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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세대 아이콘 100

어느 90학번의 기억 속에 남은 1990년대의 잔상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12. 17.


<독설닷컴>이 던진
'298세대론'의 화두에 
맨먼저 답했던 김상철님이 
'어느 90학번' 2편을 보내주셨습니다. 

90학번이 보낸 1980년대에 이어 
90학번이 보낸 1990년대 이야기입니다.

1편처럼 읽는 재미가 아주 솔솔합니다. 
천천히 감상하시며 
1990년대의 추억 속으로  빠져 보시길....
(이번주까지 1990년대를 되짚고
다음주부터 298세대의 오늘을 조명하겠습니다.)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 다시 현실이 되고 있다.



'어느 90학번' 1편 : 2008/12/06 - [298세대 아이콘 100] - 어느 90학번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의 잔상
 


대학에서 후배는 95학번까지 맞았다. 18개월 방위를 갔다 왔고 졸업 전해인 1995년 10월 예상치 않은 취직을 한 덕이었다. 따져보니 1990년 민자당 창당에서 1995년 신한국당 출범까지 시기가 된다. 독설닷컴에서 이슈로 떠오른 1996년은 사회에서 맞았다.

 

 

이 기간의 주요 연혁을 보면, 90년에 걸프전이 일어났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으며 소련이 무너졌다. 92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다. 93년 금융실명제가 시행됐고 수능시험이 처음 치러졌다. 94년 김일성 주석이 죽었고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95년 삼풍백화점도 무너졌고 전두환, 노태우가 손잡고 법정에 섰다.

 


 

 

캠퍼스에서는 리포트를 직접 쓰거나 타자를 치다가 워드로, 컴퓨터로 쳐냈다. 주변에 점조직처럼 박혀있던, 막걸리 먹으며 민중가요 부르던 주점은 사라지고 하이트니, 카스니 하는 이름이 달린 맥주가 나타났다.

 


 


대학에 들어가니 선배들은 90학번을 ‘참교육 1세대’라고 불렀다. 좀 계면쩍긴 했다. 아무튼 ‘전교조 사태’를 겪으며 이런저런 책도 훑어보고 자연스레 민중가요를 접하면서 입학과 함께 준비된 운동권마냥 행세했다. 시대의 요구에 순응한 건지, 그것도 겉멋인지… 그 중간 어디쯤을 맴돌았을까. 노래는 제법 알았는데 신입생 OT에서 ‘애국의 길’을 처음 들었을 때 감동의 연타에 오줌 싸는지 알았다.

 

 

그해 1월 22일 한편에선 3당합당 선언이 나왔고, 다른 한편에선 전노협이 출범했다. 4·19 30주년, 5·9 민자당 창당, 5·18 10주년, 방학 때는 통선대, 범민족대회 등등. 운동하기 좋은 때였다. 3월인가, 4월인가 처음 교투에 나선 날 화염병도 처음 잡아봤다. 빙빙~ 돌리며 달려 나가는데 저 앞 백골단 선수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게 신기했다. 그렇게 처음 던진 꽃병은 가로수를 맞고 허무하게 스러졌다. 언젠가는 교내까지 밀려들어갔다가 앞으로 튀어나와 내던진 회심의 꽃병이 교문 플래카드에 걸려 다시 우리 쪽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죽일 놈 될 뻔했다.

 

 

5·18 10주년에 맞춰 4기 전대협 출범식이 전남대에서 있었다. 출범식 탄압은 이때가 최고조였지 싶다. 학교 앞은 물론 전국의 버스터미널, 기차역마다 경찰병력이 깔렸다. 누구는 변장을 하고, 누구는 루트를 짜면서 각자 팀을 짜서 내려갔다. 나는 당시 눈 밝은 선배 덕분에 평택에서 화물트럭을 얻어 타고 파죽지세로 달려갔다. 검문을 피해 열차에서 뛰어내렸던 한 학우가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만난 광주는 정말 남달랐다. 경찰 빼고는 다 우리 편이었다.

