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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위기인 한국의 대학/청년실업 뽀개기

어느 청년 구직자의 이중생활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11. 18.


경기가 좋지 않습니다.
취업난이 IMF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합니다.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 칸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헌혈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 취업전선의 한 복판에 서있는 
한 대졸예정자가  취업을 위해
스스로 어떻게 변신하고 있는 지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아마 지금 같은 입장이신 분들은
많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글 - 이지영, 기획 - 고재열)


"너, 자소서는 다 썼어? 오늘 피의 금요일인데 1승 가능할까? 난 저질 스펙 때문에 진짜 고민이다. 취뽀나 들어가봐야겠다"  
 

자소서, 스펙, 피의 금요일, 1승, 취뽀. 구직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봄직한 단어이다. 기업 서류 전형의 1단계인 자기소개서의 준말인 '자소서', 서류 전형에 필요한 자신의 ‘specification’을 뜻하는 '스펙' , 모든 기업의 서류전형, 면접 전형 발표가 가장 많은 매주 금요일 '피의 금요일'. 한 단계 통과할 때마다 올라가는 자신의 승률 '1승', 그리고 다음커뮤니케이션 최대 취업 카페인 ‘취업뽀개기’의 준말이자 취업 성공을 이루었다는 고유 명사 '취뽀'.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최근 몇 달간 내가 가장 많이 쓴 단어들이기도 하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인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들에 내 과거의 이야기가 담긴 자소서를 ‘apply’했고 그 중 일부는 면접전형까지 갔지만 아직 그 어느 곳에도 ‘confirm’을 받지 못했다. 중간고사는 남의 일이 되었고 100점 만점에 30점을 받아도 '취업만 한다면 이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무시했다. 부모님 카드로 면접에 입을 블라우스와 구두를 결제하면서도 '곧 취업해서 갚아드리지 뭐.' 이런 생각으로 신나게 긁어댔다.  
 

적어도 한 달까지는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구직자였다. 최악의 스펙이라는 '여성' 이라는 스펙을 가지고 꽤나 많은 대기업 서류전형을 통과했고 내가 평소에 꿈꿔오던 기업의 서류전형도 합격했기 때문이다. 또 시간이 흐르면 취업이 될 것 같다는 느낌, 어렵다 어렵다 해도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의 경영학과 출신인 나를 누군가는 데려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월 15일인 지금, 절벽의 끝에 서서 그 동안의 내 심정을 정리하게 되었다.  
 




어느 청년 구직자의 이중생활


<이중생활 1단계> 서류전형의 자기소개서



모든 기업들의 1단계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포함한 서류전형이다. 기업마다 원하는 인재상이 다르고 스펙이 다르기 때문에 가장 통과하기 어려운 전형이기도 하다. 


기업들의 자기소개서 부분을 열어보면 흔히 성장배경, 자신의 장단점, 실패경험, 지원동기, 입사 후 포부 등을 묻는다. 이 중에서 가장 난감한 것이 지원동기와 입사 후 포부이다.


성장 배경이나 장단점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곰곰이 되짚어 보면 500자, 700자 정도 채우는 건 쉽지만 잘 몰랐던 회사의 지원동기를 꾸며 쓰기란 참 어렵다. (물론 처음부터 눈 여겨 봤던 회사의 지원 동기는 술술 잘 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구직활동을 해보면 알겠지만 결코 생각지 못했던 회사도 의무감에 끄적이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지원동기를 쓰기 위해 회사 홈페이지와 관련 기사를 뒤져가며 좋은 말, 수상 내역을 죄다 적어놓고 인재상에 맞춰 글짓기를 하다 보면 한숨이 푹푹 나와 끄고 나와버릴 때도 많았다. 그 기업과 나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온갖 구실을 다 찾게 된다. 마치 지금 이명박 정부가 오바마와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억지로 학연 ,지연을 엮어보려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나의 이런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피식 웃고 지나갔을 것이다. 


처절한 이중생활이었다. 마음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 있으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이용해 다른 기업을 칭찬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육체에서 분리된 체 정신없이 타자 속도만 늘어갔던 몇 개월이었다.
 



<이중생활 2단계> 인적성 전형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나면 기업마다 인성, 적성 검사를 치루게 된다. 인성은 말 그대로 이 회사에 내가 적절한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문항이고(흔히 MBTI 같은 유형이다) 적성은 직무와 내가 적합한지를 알아보는 논리검사, 수리검사 등등이다. 적성 검사는 대표적으로 언어, 수리, 추리, 시사, 공간 지각으로 나뉘는데 회사마다 구성이 조금씩 다르다. 가장 유명한 삼성의 인적성의 경우 몇 만 명의 학생이 모의시험을 치루기도 한다. 


