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닷컴> 연속기획,
‘강남좌파를 말한다’ 제9편
"강남좌파의 4가지 유형"
홍익대 사회학 강사인 박치현씨가
'강남좌파 논쟁'의 진전을 위해
강남좌파의 유형 구분을 시도한
글을 보내와서 게재합니다.
강남 좌파의 발생조건 : 몇 가지 유형을 탐색하고 새로운 유형을 예측하다
박치현(홍익대 사회학 강사)
강남 좌파라는 매우 저널리즘적인 주제에 대해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라는 저널리스트의 강요(?)에 대해, 저널리즘의 비과학성에 끌려갈 수 없다고 고상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학자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저널리즘이 너무 비과학적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소극적 기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을 것 같다. 확실한 것은 강남 좌파라는 말 자체가 학문적으로 규명하기엔 무리가 따르기 쉬운 용어라는 점이다.
하지만 고재열 기자 말마따나 상식적으로 많은 네티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학문적 규명 이전에 일단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한다. 학문적 규명은 나중의 일이다. 항상 그러하듯,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뒷북을 치니까. 따라서 나 자신은 그냥 관심을 기울인다는 입장에서 쓰도록 하겠다. 미국에서는 이런 어설픈 썰을 풀어서 사고 실험을 하는 사회학을 comic sociology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코믹사회학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펼치는 부족하지만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이 글은 강남 좌파란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그들이 어떤 존재조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지를 묘사해보고자 한다. 강남 좌파는 이른바 유물론적 입장에서 보면, ‘존재와 의식이 괴리’되는 이들이다. 자신의 계층에 걸맞지 않는 사회인식을 가진 사람들. 종부세를 내고 싶어하는 이들. 부동산 불로소득에 죄의식을 갖는 이들. 이 글은 이런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탐색하려는 시도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강남 좌파’의 이미지
기본적으로 내 자신 강남 좌파가 아니다. 강남 사람들은 ‘때깔’이 너무나 다르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강남의 어떤 동네게 가면 다른 인종이 살고 있다, 여기는 다른 세상이란 생각이 솔직히 든다. 이런 시각 때문인지, 나는 어쨌든 강남 사람인 강남 좌파에 대해 다소 혐오감을 갖고 있다. 경제적으로 곤궁하지 않은 좌파의 이미지란, 세상물정 모르는 청소년의 순진한 신앙심이 떠오른다. 순수하고 해맑고 착하다.
그러나 현실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뭔가 붕 뜬 것 같고 거리가 느껴진다. 그들이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발언을 해도 시니컬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경제적 보호 덕택에 신념이 공격받지 않고 일관될 수 있다. 시간도 많이 낼 수 있다. (과거에 대학생과외를 자본주의 시스템과 타협하는 불로소득 행위로 공격하는 공감대가 존재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생계유지가 가능한 학생들에게만 가능하다. 이러한 공감대로 인해 공격받은 많은 가난한 고학생들이 보수파가 되었을지 누가 아는가. 강남 좌파도 마찬가지도 가진 자의 여유로 고결한 좌파적 신념을 내면화하고 주장할 수 있다.) 다만 부의 유혹이 존재할 뿐이다. 부의 유혹이야 말로 좌파연하는데 가장 강력한 유혹일 수 있지만, 그것이 생계에 시달리는 이들보다 강할까.
돈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벌이로 타협하는 생계형(?) 우파(소위 잘난 진보적 엘리트들에 의해 어리석은 대중이라 불리는)들에게 닥치는 생계 유혹의 강도가 당연히 부의 유혹보다 훨씬 크다. 많은 이들이 생계형 기대를 갖고 이명박을 찍은 사회가 한국이다. 일자리에 목을 매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88만원 세대인, ‘20대’가 가장 많이 지지한 사람이 바로 이명박이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한국사회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걸맞는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문화가 정착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 결과 고소영 정부가 탄생한 것이고, 종부세 무력화 시도에서 이 정부는 나름 올곧게 자신의 권력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철저한 계급정치를 실행하고 있다. (이제는 좀 서민들이 고소영들처럼 철저히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이런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물론 대부분의 강남 좌파들은 이른바 ‘취향좌파’일 것이므로, 내가 묘사한 것처럼 신념에 차있거나 하지는 않다. 물질적 조건이 야기하는 ‘존재와 의식의 괴리’가 그것을 가로막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내 말은, 적어도 신념을 가지면 그것을 유지하는데 물질적 풍요가 보호막이 되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경제적 조건에 걸맞게 사고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우린 어차피 소수의 예외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소수이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그 어떤 예외를...
