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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닷컴'에서는 연속 기획으로
해외 사례를 살피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와 영국 사례에 이어
이번에는 일본 NHK 사례입니다.
글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지금 KBS에서 벌어지는 일과 정말 닮아있습니다.
한국에서 유학 중인
미야모토 슈이치로씨께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NHK는 어떻게 '관영방송'이 되었나?
글 - 미야모토 슈이치로
(이 글은 민언련 회원 소식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사람은 신년을 집에서 NHK 가요청백전을 보면서 맞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NHK 가요홍백전의 시청률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시청률조사전문회사인 video research사(현재 일본에 유일하게 남은 시청률조사회사)의 자료에 따르면 1984년도까지는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70%를 넘지 못한 경우가 딱 2번밖에 없고, 90년대에 들어서도 50%는 꼭 넘었었다. 이외에도 사상최고시청률 81.4%(1963년12월31일. 2위는 도쿄올림픽 66.8%)등 이 프로그램이 세운 기록은 곧 시청률의 역사였다.
매년 12월31일 NHK홀에서 저녁7시부터 열리는(NHK 생중계) 이 프로그램은 1951년에 시작됐는데 주로 인지도가 매우 높거나 그 해 뛰어나게 활약한 일본을 대표하는 가수나 밴드들이 홍조(紅組.여자)와 백조(白組.남자)로 나뉘어 노래 경연을 한다. 그래서 가수희망자나 신인가수면 “코하쿠(홍백)에 나와서 이름을 알려지는 것”이 꿈이고 목표가 된다. 또 이 프로그램은 최신가요부터 엔카(트로트)까지 뽑히는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세대라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TV의 역사를 함께 걸어온 이 프로는 그야말로 일본대표 대중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 눈이 보이게 시청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5~2007년도 기록만 보면 여전히 년간고시청률(年間高視聽率)은 2002 2006년 월드컵중계, 그리고 2003년 초 민영방송인 일본TV가 개국50년을 맞아 방송한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외하고는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치를 자세히 보면 겨우 40%대에 머물렀고 2004년은 39.3%와 2007년은 같은 39.5%였다.
물론 인터넷 보급이나 내용의 문제도 있겠지만 이 프로그램의 담당PD가 제작비를 착복 이른바 ‘NHK 불상사’ 때문에 사람들이 NHK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규모 시청률거부운동에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더 심각한 것은 NHK가 공영방송(일본에서는 공공방송이라고 한다)으로서의 저널리즘 정신 즉 권력에 대한 감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 마치 “정부여당(자민당) 후원방송”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점이다.
“60년대에는 권력과 ‘대치’한 후 ‘타협’에서 ‘굴복’으로 또 70년대엔 ‘굴복’에서 ‘복종’으로. 80년대가 되면서 ‘복종’에서 ‘영합’으로 추이한다.”
옛 NHK기자이자 현재 대학교수인 카와사키 야수시(川崎泰資)는 그의 저서 ‘NHK와 정치-해체된 공공방송’에서 NHK과 권력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다. 정년퇴직 할 때까지 NHK에 근무한 1934년생인 그는 1981년 “NHK Lockheed사건”(다음호에서 언급) 때 정치부 부부장이었고 행의행동의 중심인물로 규정되어 보복인사를 당하기도 한 기백 있는 기자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과 함께 알려지지 않았던 NHK와 정치의 깊은 관계를 고백한다. 1925년 개국이래 NHK는 사실상 국영방송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방송법에 입각한 특수법인이 되면서 방송민주화를 내세우고 새롭게 출발했다.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 NHK회장선임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한 GHQ(종전(終戰)이후 연합국이 포츠담 선언 및 항복문서에 입각한 대일점령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945년 8월 일본 요코하마(橫浜)에 설치한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기관)는 방송개혁을 위해 신설한 ‘방송위원회’에 NHK의 인사권한을 넘겼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GHQ(당시 연합국 최고사령관 휘하 기관)는 방송위원회 인선을 정부 체신청(逓信省. 현재 총무청[総務省]. 일본의 중앙정부기관)과 CIE(민간정보교육국. GHQ의 문화담당부)에 요청했다. 지극히 보수적인 체신청 입장에서는 CIE는 거의 ‘빨갱이’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초대 방송위원회 구성을 놓고 양측의 많은 진통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과정에서 체신청과 CIE가 각각 절반의 위원을 뽑는 것으로 합의를 이루었다. 그 결과 1947년 설립된 방송위원회는 당시 정부 입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진보적인 인재로 구성될 수 있었다.
