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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기자들, PD들/언론노조 1차 파업 관련 포스팅

이명박시대, 언론인들이 겪는 '사회적 사춘기'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2. 16.






검사집단이나 의사집단처럼 엘리트집단을 자처하는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기자집단 역시 선후배질서가 엄격한, 지극히 후진적인 문화를, 무슨 대단한 것처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집단의 선배들은 당연히 전수해주어야 할 업무 노하우를 전수하며 온갖 생색을 내며 거드름을 피운다. 이들 집단에서 후배 구박은 당연한 일상이다.



제작 자율성이 높은 PD집단은 상대적으로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자유로운 것 같다. 프로그램 내에서 연출과 조연출의 지배 피지배관계는 존재하지만 프로그램 밖을 벗어나면 기자들처럼 '군대놀이'를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찌되었건 언론계의 미덕인지 악덕인지 모를 이 선후배 관계가 위기를 맞을 때가 있다. 바로 '파업'이다.



파업을 하면 선배들이 거드름을 피우기가 힘들어진다. 선배들이 그나마 헛기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을 통해 쌓은 노하우 때문이었는데, 일을 놓았으니 거드름을 피울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반면 파업을 하면 선배들은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집에 있는 식구들 생각, 회사에서의 입장,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진다.



평소 후배들에게 신망을 쌓아둔 선배라면 더욱 부담스럽다. 파업 때 역할이 주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파업 때 역할은 책임을 동반한다. 징계든 소송이든. 매 앞에 장사 없듯이 징계와 소송에도 장사 없다. 팔자에 없는 '의인놀이'를 하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이런 위치에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내 자산이 얼마나 되지, 퇴직금은 얼마나 받을 수 있지, 통닭집을 할까? 테이크아웃 커피숍을 낼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반면 후배들은 마냥 용감해진다. 몸이 가볍고 책임은 멀기 때문이다. 간부 승진이나 특파원 자리 혹은 해외 연수 선발 건 같은 것을 염두할 필요가 없다. 해보다 아니면 차라리 나가겠다는 생각도 쉽게 할 수 있다. 나눠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파업의 책임은 지도부가 진다. 그래서 파업이 시작되면, 파업이 길어지면(혹은 YTN처럼 파업에 준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선배들의 어깨는 점점 처지고 후배들은 점점 목을 세운다.



파업이 끝나면 선후배 관계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파업 전에는 세로줄이었던 줄이 가로줄로 바뀌는 것이다. 선후배 관계가 동지 관계로 재조정 되는 것이다. 예전처럼 ‘구박질’을 하기가 녹록치 않다. 파업 때 용감했던 후배와 소심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책임질 것 다 지고, 회사에 찍히고, 후배들에게도 예전처럼 막하지 못하고…. 파업은 선배들에게 별로 남는 게 없는 장사다.



파업을 하면 선배들은 선배다움을 일로 보여줄 수 있을 때가 행복했던 때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가두 선전전을 나가도 후배들의 머릿속은 점점 개운해지는 반면 선배들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진다. ‘시사저널 파업’이 끝날 무렵 한 선배의 해지된 적금통장들을 보며 나와 파업의 무게가 달랐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파업은 선배들에게 더 어려운 게임이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즐겨야 한다(일단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파업은 선배들이 겪는 ‘사회적 사춘기’다. 사춘기를 잘 겪어야 성숙한 인격체가 되듯, 파업을 잘 겪어야 진짜 선배가 될 수 있다. 사춘기 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 문제아가 되듯, 파업 때 출세욕을 부리면 ‘문제어른’이 된다. 청소년이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고 어른이 되듯, 선배들도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진짜 선배가 된다.


2백일 넘게 낙하산 사장 퇴진운동을 벌이는 YTN에서, 불법 무기한 제작거부를 결의했던 KBS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등장한 미디어 악법을 막기 위해 ‘동투’를 벌인 MBC에서 ‘문제어른’이 출몰했다. ‘승리의 MBC’라지만 MBC도 예외가 아니었다(선임자들로 구성된 MBC공정방송노조는 한나라당과 똑같은 논리로 MBC 민영화를 외쳤다). 이들의 ‘일탈행동’은 후배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영원히 파업하는 언론사는 없다. 파업이 끝나면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된다(<시사IN>처럼 매체를 새로 창간해서 정착하는 방법도 있다). 파업의 동지들은 다시 선후배로 돌아가고 가로줄은 세로줄로 바뀐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연출된다. 파업 때 ‘선배로움’을 증명한 선배들은 다시 앞에 세우지만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문제 어른’들은 줄에서 열외 시켜버린다. 영원히.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한 ‘불량청소년’처럼 몹쓸 출세욕 때문에 ‘불량간부’가 된 선배들, 파업이 끝난 후 이들의 운명은 처참해진다. 특히 오너십이 없는 YTN KBS MBC에서, 이들 ‘왕당파’의 운명은 불문가지다. YTN KBS MBC의 선배들이 부디 탈선하지 않고 이 ‘사회적 사춘기’를 잘 헤쳐나오길 바란다.


<PD저널>에 보낸 글입니다.