1> 노블리스 오블리제형 강남좌파 (기본형 강남좌파)
-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새로운 귀족’, 그들이 바로 강남좌파다
강남 좌파에 대한 이미지를 인상기처럼 대충 썼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겠다. 내가 방금 말한 강남 좌파 이미지에 입각하여 도출할 수 있는 강남 좌파의 첫 번째 유형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유형이다. ‘귀족’답게 명예로운 처신을 하는 입장이다. “부자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일종의 자부심 섞인 규범이다. 부자로서 이웃을 돌아보고 가능한 한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일종의 귀족주의이기 때문에, 천민과의 구별짓기에 토대하고 있다.
신앙인의 자선행위로 설명하면 이러한 구별짓기의 형상이 그려진다. 우린 독실한 신앙인의 자선문화를 보고 들어 알고 있다. 신앙인은 ‘구원받은 자’로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다. 하지만 그 뒤에서는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한다. 타자들과의 구별짓기가 작동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말대로 자선은 그것을 받는 이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덜컥 남의 호의를 잘 받지 않는 것도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행위인 것이다. 강남 좌파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자’로서 가난한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가난해지고 싶지는 않다. 자신이 가난하지 않다는 걸 다행으로 여길지 모른다. 비난할 건 없다. 누가 가난하게 살고 싶겠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서의 강남 좌파는, 1987년도에 넥타이 부대로서 등장해서 민주화에 힘을 실어주다가 나중에 후보단일화 실패 및 3당 합당을 거쳐 노동자들의 파업마저 반대했던, 이른바 ‘중산층의 보수화’를 떠오르게 한다. 강남 좌파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충돌이 오면 자신들의 이해관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선에 가까운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위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미국의 최상위 부자들의 마인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손쉽게 돈을 벌되, 흔쾌히 내놓는다. 이건희 회장도 이들을 따라 해보려고 스웨덴의 발렌베리 재벌 가문을 방문했으나, 이건희 회장은 발렌베리 모델을 수용하지 않았다. 하긴 발렌베리 가문도 노동계급들의 요구로 인해 반강제로 자신의 것을 내놓은 것이고, 록펠러도 미국민들의 비난으로 록펠러 재단을 세운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들은 이건희에겐 너무 가벼운 국민들이다. 요구하지 않는데 줄 리가 있나... 미국국민들이 아직까지도 아메리칸 드림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많은 부자들의 자선 때문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전혀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미국이 평등하고 부자가 선하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쇼(show)는 될 수 있겠다. 가끔은 이 쇼를 해줘야, 그나마 사회가 평등해지고 격심한 사회적 혼란을 피할 수 있다. 사회적 안정은 궁극적으로 부자에게 이득이 된다. 미국 뉴딜 시대의 영리한 미국 부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우둔한 부자들이 많아진 레이건 이후 신자유주의의 ‘흡혈귀 금융경제’는 현재 좌초되는 중이다.
2> 부채의식형 강남좌파 (응용형 강남좌파)
- 386 세대와 마찬가지로 ‘강남좌파’는 부채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강남좌파들의 마인드는 ‘부채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386세대의 마인드를 되집어봄으로써 유추할 수 있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소위 386세대들이 ‘부채의식’ 같은 걸 가졌다는 연구가 있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에 대한 죄책감인데, “내가 이렇게 ‘혜택’을 받는 것은 다 가난한 민중들의 땀을 통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86들은 과감하게 거리시위로 나섰고, 심지어 공장으로 들어갔다. 당시 그들은 부채의식에서 비롯한 윤리적 에토스로 무장했다. 부채의식은 실천으로 이어졌고, 시간이 지나 정권을 창출했다.
세월히 흘러 그들이 기득권층이 되자, 그들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윤리적 저돌성이 권력의 힘에 굴복한 셈이다. 그들은 사교육 천국을 만들었고, 부동산 투기문화의 수혜자가 되었다. 결국 노무현과 함께 건설토건국가의 지상명령을 그대로 유지 및 확대재생산해서, 이명박 정권이 강림하는 길을 예비했다. 386의 모습은 진보에 대한, 민주화에 대한 광범위한 회의를 낳았다. 따라서 부채의식마저도 위선의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부채의식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보다는 그래도 진일보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강남에는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들이 꽤 있다. 지식인들 중에는 뉴라이트처럼 상식을 배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건강한 상식에 충실한 지식인들도 존재하리라 믿는다. 나는 한겨레, 경향, 그리고 시사인을 보는 대졸 이상의 사람들에게 기대를 거는 편이다.
