 그동안 가족간 갈등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은 적이 있다. 듣자니 잘 해결되었다고 한다. 나주 현지 분들은 이곳 말고 다른 나주곰탕집을 추천하기도 하는데 외지인인 나에게는 이곳도 충분히 맛있었다. 기대하는 맛 정도는 언제나 만족시켜 주는 집이다.

‘나주곰탕 하얀집’에서는 찬밥을 뜨끈한 국물에 토렴해서 밥을 말아서 낸다. 워낙 정갈해서 먹던 밥을 넣었을 것 같은 의심은 들지 않는다. 밥을 따로 먹으면서 국물을 떠먹는 것보다 이렇게 토렴해야 밥이 국물과 더 잘 어울린다고 해서 이렇게 놓는데, 어제 지은 식은 밥을 국과 내야 해서 궁리한 방식이라 한다. 아무튼 그 국밥에 잘 익은 김치를 올려서 먹으면 완벽한 궁합이다.

오늘 아침 8년여 만에 나주에서 다시 나주곰탕을 먹었다(이번에는 사매기곰탕에서). 전날 밤 몸살기를 느꼈던 터라 나주곰탕이 더 간절한 아침이었다. 역시나 좋았다. 좋은 여행친구들과 함께 먹어서 더 든든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8년 전 영혼까지 감싸주던 그 곰탕맛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음식 맛의 절반은 기분이니까.




@ 타이틀을 빼앗긴 도시

지난 주말 여행동아리 회원들과 여행한 1박2일 나주의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타이틀을 빼앗긴 도시’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돌이켜보니 나주가 빼앗긴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전주와 나주의 앞 글자를 따서 전라도라 불렀는데, 나주는 전라도 전통 도시의 대표성을 전주에 빼앗겼다.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말은 있어도 나주 한옥마을이라는 말은 없다. 단지 ‘나주읍성’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 목사가 부임하던 고장에서 현감이 부임하던 고장으로 격하된 셈이다. 

근현대 들어서 나주는 광주에게 남도 중심도시 타이틀을 빼앗겼다. 일제 강점기 까지만 하더라도 호남의 유지들은 주로 나주에 살았고 이들의 자녀들이 광주까지 기차로 통학했다. 그 와중에 기차에서 조선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붙어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당사자들은 나주 학생들이었지만 ‘광주 학생 운동’이 되었다. 

전라남도 도청이 목포로(행정구역상 무안이지만 생활권은 목포) 이전하면서 나주는 남도 중심도시 타이틀을 되찾아 오지 못하고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다. 목포에는 이것만 빼앗긴 것이 아니다. 영산포를 중심으로 ‘삭힌 홍어’가 시작되었지만 ‘홍어의 도시’라는 이름도 목포에 빼앗겼다. 목포는 민어와 함께 홍어의 도시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KTX에 이어 SRT까지 정차하는 은근 교통의 요지지만 ‘게스트하우스의 성지’라는 타이틀은 순천에 빼앗겼다. 순천만정원박람회나 여수엑스포와 같은 대형 국책 행사가 ‘인스타의 성지’나 ‘여수 밤바다’와 같은 아이콘을 만들었지만 나주에는 그런 계기가 없었다. 그냥 배 하나로 근근히 버텼다.  

타이틀을 빼앗긴 도시 나주가 타이틀을 되찾아오는 계기를 열어준 것은 나주곰탕이다. 나주곰탕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각광 받는 음식 중 하나로 수도권에서 나주곰탕집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맛있는 남도 밥상에서 국밥 하나 기억해 주는 셈인데 이것으로는 미약하다.

