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사람과 사람의 내일을 이어주는 다리다.
촛불은 도전이다.
촛불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열 창의력의 실체가 드러났다."
사진작가 김중만은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의 붉은악마를 찍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했다. 그 역동하는 한국인의 에너지를 뷰파인더에 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는 것이었다.
김중만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다. 그는 촛불집회에서 우리의 ‘내일’과 미래를 향한 ‘도전’을 읽었다. 그는 “촛불은 사람과 사람의 내일을 이어주는 다리다. 촛불은 도전이다. 촛불을 통해 미래를 열 창의력이 무엇인지 드러났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촛불집회를 직접 찍지 않았다. 이번에는 일부러 ‘찍지 못한 한’을 남겨두기로 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 촛불을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카메라에 비친, 촛불을 보는 다양한 시선이 그대로 담기는 것이 가장 낫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사진을 좋아하는 고등학생 아들을 보냈다. 내일을 살아갈 세대는 반드시 ‘기록’해야 할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감성회복 캠페인, ‘아름다운 시선’을 위해 만난 김중만 선생 인터뷰를 소개한다. 이 인터뷰는 P당기획 탁현민(<아륾다운 시선> 캠페인 총괄기획자) 대표와 함께 이뤄졌다. 그동안 ‘아름다운 시선’은 소설가 이외수, 가수 윤도현, 브랜드 디자이너 손혜원, 시인 도종환, 판화가 이철수씨를 만났다.
- 사진작가라서 더 궁금하다. ‘아름다운 시선’이란 어떤 시선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름다운 시선’은 한 개인의 일방적인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남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시선’이다.
- 촛불집회는 어떤 시선으로 보았나?
촛불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에 대해서 개념 규정을 내려야 한다. 정치는 사람과 사람의 몸과 몸을 이어주는 다리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의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다리다. 그렇다면 촛불은 무엇이냐? 사람과 사람의 내일을 이어주는 다리다. 촛불은 도전이다.
- 촛불이 도전이라면, 무엇에 대한 도전인가?
촛불의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에 가치부여를 해야 한다. 함부로 이념적인 평가나 해석을 내려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창의력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사람들은 창의력을 ‘땅투기’에 쓴다. 혹은 ‘로또’와 ‘바다이야기’에 쓴다. 촛불을 통해 미래를 열 창의력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창의력은 안정적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곳에서 나온다.
- 사진작가로서 촛불집회를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2002년에 붉은 악마를 찍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에너지의 광장이었다. 이번에는 한으로 남기기 위해 일부러 참고 있다. 김중만이라는 작가의 시선으로 촛불집회를 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촛불은 보통 사람들의 보통 시선으로 담는 것이 더 맞다고 본다.
- 2002년의 붉은악마와 2008년의 촛불집회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는가?
폭발력의 차이가 있다. 2002년에는 강했다. 2008년의 광장에는 약간의 '노스탤지어(6월 항쟁에 대한)'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 하나하나에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희망의 꽃'을 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 촛불집회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하나?
우리는 정말 성숙한 지성과 사고를 가진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너무 선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자유롭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쿠데타가 날 나라가 아니다. 비판도 구태의연하게 할 필요가 없다. 퇴보를 규정하는 것은 퇴보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쉽게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08년은 이랬다'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이라고 본다.
- 사진작가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진가와 예술가의 길은 다르다. 사진가는 시대의 기록자다. 그 시대의 감성과 아픔과 사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시대의 감성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사진가의 근본은, 아무리 시대가 첨단을 달려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기록’이라는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보다 더 오래 사진작업을 하기 위해 그 중간 쯤에 내 미학적 개념을 정리해 두고 있다.
- 작품 활동을 하는데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은 어떤 것이었나?
한 남자의 일생에는 보통 세 번 정도의 변곡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열 번 정도 있었다. 추방 마약 구치소 정신병원 이혼 등등. 삶이 바닥으로 급강하하는 체험을 여러 번 해보았다. 그런 경험을 하기 전에는 오직 예쁜 여자와 화려한 것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그 후 세상의 다양한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소외된 것들에 많은 관심이 갔다.
- 추방이라는 경험은 아무나 하기 힘든 경험인 것 같다. 어땠나?
그냥 쫓겨나는 것이다. 무조건 첫 번째 비행기를 타고 낯선 시간 속에, 계획되지 않은 장소에 버려지는 것이다. 그런 갑작스런 추락을 경험해보면 사람은 변하게 된다.
- 김중만은 어떤 사진작가인가?