강남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는 경제적 부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 것을 말릴 필요는 없다. 그것이 비록 위선적으로 보일지라도... 강남 좌파는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종부세에 대한 한국 부자들의 태도에서 보이듯이, 한국 부자들에게는 부채의식은커녕 노블리스 오블리제에도 훨씬 못 미치는 후안무치만이 드러날 뿐이다. 한국의 부자가 수준 이하라는 것은 이제 새삼 증명할 필요도 없다. 한국 부자들은 대부분 불로소득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메리칸 스탠다드에 따라 ‘내가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다. 네가 노력하지 않아 가난하다.’라는 무의식적 내용을 갖고 있다. 철저히 모순적이다.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라는 책제목은, ‘내가 부자가 된 것은 신화가 아닌 실제 일어난 현실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처럼 부자가 되어라 혹은 될 수 있다.’라는 잔인한 메시지를 깔고 있다. 여기서 부자가 못되는 사람들은 못난 죄인이 되고 만다.
3> 상대적 박탈감형 강남좌파 (파생형 강남좌파)
- 강남에 살며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이들이 ‘강남좌파’에 쉽게 귀의한다
좀더 바람직한 강남 좌파의 유형은 ‘상대적 박탈감’ 마인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강남에 살면서도 소수자 의식을 갖는 이들을 종종 보아왔다. 이는 주로 강남 전세살이 하는 2세들에게서 빈번히 관찰되는데, 이들의 부모들은 강남이라는 공간에 살면서 교육을 통해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기어오르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와중에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에서 박탈감을 경험한다. 친구들의 옷이나 신발, 친구집의 으리으리함 등... 상승 욕망은 경제적 생활수준의 차이에 대한 민감성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비강남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이 자신의 형편을 투덜대는 건 꼴사납게 보인다. 어쨌든 강남은 전세도 몇 억이니까!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란게 워낙 역동적이기 때문에 경제적 처지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경험을 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잘나가던 회사가 망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겪으면, 순식간에 경제적 수준이 수직낙하 한다. 하지만 생활수준은 그렇게 경제 수준에 금방 적응시키기 힘들다. 결국 남는 건 물질과 생활의 괴리이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가까운 심정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강남 좌파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차이에 민감하기 때문에, 못사는 사람들끼리 지내온 이들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민감할 가능성이 높다. 명품을 눈으로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 명품을 손쉽게 사서 소유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현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강남의 일부 소수자 의식을 가진 이들은 주변 친구들과의 커다란 격차를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이 이러한 시각을 한국 사회 전체로 확대해서 좀더 보편적인 안목을 갖는다면, 괜찮은 강남 좌파가 될 수 있으리라.
4> 뉴타입 강남좌파 (미래형 강남좌파)
- 향후 초래될 경제 위기 시기에 몰락한 부자, ‘뉴타입 강남좌파’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IMF를 거친 강남 거주 중산층에게서 강남 좌파의 발생조건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IMF 경제위기의 와중에 중산층이었던 관리직 종사자들의 11%가 해고되는 등 ‘중산층 위기’가 벌어졌었다. 이 당시 몰락한 이들은 한국사회의 안정성에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중산층은 강남 아파트가격 대상승이라는 역사적 호재를 중심으로 다시 되살아났다. 중산층 위기가 아파트라는 무기로 극복된 듯했다. 일부 중산층만 몰락하고, 나머지는 이제 절반이 넘어선 비정규직의 무덤 위에 고층아파트를 짓고 그럭저럭 생존했다.
하지만 앞으로 1년간이 분수령이다. 강남의 부동산 불패 신화에 현재 위기조짐이 보이고 있다. 현재의 위태로운 외환시장 주식시장, 은행 건설사의 유동성 위기는 어디로 갈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계층 사다리 상승을 향한 욕망, 수많은 개미들의 재테크 열풍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릴 가능성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진짜배기 중산층 몰락이 가시화될는지 모른다. 방금 말한 상대적 박탈감에서 집안 몰락 유형의 가구가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 몰락의 기로에 선 이 뉴타잎 강남 좌파들은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을 동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 자신이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의 이해당사자가 되므로. 88만원 세대의 일자리를 둘러싼 개미지옥 게임에 이들도 편입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전처럼 한국사회에 대한 해맑은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향후 몰락할지 모르는 강남의 일부 중산층에게서 가장 품질 좋은 강남 좌파가 탄생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들은 소유한 자산가치의 하락으로 인해 강남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강남에서 자랐다. 이들이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강남에서 잘 견뎌주길 바란다. 그리고 ‘명품 강남 좌파’가 되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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