 

 

이때의 광주가 새삼스러웠던 이유는 학교사정이 막연히 생각해왔던 바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입학한 학교는 수도권에 위치한 캠퍼스였고, ‘진영’이 그리 풍부하지도 않았다. 단독으로 나간 첫 가투는 구호 서너 번 외치고 끝났다. ‘파업전야’ 상영 사수대를 할 때 수업 끝나고 줄줄이 학교를 떠나가는 학생들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방학 때는 캠퍼스가 텅 비다시피 했다. 학력고사 커트라인 수준이 운동의 수준을 결정하는가, 싶은 고민도 꽤 심각하게 했다. 암튼 학교는 85, 86학번이 군대 간 사이 87학번부터 PD계열이 생겨났다는 소박한 운동史를 가지고 있었다. 난 주로 85, 86 복학생들과 어울렸다. 밤새 술 먹고, 학습하고 더러 평양에 간 전대협의 신화나 ‘너무 배고파서 헌혈하다가 졸도했다’거나 ‘5·4인천 때는 정말 무서웠다’는 식의 얘기를 들었다.

 

 

1991년은 2학년 시절을 관통해버렸다. 4월 26일 강경대가 쇠파이프에 맞아죽었다. 3일 후 전남대 박승희가 분신했다. 5월 들어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했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의문사했다. 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시민 이정순, 보성고 김철수, 노동자 정상순의 분신과 투신이 이어졌다. 그리고 성균관대 김귀정이 경찰폭력에 살해당했다.

 


 

신문을 펼치면 사람이 죽어있었다. 가슴에 돌덩이가 쌓였다. 달리 선택이나 고민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안양, 안산, 수원에서 서울 곳곳으로, 학교가 아니라 가두에서 생활했다.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폭력정권 살인정권 노태우정권 타도하자’였던 것 같다. 싸움이 한창이던 어느 때, 거리를 지키던 노동자들을 뒤로 하고 총총히 지하철역으로 사라지는 학생들을 보며 ‘더 이상 운동의 주력은 학생들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 와중에 “지금 우리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총장이 등장했고 한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했다. 총장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지만, 이 시인한테는 어린 나이에 상처 많이 받았다. 난데없이 유서대필 사건이 튀어나왔고 신임 국무총리 정원식에게 달걀, 밀가루 세례가 있었다. 당시 외대 다니던 고교동창 놈은 이 건으로 한동안 ‘도바리’를 까야했다. 그렇게 뜨거웠는데, 왜 그리 빨리 식었을까. 나 혼자 식었던 걸까. 6월 1일 부산대에서 열린 5기 전대협 출범식은 지나고 보니 무슨 정리집회 같았다. 내내 비 쫄딱 맞으며 생고생을 했건만.

 



 

이듬해 3월 14대 총선이 있었고(이 때가 내 생애 최초의 투표였던가, 91년에 지방선거가 있었나, 헛갈린다) 민자당이 299석 가운데 과반에서 1석 모자란 149석을 차지했다. 민주당 97석,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31석 등등. 총선을 전후로 한쪽에선 “민중권력 쟁취투쟁” 다른 한쪽에선 “아아아~ 민주정부”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5월 30일 6기 마지막 전대협 출범식이 한양대에서 열렸다. 한 10만이 모였다고 했나. 장관이었다. 연합노래패, 연합풍물패 공연이 지축을 울렸다. 하루 일정이 끝나고 집에 갔다가 다음날 다시 올 수도 있었다. 90년 출범식에 비하면 많이 달라졌다. 이때가 거의 마지막 집회 참가였던 거 같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고 반년 룸펜생활을 하다가 방위가 됐다. 앞서, 92년 12월 14대 대선이 있었다. 33.8%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42.0% 득표로 김영삼 대통령이 됐다. 몇 번 안했지만, 이제 투표 그만해야지 싶었다.



기억나는, 혹은 기억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캠퍼스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80년대는 내게 존중해야 할 무엇이었다. 학습 받고, 학습을 시켰고 몇 가지 태그가 이어졌다. 이를 테면 보도블록과 화염병, 최루탄과 지랄탄과 물대포, 손수건과 치약 혹은 비닐랩, 눈가에 불어주던 담배연기, 싸움 후 머리 감을 때의 따가움, 농활 가서 굳이 피우던 청자 같은 것들. 방학이 되면 단체학습으로 ‘ㅌㄷ동맹’이니 ‘소하르파령 회의’ 같은 걸 외우거나 팀별로 학생회 선배의 외진 시골집에 가서 밤새 책 읽고 토론하고 장작을 때고 새벽엔 라디오로 무슨 소리방송을 듣기도 했다. 물론 모두가 다 몸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는 별로 소화가 되지 않았고 더러 진영 내 후배들의 연애까지 터치하려드는 모습은 ‘이, 뭔가’ 싶었다. 치열하자고 주문처럼 되뇌다가 스스로 벽 속에 갇히기도 했다. 무슨 근거로 사람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드는 거냐, 되묻기도 했다. 부끄럽지도, 후회스럽지도 않았지만 때로 집단은 왜소해보였고 개인이 부러웠다.