색다른 홍어 다큐멘터리 <핑크 피쉬> 제작을 진두 지휘했던 송일준 광주MBC 대표님이 ‘나주 홍어 대탐험’을 제안해서 여행을 기획했는데 나주 목서원에 자리잡은 39-17마중의 남우진 대표님이 나주를 나지막히 안내해 주었다. 나주 토박이는 아니지만 문화공간을 일구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시 재생을 하고 있는 남 대표는 나주에 타이틀을 되찾아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송일준 대표님이 소개해 준 남우진 대표 그리고 남우진 대표님이 소개해 준 남파고택의 박씨 종손 어르신 그리고 째깐한 박물관 원장님이 1박2일 동안의 나주 여행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그의 얼굴을 봐서’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고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한국형 꽌시’인 셈이다. 덕분에 이번 여행은 1박2일의 ‘나주학’ 현장 답사가 되었다.

 

 

맛집을 중심으로 한 전주 & 나주 여행 후기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

@@ 전주편(임봉수 여행감독 감수) 

@ 서울식당 - 막걸리 한상 : 수요미식회에 나온 '용진집'이 유명하지만 '현지인이 관광객을 피해 가는 맛집'은 서울식당이다. 그릇이 복층으로 나온다. 용진집은 요새 리필이 안 된다는데 이 집은 된다. 홍어애탕을 끓여줘서 골목 어귀에서부터 진한 삼합의 자장을 느낄 수 있다. 

 

 

@ 임실슈퍼 - 가맥 : 전주 3대 가맥집(전일갑오, 영동슈퍼, 초원편의점)에는 들지 못하지만, 전일갑오로 가려다 자리가 없어서 이곳으로 갔지만, 충분히 좋았다. 가맥집 분위기보다 호프집 느낌에 가깝지만, '현지인이 관광객을 피해 가는 맛집'으로 인정. 

 

 

@ 호성순대 - 모듬국밥 : 함께 갔던 백곰막걸리 이승훈 쌤이 '인생 국밥집'이라 극찬한 곳. 고춧가루 거품이 보글보글한 상태로 나와서 칼칼할 것 같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담백했음. 내장과 부속은 탱글탱글하고. 평양쪽 육수 국물을 연상하는 하는 맛, 광주 영명국밥과 함께 '모듬국밥 투 탑'으로 인정. 

 

 

@@ 나주편(남우진 여행감독 감수) 

@ 사랑채 - 남도 한정식 : 남도 한정식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는 집은 아니지만 '가성비 좋은 남도 한정식'을 만날 수 있는 집. 1인당 2만원에 서울에서 4만원급 한정식당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을 받을 수 있다. 전날 전주 서울식당은 음식을 모두 한 판에 내놓아서 따뜻하게 먹어야 할 음식을 차갑게 먹어야 해서 아쉬웠는데 이 집은 차갑게 먹어도 되는 밑반찬을 빼놓고 모든 음식을 뜨뜻하게 먹을 수 있게 순서대로 내주어서 좋았음. 

 

 

@ 사매기곰탕 - 나주곰탕 : 나의 소울푸드 나주곰탕, 그래서 나주곰탕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편인데, 이 집도 충분히 좋았지만 살짝 아쉬운 점이 있었다. 정갈하게 나왔지만 고기가 다소 퍽퍽한 느낌이었고 국물의 깊이감도 조금 엷었다. 곰탕은 하얀집이나 노안집을 추천. 곰탕맛보다는 이집 아저씨가 하는 '째깐한 박물관'이 인상적이었다. 곧백수 주제에 조선시대 양반들이 썼다던 곱돌 담배곽을 질러버렸다. 차통으로 쓰려고.  

 

@ 영산강홍어 - 홍어정식 : 목포 오거리식당에서 삭히지 않은 홍어를 먹고 난 뒤부터 최애 홍어는 사실 생홍어가 되었다. 그래도 홍어애-홍어회무침-홍어삼합-홍어전-홍어찜-흑산도 홍어-홍어코-홍어튀김-홍어애탕(마지막 홍어애탕은 일찍 나와서 못먹었다)까지 홍어 만렙 달성에 의의를 두고 싶다. 홍어의 A부터 Z까지 느낄 수 있는 곳. 숙성실 견학도 꼭 해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