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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세대 아이콘 100

어느 90학번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의 잔상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12. 6.


<독설닷컴>에서 화두를 던진

298세대론에 대해서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층
1970년대생, 1990년대 학번 이야기)
김상철님이 글을 보내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386 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의
'잃어버린 세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298세대론을 함께 써 나갔으면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해야죠.
기고 대환영입니다.)




이소룡과 성룡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는 것으로 패가 갈렸다.




김상철님은 90학번으로 기자와 청와대 공무원을 거쳐서 지금은 홍보대행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
‘갑을 방정식’으로 소개하면 갑에서 슈퍼갑을 거쳐 슈퍼을의 위치가 되신 것이죠.



김상철님의 글은 3편 정도가 연재될 것 같습니다.
1편은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담은 1980년대 이야기입니다. 
2편은 (예상하기로) 대학시절과 IMF와 함께 시작한 사회생활 초년병 시절의 이야기가,  
3편은 (역시 예상하기로) 가까이서 본 386세대 정치인 이야기와 298세대 역할론의 이야기가 연재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참고 글 : 2008/12/03 - [298세대 아이콘 100] -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98세대를 아시나요?



어느 90학번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의 잔상


글 - 김상철 (90학번)



김정남, 나랑 동갑이다.

위키백과를 보면, 이 해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들이 대학자유화 요구 선언을 발표했고 남북적십자 대표가 분단 후 판문점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영화로도 유명해진 실미도 사건이 터졌고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도 발생했다. 무엇보다, 새우깡이 처음 시판된 해이기도 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이 해에 태어났다고 했던가. 1971년. 그해에 나는 서울 왕십리 근처 변두리에서 서울촌놈으로 태어났다. 다음해에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섰다는데 당근, 기억나는 건 없다.



통계청 DB를 뒤져보면 연도별 출생아 수는 1970년 100만7천명에서 1971년 102만5천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계속 감소하면서 1985~1990년에는 60만명 수준을 보인 뒤 1991~1995년 70만명 대로 다소 늘었다가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요즘 출생아 수는 40만명 대다. 그러다보니 71년생은 뭐든 쪽수로는 최고였던 거 같다. 이를테면, 국민학교(한글프로그램에서 국민학교라 적으니 자동으로 초등학교로 바뀐다.) 입학자 수가 가장 많았다거나 대학입시 경쟁률이 최고라거나….



유치원은 있었지만 아무나 가는 데는 아니었고 대세도 아니었다. 국민학교 1학년 첫 소풍은 장충단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매달 내던 육성회비가 400원이었나, 500원이었나. 많게는 반이 18반까지 있었고 학급당 학생 수는 60~70명을 오갔다. 교복자율화 조치 이듬해에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교복은 입지 않았지만, 두발은 학교방침 상 스포츠형으로 밀고 다녔다. 수학여행은 중2때 경주로 갔다. 중·고등학교 때도 무슨 극기훈련이랍시고 학생들을 2박3일 몰고 가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은 때마다 걸레를 가져와 교실과 복도의 나무바닥을 단체로 왁스칠했고 역시 나무판자로 대충 엉겨 만든 오래된 책상과 의자는 국민학교 5, 6학년 때인가 중학교 때부터 베니어판 재질의 새 걸로 조금씩 교체됐던 거 같다. 교체 전에는 가시 박히는 일 없게 한다고 헌 책상에 두꺼운 페인트칠을 해주기도 했다.


우리들의 영원한 연인, 진추아

나는 형들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내였다. 바로 위에 작은형이 80학번이었으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문화적으로는 70년대 세례를 많이 받았다. 국민학생 때도 이소룡을 좋아했고 오드리헵번과 케리그란트를 좋아했다. 당연히, ‘주말의 명화’도 챙겨봤다. 진추아 노래를 따라 불렀고 윤항기의 ‘판’과 송창식의 ‘테이프’를 찾아 들었다.



중학생 시절은 라디오 데이즈(Radio Days)였다. 방학 때면 아침에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를 시작으로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박원웅의 골든디스크’ ‘이종환의 디스크쇼’에서 타이틀이 기억나지 않는 심야의 영화음악 프로까지 거의 종일 라디오를 붙들고 살았다. 물론 공테이프를 사서 녹음하는 건 필수였다. 노래 끝날 즈음 DJ 목소리가 나오기 전 타이밍에 녹음을 끊기 위해 수도 없이 리와인드와 정지 버튼을 되풀이 눌러댔다. 고등학교 때도 빌보드차트 10위 안에 든 노래들은 알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민학교 때는 크로바문고 판 만화와 소년중앙, 보물섬을 탐독했고 나중엔 스크린, 로드쇼 같은 영화잡지를 사봤다. 1980년 12월부터 컬러TV 방송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집에서 컬러TV를 산 건 몇 년 지나서였던 거 같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박정희가 죽었다. 무슨 큰 일이 벌어지자 신문팔이가 거리에서 “호외요, 호외”하는 걸 만화책에서 봤었다. 원래 그래야 하는 거 같아서 그날 교실에 들어갈 때 덩달아 “호외요, 호외. 대통령이 죽었소” 했었다. 앞집에 예쁜 고등학생 누나는 헌화하며 울었다고 했다.




다음해인 1980년엔 TV에서 ‘광주사태’라고 하는 걸 잠시 봤다. 뉴스에서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건물 옥상에 총을 들고 서있고 그 위로 헬기가 떠다니는 장면이 보였다. 그 해 마지막 날 졸린 눈을 부비며 TBC의 마지막 방송도 봤다. 언론통폐합의 결과라는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중3때였던 1986년 갑자기 신문과 방송에서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고 온통 난리였다. 당연히 평화의 댐 모금에 참여했고 우리 학교는 더 나아가 운동장에서 북한 규탄집회도 열었다. 학교가 한강변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북한의 수공(水攻)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볼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날 KBS 9시뉴스에 ‘한강변에 위치한 OO중학교 학생들도 북한의 음모를 규탄했습니다’는 멘트와 함께 3~4초 정도 화면이 나갔다.



