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방송 장악 저지를 위해
<KBS PD협회보>와 <독설닷컴>이
기사 특약을 맺었습니다.
<KBS PD협회보> 기사가
<독설닷컴>을 통해서
누리꾼들에게 전달됩니다.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33년만에 명예복권된 해직기자들의 끝나지 않은 저항...
동아투위 정동익 위원장으로부터 듣는다.
1975년 서늘한 봄, 젊디젊은 동아일보 기자 134명이 찬 거리로 나앉았다. 유신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정권은 기어이 그들의 밥줄을 끊었고, 회사는 그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이른바 <동아일보 광고탄압 및 기자 강제해직> 사건. 지난 10월 29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를 국가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이라 규정하고, 국가와 회사는 해직기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33년만의 공식적인 명예회복이었다. 그러나 해직기자들은 오늘도 찬바람 부는 거리에 서 있다. 동아일보가 여전히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1인시위를 하고 있는 정동익 위원장. 해직될 당시 그는 입사 7년차였다. 정위원장은 이곳을 오가는 젊은 후배기자들 가운데서 옛 선배의 뜻을 이어받자는 움직임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글-김효진, KBS 시사정보팀 PD)
동아일보, 그 높았던 이름은 오래지 않아 치욕이 되었다
입사하실 당시, 동아일보는 어떤 매체였습니까?
옛날 자유당 정권때는 유일한 야당지로 국민들이 기대를 많이 했지. 시골에서 는 경찰이 동아일보 보는 사람을 다 조사했을 정도였으니까. 입사 경쟁률도 엄청 높아서 구성원들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았어. 이미 정권이 압력을 행사하면서 각 기관원을 언론사에 상주시키고 있었거든. 그러던 중 인혁당사건이 터졌어. 가족들이 언론사에 찾아와 땅을 치면서 취재해놓고 보도도 안하는 기자들이 무슨 기자냐며 멱살을 잡고 울고, 서울대 학교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동아일보 화형식을 하고... 결국 인혁당 기사는 못나가고 말았어. 그걸 계기로 기자들이‘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는 각성을 하기 시작한거야.
어떤 방식으로 기자들은 저항해 나갔습니까?
일단 노조를 만들었어. 그런데 회사가 금세 주동자를 잘라 버려서 정착할 겨를도 없이 바로 깨지고 말았지. 그 사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세 번 했는데 또 그 뿐이야. 생각했지. 아, 우리끼리 성명서 내고 우리끼리 골방에 앉아서 박수치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제는 말뿐인 구호에 그치지 말고 매일 매일 실천을 통해서 우리 언론자유를 지키자. 그래서 자유언론실천선언 에‘실천’을 강조해 넣었고, 당장 편집국이랑 싸워서 그것부터 3단기사로 내보냈어.
#<자유언론실천선언> 1974. 10. 24
1. 자유언론은 언론종사자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이 쥐어주 는 것이 아니다.
2. 외부간섭 배제,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연행 거부
3. 불법연행 시 그가 귀사하기 전까지 퇴근 않는다.
구체적인 실천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잘 이행되었나요?
우선 실천특위를 만들고 매일 저녁 모여서 각 부서별로 어느 기사가 빠졌고, 누가 제목을 바꾸라고 했고, 어느 기사는 크게 다뤄야 하는데 적게 취급했고 등등의 정보를 취합했어. 또 학생데모기사, 인권관계기사, 정권에 불리한 기사를 1단 이상 못 싣게 한 지침에 대해‘1단 벽 깨기 운동’을 벌였어. 기사 비중에 따라 제 값에 맞게 보도하자는 원칙을 세운거지. 이런 원칙에 따라 그동안 안 나갔던 사건들을 보도하기 시작하니까 국민들의 평가도 엄청 높아졌지. 국민들이 동아일보 보는 재미에 산다 할 정도였으니까.
데스크 선배들이나 회사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텐데요.
회사는 기자들의 기세가 워낙 세니까 처음에는 짐짓 모른 체 하면서 데스크를 통해 통제하려 했지. 그런데 정보부에서 바로 광고탄압을 바로 해 버렸잖아. 회사 사주는 경영주란 말이야. 정권과 싸우다가 회사가 망하게 생기게 되니 결국 넘어가더군. 3월 10일, 농성하고 있는데 깡패들이 새벽에 몽둥이를 들고와서 우리를 다 내 쫓아냈어. 우리 표현으로는 야합했다고 해. 굴복이고 야합이 지. 그러다 정권과 한 통속이 됐지 나중에는.
회사로서도 광고 끊기고 조직이 무너지면 기사 쓸 공간 자체가 사라지는거니까,‘ 일단 회사를 지키고 보자’는 고육지책이었을거라고는 이해하실 수 없었습니까.
동아일보가‘우리도 피해자였다’고 말하려면,지금이라도 우리 해직기자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 해야해요. 자기 과오는 하나도 인정 안하면서 무턱대고“어쩔 수 없었다”고만 한다면, 그건 일제때 부역자들이 그랬듯이 자기 합리화를 위한 변명밖에 안되는 거야.
나약한 자 인간, 누구나 처음부터 투사일 수는 없다
유신정권의 부당함을 느끼는 기자들은 다른 언론사에도 많았을텐데, 동아일보 기자들만이 특히 행동으로 저항했던 이유는 뭘까요?