물론 또 다른 향유도 있었다. X세대, ‘어륀지’족이란 말이 이즈음 나왔던가. 입학선물로 아이와 미니카세트를 받았었다. 그리고 삐삐(언제부터 찼는지는 모르겠다)가 있었고 테이블마다 전화기를 내놓은 카페가 흔해졌다. 91년 부산에 놀러갔을 때 노래방을 처음 가봤다. ‘뭐 이런 게 있냐’ 하다가 정신 놓고 악을 쓰는 나를 발견했다. 문 열고 나오는데 대기하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얼굴이 마주치자 무척 뻘줌했다.



그해 모든 술자리의 마지막 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보다 ‘내 사랑 내 곁에’가 더 자주 등장했다. 그랬다. 김현식이 90년 11월에 죽었다. 92년 3월 서태지가 등장했다. 6월엔 이승환 1집이 나왔다. 여름방학 때 동기 한 놈이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한 곡만 테이프에 잔뜩 녹음해 텅 빈 학생회에서 마냥 들었던 기억이 난다. 방위 시절 때는 락카페에 처음 가봤다. 그 후 신촌에 스페이스였나, 몇 번 더 갔던 것도 같다. 93군번. 보직은 경계였다(방위한테 경계를 맡겼으니 그리 중요한 부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열심히 출퇴근하던 시절, 94년 1월 문익환 목사가 죽었고 2월에 김남주 시인이 따라갔다. 한 시대가 가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김남주 시인이 죽은 날에는 야간경계를 서다가 정말 주먹만 한 별똥별을 봤었다. 모자 눌러쓰고 대학로에서 문익환 목사 노제를 지켜봤다. 대열이 지나간 빈자리를 레코드상가에서 울려 퍼지던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 채우고 있었다.



94년 3학년 2학기에 복학했다. 그때까지 평점은 참 소박했고, 목표는 제 때 졸업하는 걸로 잡았다. 도서관에 매점이 있다는 것도 복학하고 나서 알았다. 후배들에게 ‘길’을 말하며 가두에 있었던 선배들 대부분 도서관에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은 가지 않기로 했다. 뾰족한 대책은 없었지만 그냥 따라가기도 싫었다. 따로 취업용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걸 빼면 썩 괜찮은 학생이었다(고 자평한다). 우리 과 옆집 사회학과 수업에 한참 재미가 들렸었다.

 


물론 모두 다 몸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별로 갈 데가 없었다. 도서관보다는 잔디밭이 여전히 좋았다. 상식 준비한다고 시집을 보는 선배한테는 괜히 화가 났다. ‘5월주간’을 맞아 단대 로비에서 ‘광주비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는데 다들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은 왠지 답답했다. 광주는 혼자 떠들고 있었다. 복학하고 더 친해진 어느 89학번 선배와는 가끔 집에 가는 역전에 서서 오뎅에 소주 반병 나눠먹고 헤어졌다.



95년 졸업여행을 간다는데 혼자 광주행을 택했다. 그것도 시대의 머시기인지, 겉멋인지 모르겠지만 망월묘역을 그때까지 못 가봤었다(4·19묘역도 4학년 때 처음 혼자 가봤다). 망월묘역은 생각보다 외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 그때 그 사람들이 있었고 경대도 있었고 김남주 시인도 있었다.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해 9월엔가, 집에 가는 셔틀버스에서 한겨레신문에 실린 쪽광고를 봤다. 사람을 뽑는데 기특하게도 제출서류 가운데 성적증명서가 없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봤다. 와보라고 연락이 왔고 필기시험 보고 면접 봤다. 재수 없이 붙었다. 한국기자협회란 곳이었다.



나중에 후배로부터 ‘형이 취업했다는 소식 듣고 놀던 후배들은 환호했고 도서관에 있던 선배들은 보던 책을 내던졌다더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혼자 웃었다. 95년 10월, 졸업을 앞두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김상철님 블로그 : http://ksoul.tistory.com)


사족을 좀 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다소 감정이 개입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나름대로는 다른 이들의 기억이 닿을 수 있는 '기호' 위주로 드라이하게 정리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물론 지극히 제한적인 제 개인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한 사례를 통해 90년대 학번 세대가 공유하는 것은 무엇인지,
서로 다르거나 새로운 것들은 또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항상 짐처럼 남아있던 과제이기도 했고요.

어찌하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고 기자님의 기획에 '충동적으로' 참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기록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