연합고사를 보고 1987년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 문제 당 1점씩, 200점 만점이었을 것이다. 인문계 커트라인이 145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짝궁놈이 딱 145점 맞고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는 건국대 근처에 있었고 집에서 버스타고 왔다 갔다 하면 한양대를 거쳐 갔다. 매일매일 시위가 벌어졌다. 직장인이었던 작은형은 밤에 집에 들어와 가끔 이런저런 무용담을 전해줬다. 친구 한명과 저녁에 구청 담벼락에 무슨무슨 구호를 써놓고 왔다느니 하는.

김중배 선생님.

나도 집에서 구독하던 동아일보를 챙겨봤다. 그랬다. 그때 동아일보는 지금 같지 않았다. 특히 ‘김중배 칼럼’ ‘최일남 칼럼’은 꼬박꼬박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두 선생의 책도 빌려봤다. 덕분에 처음으로 구체적인 장래희망을 세웠었다. 칼럼니스트. 얼핏, 바로 칼럼니스트가 되는 건 쉽지 않을 테니 기자가 되자, 했다. 훗날 김중배 선생께서 주례를 서주셨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김중배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나에게는 정말 드라마 같은 순간이었다. 고등학생 때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선생의 칼럼집을 챙겨봤는데 10여년 뒤 그 학생의 결혼식 주례석에 서시다니….



아무튼, 집회가 일상적인 풍경이 되다보니 어느 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놈과 함께 “같이 가보자” 했다. 그래서 중간에 한양대에서 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퍼벙~ 퍼벙~” 최루탄이 터졌다. 도저히 매운 기운을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놈과 나는 정신없이 2호선 한양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고 눈물콧물을 질질 흘리며 화장실 환기구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렇게 최루탄과 처음으로 ‘제대로’ 만났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으니 좋았다. 고2때부터 지금도 어울리는 친구놈들과 함께 수업이 끝나면 슈퍼에서 맥주를 사서 건국대 캠퍼스로 들어갔다. 어둑어둑해졌을 때 설립자 묘소 앞에서 술이 취해 춤추고 노래하며 놀다가 관리인에게 쫓겨 다니던 기억도 난다. 화양리도 좋았다. 시간 날 때마다 화양리 여관을 돌면서 포르노 시청 순례를 다녔다. 새벽 2시, 3시에 화면이 끝나면 수화기를 들고 “저희 아직 안 자는데요” 했다. 그러면 다시 나왔다. 날라리나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그런 식으로 풀었다. ‘광주 비디오’를 처음 봤던 곳도 건대에서였다. 내용은 천양지차였지만 여관에서 포르노를 볼 때마냥 눈을 떼지 못하고 숨죽이며 봤다.

예기치 않은 일도 벌어졌다. ‘전교조 사태’였다. 우리 학교에도 적지 않은 교사들이 가입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모여 꽹과리 치며 운동장에서 집회 아닌 집회를 열었고 침묵시위도 했다. 나도 낀 일군의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대책을 논의한다며 화양리 근처 카페에서 맥주를 까놓고 얘기하기도 했다. 몇몇 ‘운동소년’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즈음 젊은 불어선생이 수업시간에 별 말 없이 칠판에 뭔가를 적었었다.



O=X(X) O=O(O) X=O(X) O=X(X) X=X(O) 대충 이런 거였다.



설명하길, 맞는 것을 틀렸다고 하는 건 틀린 것이고, 맞는 것을 맞는다고 하는 건 맞는 것이고, 틀린 것이 맞는다거나 맞는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도 틀린 것이고,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은 맞는 것이다. 결국 몇 명의 교사들은 학교를 떠났다. 생각해보니, 그 때 그 교사들은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매달리기야? 턱걸이야?

대학도 가야했다. 학력고사를 준비했다. 위키백과를 보니 필기시험 320점, 체력장 20점이었단다. 예의, 넘치는 71년생들로 경쟁률은 최고라고 했지만 어차피 나랑 경쟁할 치들은 그 모두가 아니라 나하고 비슷한 그렇고 그런 학생들일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교실 분위기야 한결같았다. 아침 자습시간은 공부하는 애들과 조는 애들로 조용했고 늘상 정적을 깨는 것은 “펑~, 펑~” 복도에서 지각한 놈들 두드려 패는 선생들의 마대자루 질 소리였다.



그리고 대학 지원. 물론 점수에 맞춰 지원했다. 좀 다른 바가 있었다면 소싯적에 먹었던 기자의 꿈이 살아있어 학과는 신문방송학과로 정하고 점수에 맞는 대학을 잡았다는 거.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서 담배를 물었다. 무슨 도덕의식인지 담배는 꼭 시험 끝내고나서 피우고 싶었다. 저녁에 답안을 맞춰보니 수학을 빼고도 예상 커트라인을 넘었다. 어차피 수학은 2학년 때부터 1~4번 언저리의 집합과 벤다이어그램만 풀고 다 찍어왔다. “그래도 찍은 거 몇 개는 맞겠지” 생각했고 “됐다” 싶었다. 재수 없이 붙었다.



입학 기다리는 동안 교과서나 참고서 말고 다른 책 좀 보자는 평소의 기특한 생각을 실천하기로 했다. 덕분에 태백산맥 10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90학번이었다.


참고 글 : 2008/12/03 - [298세대 아이콘 100] -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98세대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