사실 사람은 다 약해. 처음부터 투사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냥 시험봐서 합격해서 월급쟁이로 들어가서 다 편하게 살고싶을거야. 그런데 어느 날 취재 나갔더니 국민으로부터 질타를 받고, 개인적인 고뇌가 생기고, 동료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러면서 의식이 깨는거거든. 각성이 시작되는거야. 그 과정에서 지도자가 중요한데, 조직은 구심점이 없으면 어려워지게 돼 있거든. 단지 몇 명이라도 함께 고민하는 핵심 그룹이 있어야 돼. 자기 모든 것 던지고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기를 던지는 사람 - 동아일보는 그게 있었다고 봐.
지금도 묵묵부답인 동아일보에 사과를 요구하며 오랫동안 싸워오고 계십니다. 흔들리지도, 지치지도 않으면서 일관되게 정의를 외칠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요?
싸움이라는 게, 조그만거라도 달성하면서 승리의 기억을 축적해나가야지 자신감도 생기고 더 큰 싸움에 나설 수가 있어요. 사소한 패배의 기억이 쌓이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감을 잃고,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 되고, 그러다보면 대열이 흐트러진단말이야. 지금 KBS가 그런 모양이야. 이제부터 KBS는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하고, 지도부는 조그만 성과에도 자꾸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야해.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 KBS 노조 선거가 참 중요하다고 봐요. 노조가 지금 나서지 않으면 개인단위로 싸워야 되는데, 용기와 신념만 가지고 개인에게 그 큰 짐을 지게 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선배님이 강조한‘실천’의 관점에서, 지금 KBS가 당장 실천해야만 하는 것들로 무엇이 있을까요?
자기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자각하는 동시에, 동료들하고 함께 가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된다고. 절대 혼자 고민하지 말고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면 그때, 비로소 방법이 보여요. 가령 KBS가 YTN 동료를 도와주는것도 실천이거든.‘ 언론계 현황이니까 이걸 프로그램으로 내보냅시다’그렇게 현장에서 부딪치는 자세, 그게 필요한거지.
그러다보면 그런 분위기가 큰 흐름이 되고, KBS를 살리기 위해서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노조가 바로 서야만 한다는 인식으로까지 빠르게 확산되겠지.
KBS여, 절대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KBS구성원은 공영방송의 언론인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인이기도 해요. 그래서 노동조합 선거때는 항상 대의명분만큼이나 고용안정과 같은 현실론에 상당한 무게가 실리는 경우가 있는데요.
내가 사실 KBS 사람이야. 67년도에 잠깐 있다가 동아일보에 합격해서 얼른 옮겼지. 당시 KBS는 행정뉴스, 땡박뉴스 할 때인지라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기자들은 기자실 출입도 못했어. 내가 동아일보 와서 2년만에 결혼했는데 나중에 마누라가 그래. KBS에 계속 있었으면 나한테 시집 안 왔다고. 결국 86년에 전북 고산성당에서 농민들이 제일 먼저 땡전뉴스 거부 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이 기독교계로 번져서 KBS시청료거부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진거 아냐.
그랬던 KBS가 동아투위때 우리가 각성하듯 부단히 노력하여 지금 겨우 국 민 신뢰도 1위의 언론사가 됐는데, 낙하산 사장을 받아들여서 도로 2~30년 전 KBS로 돌아가겠다고? 노조후보가 몇 명이라도 다 물어봐. 무슨 긍지를 가지고 살 거냐고, 다시 그 지탄받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답이 나와. 동아투위 선배님들은 지금도 해직된 75년 3월 17일 이후, 매달 17일에 모여 언론계 현안을 논하는 현역언론인이자, 그렇게 모인 의견을 홈페이지(http://www.donga1024.or.kr)에 올리기까지 하시는 노티즌(老tizen) 논객이시기도 하다. 정권은 비록 노선배들의 펜대를 꺾었는지는 몰라도 기자정신만은 어찌할 수 없었던지, 너무나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항상 건강하소서.
독설닷컴 주>
올해로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 34주년을 맞은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선배들은 지난 11월17일까지 동아일보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이들의 해직 과정에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정황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자 이와 관련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며 34년 동안 함께 해온 해직자들이 다시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인상적이었다. 릴레이 시위는 4인 1조였다. 한 사람이 한 시간 씩 하루에 네 시간 동안 1인 시위를 벌였다. 정동익 동아투위위원장의 수첩에는 한 달여간의 1인 시위 일정이 빽빽이 메모되어 있었다. 당번인 사람도 1시간만 시위를 하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동료가 1인 시위를 할 때 옆에서 지켜주었다. 대부분 60대가 넘은 노인인 그들이 보여준 조직력이 놀라웠다.
후배들은 평소에 ‘동아투위’ 선배들을 찾지 않는다. 사단이 났을 때 그들로부터 정통성을 이어받고자 손을 내밀 뿐이다. 우리도 그랬다. ‘시사저널 파업’을 시작하고서야 오직 전설로만 전해지던 그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기꺼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 그들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다. 감동이었다.
‘누구누구의 딸이 결혼을 한다’‘누가 이사를 간다’‘누구의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다’... 사소한 글이었지만 그들이 34년 동안 연대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놀랍고 부러웠다. 그들은 직장을 잃었다. 대신 평생을 함께 할 형제를 얻었다. 지금 ‘낙하산 사장 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는 YTN 노조원들이나 힘겹게 정부의 방송장악에 맞서고 있는 KBS 사원행동 사원들이 ‘동아투위’ 선배에게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 그들의 휴머니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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