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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기자들, PD들/삼성을 쏜 난장이들

8년 전 기자를 시작할 때의 각오를 다시 보니...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12. 10.


얼마 전 후배가
8년 전 <시사저널>을 입사하며
제가 지인들에게 돌렸던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 메일을 다시 보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2000년 5월, 그때가 그립군요.
2010년 5월, 그때까지
<시사저널> 제호를 꼭 되찾겠습니다. 



'시사저널 파업' 초기 언론노조 회의실을 임시편집국으로 사용할 때, 짬을 내 찍었다.





출사표 (시사저널 입사에 부쳐)



* 지금 내 마음은 쇠락한 종가에 시집 온 맏며느리의 심정처럼 무겁지만...



하나, 주간지 시장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다. 사람들이 종이신문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꼽는 것이 바로 주간지이다. 일간지에 비해 속보성이 떨어지고 월간지에 비해 심층적이지 못한 딜레마 때문에 앞으로 고전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시사저널은 작년 IMF한파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그리고 황색저널리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일요신문에 넘어갔다. 시사저널에 입사하는 나로서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둘, 정보화 시대다 인터넷 시대다 말들이 많은데 시사저널의 정보화 마인드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혹시나 원서를 메일로 보낼 수 있을까 해서 들러본 시사저널의 홈페이지는 개인 홈페이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원서를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있을 리는 만무, 결국 다리품을 팔고서야 겨우 낼 수 있었다. 그나마 그 홈페이지마저 제대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있다.



셋, 신문 가판대에 시사저널이 없는 곳이 많다. 어떻게 시사저널이 없을 수 있냐고 한 마디 하곤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광고회사 다니는 친구에게는 앞으로 시사저널에 광고 좀 많이 주라는 부탁까지 했다. 기분이 씁쓸했다. 수습기자가 너무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는 꾸려가야 할 살림살이 걱정에 시름 많은 종가의 맏며느리처럼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다.




*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 술자리가 나의 운명을 이렇게 바꿔놓을 줄이야. 별 생각 없이 찾아간 시사저널과의 술자리에서 나는 입사하겠다는 약속을 덜컥 하고 말았다. 술김에, 그 중요한 결정을 술김에 내려 버리다니, 조금 경솔하긴 했다. 술자리에서 한 약속은 법적 효력이 없어 안 지켜도 된다지만, 그래도 나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다. 그것은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겠다는 내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기에.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다. 죽을 필요까진 없겠지만, 열심히 해서 그들이 내게 보낸 찬사에 답하고 싶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에 확신을 주고 덤으로 내 자신에 대한 확신도 얻고 싶다.



사실 시사저널에 입사를 약속하고 여기저기 자문을 구하며 들었던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었다. '주간지의 시대는 갔다', '옛날의 시사저널이 아니다' '기자의 정도가 아니다-일간지에서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 등등. 하지만 나는 가겠다, 시사저널에. 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안정적인 일간지에서 일하고 싶은 바램이 없지 않지만, 돈도 여유 있게 벌고 싶지만, 나는 기꺼이 시사저널에 가겠다.




* 고재열식 계산법



나는 어떤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어떤 기사를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다. 기자가 되더라도 나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진보에 대한 믿음도 버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 안에 사람이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조그만 바램이 있는 그런 기사를 나는 쓰고 싶다. 그런 기사를 쓰기에는 시사저널도 나쁘지 않다. 아니 딱이다. 시사저널이 딱 좋다.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콤플렉스다. 지금이야 고대를 다닌 것에 만족하고 있지만 나는 서울대에 콤플렉스를 느꼈었다. 서울대 다니는 사람을 보면 왠지 그들에 비해 내가 뭔가 한 가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에 왜소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자가 되려는 내가 일간지에서 시작하지 않은 것은 앞으로의 내 인생에 그런 콤플렉스를 남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콤플렉스도 때로는 약이 되는 법, 서울대 콤플렉스가 내 대학생활에 조용한 채찍질이 되었듯이 일간지 콤플렉스가 내 기자생활에 더 충실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의 문장가 굴원은 '글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했다고 한다. 나 또한 '기사로서 세상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펜을(키보드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한번 노력해 보겠다. 공명을 떨치겠다는 말이 아니다. 기자로서 한 번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곳이다. 남은 인생을 자존심만으로 살수는 없겠지만, 한창 20대엔 그 먹어도먹어도 배부를 것 같지 않은 자존심이라는 것에 의지해 한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십대에 벌써부터 영악하게 굴면 다음에 뭐가 되겠나? 지금 착하게 살지 않으면 앞으로는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젊었을 때는 착했고 열정도 있었노라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한 번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 건방지고, 고집세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지만, 무책임한 약속하나를 또 하나 남발하자면,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그러면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거리편집국을 다섯 번 정도 옮긴 뒤에야 우리는 시사IN을 창간할 수 있었다.





흠....
다시 보니 정말 만감이 교차하네요.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 '제가 들어가면 봉잡으시는 겁니다'라고 호언장담하던 그때가 그립네요.
그때 나의 허장성세를 견뎌주었던 김상익 서명숙 선배,
그리고 문장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지만, 문장을 가꿔주었던 김훈 이문재 선배,
파업을 완주하고 창간까지 함께 하고 고생만 '디립다'하고 떠난 안철흥 노순동 선배...
함께 파업하고 지금은 한겨레신문에 가있는 제규형...

그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요양중인 장영희 안은주 누님, 얼렁 돌아오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