방송위원회 구성은 현재 NHK를 통괄하고 있는 “경영위원회”와도 전혀 다른 다양한 인선이었다. 게다가 GHQ 승인 하에 초대 NHK 회장은 이전부터 천왕제도 폐지를 주창한 진보적인 학자인 타카노 이와사부로(高野岩三郎)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 속에서 일본 국민의 방송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일본 방송민주화에 대한 희망의 빛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급하게 진행된 방송민주화를 우려한 정부와 체신청 관료들은 겉으로는 GHQ에 따르는 듯 했으나 한편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카와사키의 글을 인용하면 방송위원회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타카노 회장 선출이라는 인사를 실현했지만 그 이후의 핵심인사 임명에 대해서는 관료사회의 텃세에 밀려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어 방송위원회 자체가 자연소멸 상태로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고” 말았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없지만 방송위원회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NHK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는 카와사키의 말은 당시 “방송민주화”와 “공영방송 설립”이 일본 국민에게 얼마나 간절한 염원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전후 민주적으로 출발했던 NHK가 과거 침략전쟁에 협력하고 국민동원에 열을 올리던 과거 관영방송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 주요 요인이 무엇인지 짚어보자.
첫 번째로는 1950년에 통과된 방송법 이다. 방송법은 방송의 민주화 방송의 자유 등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전후 유일한 언론제약이라 할 정도로 제도적으로 NHK를 권력의 지배하에 놓아버린 장치였다. 방송법에서 가장 획기적인 것은 전파 관리위원회를 내각에서 독립한 행정위원회로 발족해 방송행정을 이 행정위원회 감독 하에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 독립과 함께 이 전파관리위원회는 폐지되었고 방송행정에 대한 권한은 이전처럼 내각에 옮겨놓았다. 즉 우정청이 다시 방송국의 허가, 인가권을 빼앗아 국민의 방송을 다시 일본 정부의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이전 방송행정 체제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두 번째는 NHK의 최고기관인 경영위원회 문제 이다. NHK 사장 임명을 결정하는 경영위원회는 국회의 승인을 거쳐 총리가 임명하게 되어 있다. 제도적으로는 민주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영위원의 임명에 대한 전권은 정부 부처인 총무청에 쥐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의석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자민당의 입맛에 맞는 경영위원만이 국회승인을 얻어왔다.
물론 방송법 규정 16조에는 경영위원은 ‘공공의 복지에 관해 공정한 판단이 가능하고 넓은 경험과 지식을 가진 자’ 중에서 뽑을 것으로 명시되어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교육, 문화, 과학, 산업 등 각 분야를 공평하게 대표해야 한다고도 못 박고 있다.
하지만 경영위원회 임명 기준에는 방송 공영성 공정성에 대한 이해와 언론 보도에 대한 견해가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경영위원은 권력에 의해 임명이 좌지우지되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영위원이 되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자질보다 자민당과 총무청의 말을 얼마나 잘 듣느지가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게다가 우정청이 주관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어서 이뤄지는 수신료 인상은 일면 민주적인 절차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NHK가 수신료 인상을 추진할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수신료 인상 결정을 인질로 무언의 압력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한국 공영방송인 KBS가 NHK과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걱정스럽다. 특히 KBS에서 NHK를 공영방송의 모델로 여러 번 소개한 바가 있었는데 이렇게 정치권과 밀착되어 정치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방송을 ‘우수 공영방송’의 예로 드는 것 역시 우려스러운 일이다.
“NHK와 권력의 관계는
타협에서 굴복’으로 선회한 60년대 이후,
70년대에는 ‘굴복에서 복종’으로,
80년대에는 ‘복종에서 영합’으로 변화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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