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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열이 만난 사람/아름다운 시선 캠페인

촛불에 이철수식 '감성투쟁'을 제안하는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6. 27.

촛불이 격해지고 있다. 물론 촛불이 격해지는 정부에 있다. 무리하게 쇠고기 고시를 강행하고 촛불집회를 강경진압한 것이 근본 원인이다. 촛불이 격해지는 것은 정부의 성급한 정책과 경찰의 무리한 진압에 대한 ‘리액션’일 뿐이다.


어쨌든 촛불이 격해지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이 현실은 조금 개선할 필요가 있다. 촛불이 격하면 격해질수록 국민 다수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은 다급하지만, 상황에 대한 대응은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이때 떠올린 사람이 판화가 이철수 선생이다. 그의 감성적인 판화 작품을 보고 성난 마음을 누그러뜨리자는 것이 아니다. 이철수 선생도 지금 투쟁 중이다. 마을 뒷산에 콘도를 지으려는 건설사와 이를 추진하는 시장에게 항의하며 마을주민들과 반대투쟁을 하고 있다.


1년 넘게 진행되는 지리한 투쟁이지만 이철수 선생은 그 투쟁을 너무나 예쁘게 전개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현수막에 ‘마을산을 꼭 지키겠습니다’와 같은 담백한 글귀로 주장을 알렸다. 막고자 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확실한데, 격한 말과 격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달 경기도 시흥시의 작은자리사회복지회에서 P당기획의 탁현민 대표(‘아름다운 시선’ 캠페인 총괄 기획자)와 함께 그를 만났다. 사람들의 감성을 회복시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아름다운 시선’ 캠페인(삼일제약 후원)의 인터뷰 대상자로 이철수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인터뷰 후 그는 복지관 아이들을 위한 즉석 판화학교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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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아름다운 시선’ 캠페인을 어떻게 지켜보았나?
솔직히 나는 이런 일에 이름을 올리는 법이 없다. <시사IN>과 관련된 일이라 동참했다. ‘시사저널 싸움’의 뒤끝에, 뭔가 갈무리하는 일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동참했다.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감성을 일깨우자는 캠페인인데, 감성이 뭐 하는 것인지를 좀 생각해봤다.


감성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었는가?
지금 시대에 감성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의 감성은 상품을 향해 있는 것 같다. 감성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감성의 상품화가 갈 데까지 갔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감성을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구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우리 시대에 감성이 어떻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도시적 감성’은 이왕이면 세련되고 감각 있는 물건을 사라고 강요한다. 감성이 소비문화의 하수인이 되어 감성 마케팅이니 하는 감성의 상술에 우리가 놀아난다. 감성이 세상의 변화에 기여해야 하는데 소비에만 가세하고 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물건을 보고, 혹은 그것을 사서 감성을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감성을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감성을 어디서 어떻게 작동시켜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감성에 눈을 뜬다는 것, 혹은 감성을 제대로 작동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주류 흐름에 반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찾고 만들어내는 힘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역주행하면 사고가 나고 다친다고 생각해 엄두를 못 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역보행이라도 해봐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바삐 움직이는 한 세상을 느낄 수가 없다. 세상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나를 느껴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밥줄’에만 얽매이면 내가 왜 이 세상에 나와서 왜 살고 가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지도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감성이 발달했다는 것은 필요할 때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 용기 있게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감성을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을까?
이 캠페인에서 이외수 선생이 “시를 읽어라”라고 충고했는데, 과연 시는 믿을 만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읽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나?
농사를 지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농사야말로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의 원조이다. 심어서 기르든, 아니면 절로 나는 것과 만나든 ‘살아 있는 생명’과 만나는 일이다. 풀과 나무는 자기를 해석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주어진 조건을 타박하는 기색 없이 살다 간다. 농사를 짓다 보면 존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은 질문도 스스로 하게 된다. 일이 단순하니까 쓸데없는 생각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여러 모로 좋다.


그런 생각을 해도 막상 실천하려면 쉽지 않은 것이 현실 아닌가?
귀농을 꿈꾸거나 전원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내 생활을 부러워한다. 기회는 있는데 시작하지 않으면서 그냥 부러워만 한다.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기기 힘들면 텃밭이라도 가꾸고, 그도 안 되면 큰 화분에 고추 몇 포기라도 키워보면 된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생명과 만날 필요가 있다.


생명과 만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풀을 뽑으면서 나는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분 중에는 “여기는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란다”라고 말하고 뽑는 분이 있다. 나보다 고수였다. 생명을 대할 때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감성을 잘 발달시켰기 때문 아닐까?  


마을 뒷산에 대규모 콘도를 세우려는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으로 안다. 그런 싸움을 하다 보면 생각도 각박해지지 않나?
이렇게 복잡하고 이토록 가시밭길일 줄 알았으면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2년째다. 그동안 그림도 제대로 못 그려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낭비가 아니었다. 손익계산을 한다면 오히려 이익이 더 많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지만 큰 싸움 앞에서 끝까지 위엄을 지키시는 어르신들 모습에 깊이 감동받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자연의 지혜를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 좋은 선생님이 주변에 수도 없이 계셨는데 몰랐었다.


싸움의 방식이 좀 달랐던 것 같다. 콘도 반대 현수막이 예뻤다. 왜 그런 방식을 택했나?
이왕 중심에 설 것이면 좀더 감성적인 형태로 하고 싶었다. 거칠고 격한 구호는 줄이고 감성적인 말을 앞세웠다. ‘마을 산을 꼭 지키겠습니다’ ‘우리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겠습니다’ 이런 구호로도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르신들을 보면, 은근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본심이 있었다.


결과는 어떨 것 같나?
결과도 좋았으면 한다. 끝나고는 우리 싸움에 대한 작은 보고서를 내보고 싶다. 나이 먹을수록 세상에서 어떤 몫을 하고 살아야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정태춘씨도 그런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마을을 위해 노래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를 보면 아쉬운 마음이 있다. 대추리 싸움(미군기지 문제)에 지쳤는지 요즘에는 가방만 만들고 있다. 이 캠페인에라도 동참시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