적성 시험은 오래 전부터 준비해야 할 것도 아니고 약간의 지능과 순발력 그리고 그 날의 운으로 결정된다. 가기 전에 모의고사를 풀어보고 유형을 익혀가면 나머지는 시험장에서 컨디션에 맡겨야 한다(전 날까지 술 마시고 시험을 쳐서 합격한 사람이 있고 몇 주를 공부해도 떨어진 사람이 있는 거보면 나름 신빙성 있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 인성검사. 여기서 이중생활이 또 드러나게 된다.


기업마다 원하는 인재상(요즘에는 창의성, 국제적 마인드가 대세이더라)이 있고 인성 검사는 이에 부합하는 사람을 뽑기 마련이다. 물론 평소 성격대로 체크를 하는 것이 가장 정답이겠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나를 포장하기 시작한다.


꼼꼼한 일과는 거리가 멀어도 '나는 꼼꼼한 일을 좋아한다' 에 yes를 체크하고 일관성을 위해 뒤에 비슷한 문항이 나오면 앞의 답을 찾아가서 또 yes를 체크한다. 


100문항 정도의 검사는 숙달된 실력으로 가볍게 일관성 유지가 가능하지만(대답이 뒤죽박죽하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감지되므로..) 모 대기업의 경우 400문항에 이르는 인성 검사를 통해 시작부터 본인의 인성과 다르게 나갈 경우 결국 뒤에서 힘에 붙여 엉뚱한 답을 체크하도록 유도해 놓았다.


이에 질세라 구직자들은 머리를 굴려 아예 시험 전에 '인적성형 성격' 을 만들어 가는 치밀함을 보인다. (이 때는 평소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이라고 스스로 마인드컨트롤 한다)
 



<이중생활 3단계> 면접전형



인적성형 성격으로 2단계에서 통과하면 마지막 단계인 면접전형에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study를 통해 '면접형 나'를 만드는 시간이다. 평소에 의자 등받이에 늘 붙어 있던 사람도 면접 1시간은 곧 죽어도 대나무처럼 앉아있다. 


1억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라는 대답에는 천편일률적으로 '몇 프로는 불우한 이웃을 돕고, 몇 프로는 가족을 위해 쓰고, 몇 프로는 회사의 주식을 사고, 나머지는 저축을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포트폴리오 전략을 펼친다. 실제로 자신들이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임에도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실제로 나는 면접에서 1000만원이 생기면 무엇을 할래? 라는 대답에 당당히 자동차를 산다는 철없는 대답을 했다가 결국 낙방했다; 정말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도 면접형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실패했던 경험을 이야기 하라는 질문에도 온갖 고난과 역경이 다 묻어 나온다. 
리더역할을 해봤냐는 질문에도 하나같이 무슨 동아리, 무슨 학회의 회장들이다. 어느 스터디에서 다 외워왔는지 재미도 없고 하나같이 착한 구직자들만 모였다.


나도 처음에는 리스트를 작성해 예상 답안을 만들어서 외웠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면접에 임했다. 얼굴에는 미소라는 가면을 쓴 채(사실 나는 평소에도 엄청 잘 웃고 다니지만...면접에서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웃는다.ㅠ) 최대한 또박또박, 90도 자세로 앉아서 세상에 없던 나를 보여주고 온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 그래서 지금은 전략을 바꿨다. 스터디도 하지 않고, 예상 답안도 없다. 그냥 면접관과 대화하는 느낌으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온다.


C모 회사의 면접에서는 "이지영 씨는, 제가 이걸 질문할 것이란 걸 미리 예상했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평소 내가 느낀 대로 이야기 했을 뿐인데 이것도 가식으로 보였나 보다. 정말 큰일이다.  L모 회사 면접에서는 1시간 동안 면접관 두 분과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다 왔다. 도저히 꾸며낼래야 낼 수가 없는 면접이었다. 정말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왔는데, 너무 꾸밈없이 이야기를 내 뱉던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후회가 남기도 한다.  
 

매 단계마다 본의 아니게 이중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천하의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다. 

이런 것도 '선의의 거짓말' 이라는 이름으로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단지 난 취업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모든 구직자들이 여러 자아로 활동하고 있는 요즘, 무조건 현실과 타협하기 보다는 진정 내 이상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 이중생활의 결말을 볼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주> 최악의 취업난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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