카메라를 잘 모르는 사진작가다. 진짜 모른다. 원래 기계를 잘 모른다. 심지어 작동법도 잘 모른다. 그런데는 관심이 없다. 오직 사진 찍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 보통 사진작가들은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프리카 꽃 패션 풍경 전통 등 참 다양한 주제의 사진을 찍는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슬럼프를 모르는 작가다. 좋아하는 것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이다. 슬럼프를 느끼기 전에 이미 다른 것이 좋아진다. 보통 40대 후반 정도 되면 작가들은 잘 되는 것을 붙잡고 죽을 때까지 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덕스러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매일 같이 새로운 것이 보인다. 모퉁이 돌이 갑자기 새로워 보이기도 하고, 뭔가에 갑자기 바보스럽게 빠져드는 스타일이다.
- 사람들은 김중만을 사진작가라기보다 광고사진가나 패션사진가로 보는 것 같다.
신경 안 쓴다. 상업작가라고 하면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 광고사진은 10번 정도밖에 찍지 않았다. 패션사진도 마찬가지고.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봐준다면, 조금 찍고도 인상적인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니까 만족한다.
- 그런 사진을 찍기 전에는 어떤 사진작가였나?
사진을 못 파는 사진작가였다. 사진이 굉장히 우울했다. 사람들은 내 사진을 보면 우울해진다고 했다. 사진이 안 팔려 배는 고팠지만 속으로 ‘내가 진짜 사진을 찍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정말 우울했었다. 안 팔리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다는 말을 그때 절감했다.
- 어떻게 해서 사진작가가 되게 되었나?
원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탐험 소설가가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언어차이(당시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녔다) 때문에 이룰 수가 없었다. 대신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다시 사진을 하게 되었다.
- 사진작가로서 지금 고민하는 것은?
한동안 핸드폰 사진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찍은 사진작품으로 책까지 내려고 했다. 그러다 그만두었다. 요즘 '뭐든 쉽게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한다.
- 사람들이 김중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부러워하는 것 같다.
좀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1970년대에 귀걸이한 남자는 나 뿐이었다. 아마 내가 최초였던 것 같다. 여자들이 참 좋아했다. 그러나 여자들이 좋아해주는 만큼, 남자들이 싫어해 주었다.
- 사람들은 김중만을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것 같다. '자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한 때는 자유가 나를 움직이는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1995년에 보름 정도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된 경험을 한 뒤에 생각이 바뀌었다. 80명 정도가 함께 있었는데, 내가 보니까 제대로 미친 사람은 2~3명 밖에 없었다. 나머지 멀쩡한 사람들이 왜 거기 있어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그들은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며칠 동안 지켜보니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은 갇혀 있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일이 없어서 미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자유는 의미가 없었다. 내일이 없다는 절망감에 갇혀 있다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 자유보다 희망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정신병원에도 수용된 적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정신병원에 처음 수용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아 대한민국이 나를 예술가로 만들어 주려고 용을 쓰는구나'하는 것이었다.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두 번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거기 환자들이 '넌 왜 왔니' 물어서 '난 안 미쳤다'고 했더니, '우리도 안 미쳤어'라고 하더라. '이러면서 도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처럼 돌지 않기 위해 그들을 열심히 관찰했던 것 같다.
- 세상에 반항하는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아웃사이더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인사이더가 누리는 기득권과 특권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아웃사이더에게 필요한 유일한 양식이다. 그 다음엔 남 눈치 볼 것 없이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아웃사이더가 되면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약속을 안 지켜도 된다. 사기만 안치면 된다.
- 아웃사이더로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나?
돈을 못벌었다. 사진을 33년 찍었는데, 25년을 카메라 한 대로 작업했다. 사진 찍은지 30년만에 강북에 내 아파트를 갖게 됐다. 지금은 잘 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한창 일할 때는 일주일에 미팅을 스무번 정도 했다. 닥치는대로 일했다. 지금은 거의 일 안한다. 일 년에 스무번 정도 한다. 그런데 지금이 수입이 더 낫다. 세상 참 웃긴다.
- 자신과 같은 아웃사이더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
박영석 대장이다. 4천미터까지 따라가 보았는데 죽는 줄 알았다. 8천미터 이상을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게 되었다. 박영석과 엄홍길은 미친놈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부럽다. 남들은 못보는 세상을 보니까. 박영석 대장이 내년에 남극에 가는데 따라가기로 했다. 원래 추운 것 정말 싫어하는데, 극한을 체험해 보고 싶다. 지금 원서 써놓고 기다리고 있다.
- 지금 본인이 제일 ‘희망’하는 것은?
‘20*24인치 카메라’를 갖는 것이다. ‘디테일 싸움’을 하고 싶어서다. 이전에는 ‘감성 싸움’만을 했는데, 이제 세계적인 사진작가들과 ‘디테일 싸움’을 하고 싶다.
주> 어제 <무릎팍도사>에 김중만 선생이 나와서 화제가 되었군요.
김중만 선생에 대해서 더 아실 수 있도록,
1년 전 했던 인터뷰를 '갱신'해서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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